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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01화 (101/530)

101화. 활검

운현은 스스로 ‘일충현에게 받은 것이 작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고도 했다.

은원을 천금보다 중히 여기는 무인으로선 당연한 말이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이의신을 내세워 없던 은원을 굳이 엮은 이유이기도 했다.

은혜를 갚음은, 무인에게는 그 어떤 의문조차 묻어 버릴 정도로 큰 의미일 테니 말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그와 혈연이라도 맺는 것이겠지만.”

피는 물보다 강하다. 정에 약한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다.

“아, 그것도 좋네요.”

이서연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러면 저는 그의 아이를 낳겠어요. 그러면 여불위보다 더욱 크고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겠지요.”

이호암은 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내 앞에서 대놓고 협박을 하는 대담함도 마음에 들고.”

몸을 뒤로 기대며 이호암이 말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도 모르겠구나. 그에게 정말로 그런 가치가 있더냐? 네 모든 것을 다 던질 만큼?”

이서연은 빙긋 웃었다.

“아버지는 남궁세가 가주의 무공 경지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난데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호암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글쎄다? 사람들은 사대세가의 가주들을 무당이나 화산의 장문인들보다 아래에 놓더구나.”

이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남궁세가의 가주가 성취한 경지는 놀랄 만해요. 아마 당장 무당이나 화산의 장문인들과 겨룬다 해도 손색이 없을 거예요.”

이서연은 호암상단의 영애로서 남궁세가에서 무공을 배웠다.

다른 외문제자들과 달리 그녀는 남궁세가의 저력을 보여 줄 만한 자리에 자주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거기서 본 것들은 남궁세가의 진면목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흐음, 허나 무당이나 화산이라고 숨겨진 힘이 없겠느냐? 결과를 확신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호암의 지적에도 이서연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버지.”

이서연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사대세가의 가주는 물론 무당과 화산의 장문인마저 꺾을 수 있는 인물이 우리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호암은 그녀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 년 내에 세가를 갖게 되겠지. 삼십 년 후에는 천하 삼대상단의 하나로 서게 될 것이며, 오십 년이 되면 호암이라는 이름이 천하 모든 상단과 세가의 정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호암이 딸 이서연에게 물었다.

“그 한 명으로 인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리 여기는 것이냐?”

“네.”

이서연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이호암은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하지만 이호암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서연은 ‘매의 눈’을 가졌다.

어려서부터 그녀가 감정하는 것에는 틀림이 없었고, 지금도 흘낏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상품의 가치를 매겨 낼 수 있었다.

이호암 자신과 같은 재능을 물려받은 이서연.

그 재능은 남궁세가에서 무공을 배우는 동안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어, 그녀의 안목은 가히 절정의 고수에 비견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호암은 그녀를 다른 자녀들 중에서도 유독 각별히 여겼다.

하지만 그런 이호암으로서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말은 너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면.”

문득 이서연이 말했다.

이호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서연은 말을 이었다.

“저 집의 후원을 구경시켜 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그곳의 꽃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본가의 정원과 저 집의 후원, 어느 쪽이 더 꽃이 오래갈 것 같으세요?”

호암상단 본가의 정원은 천하에서 이름난 정원사들에 의해 가꾸어진다.

그런 본가와 저 집의 촌스러운 정원을 비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본가에 모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서연은 사뭇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활검(活劍)을 아신다면 아버지도 반드시 저 집의 후원에 거실 거예요.”

그녀는 가늘게 미소 지었다.

붉은 입술에 걸린 그녀의 미소는 달빛 아래 더없이 도도하고 자신만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

이호암은 약속대로 항주까지 가는 배를 준비해 주었다.

운현 역시 서기 시험에 늦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던 터라 흔쾌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짐을 꾸린 후, 운현은 형수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연회 이후 부쩍 말이 없던 부인은 끝내 눈물을 내비쳤고, 운현은 왠지 모를 죄스러운 마음에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운현은 일아영에도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아영은 악양 나루터까지 운현을 배웅하러 나왔다.

“아, 이 배인가 보오.”

호암상단의 표기를 펄럭이는 커다란 상선을 보며 운현이 말했다.

어차피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일아영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었다.

일아영은 고개를 들어 상선을 쳐다보았다.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항주까지는 오래 걸리나요?”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가슴이 아려 왔다.

저택을 나올 때 본 형수님의 눈물이 아직 눈에 생생한 탓이기도 하리라.

“장강을 따라 내려갈 테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운현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게다가 한번 왔던 길이니 더 금방 지나가지 않겠소, 아영 누이.”

누이란 말에서 일아영의 눈매가 살짝 움직인다.

운현은 내심 아차 싶었지만 일아영은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끝없는 동정호가 펼쳐져 있었다. 운현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듯 천천히 동정호를 돌아보았다.

그런 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일아영은 착잡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

‘그래, 이게 최선이야.’

일아영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 마음은 조금 아프시겠지만……, 어쩔 수 없어.’

일아영은 어머니의 눈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과 이 공자의 혼약이 선언되던 그때, 그들은 운현을 배신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아니, 배신 같은 건 아니야.’

일아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비록 생전의 부친과 약속이 있었다 해도 이제 와서 그걸 빌미로 자신과 혼약을 하겠다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다.

일아영은 지금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나 정작 운현이 떠나겠다 하니 왠지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도 그러셨겠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떠나는 운현에게 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심정을 일아영도 모를 바는 아니었다.

죽은 남편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과, 운현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결국 눈물로 흘러내린 것이다.

일아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쁜 사람은 없다. 단지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뿐이다.

일아영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다 잡고 있었다.

“오라버니!”

갑작스럽게 들린 낭랑한 목소리에 일아영은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호암상단의 영애 이서연이 화려한 마차를 뒤로하고 그린 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 서연…… 누이.”

운현이 어색한 호칭으로 더듬거리듯 말했다.

일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처음 자신을 부르던 운현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잘도 누이라 부르더니…….’

언제는 아주 뻔뻔해 보이고, 어느 때는 또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생각해 보면 운현은 일아영에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박, 사박.

이서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일아영에게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넨 이서연이 운현에게 말했다.

“벌써 나오셨군요, 오라버니.”

“여기는 어쩐 일이오, 서연 누이?”

운현의 물음에 이서연은 생긋 웃었다.

“마침 저도 항주를 갈 일이 생겨서요.”

항주는 수륙 교통의 요지다.

호암상단의 영애에게 항주를 갈 일이 생기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운현에게 이서연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일아영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데 이서연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올 때도 함께였는데 갈 때도 같이 가게 되었네요. 그럼 저는 먼저 올라갈게요.”

이서연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커다란 상선에 올랐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일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서연, 이호암의 영애…….’

이호암의 이름이 호남성을 울리는 것에 비하면 그의 일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것은 호암상단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단의 분위기가 철저하게 일에만 집중하는 편이기도 했지만, 유독 이호암의 주변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호암상단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호암과 그 일가에 대해 엄청난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쩐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야.’

“아영 소저.”

문득 옆에서 들린 운현의 목소리가 일아영을 상념에서 깨웠다.

일아영이 돌아보자 운현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사락.

운현은 손에 쥔 것을 일아영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죠?”

어색하게 웃으며 운현이 손을 폈다.

그 것은 일아영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건?”

일아영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운현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진작에 돌려 드려야 했던 것이지만…….”

손에 든 것을 내려다보던 운현은 고개를 들고 일아영을 쳐다보았다.

머뭇거리던 일아영이 천천히 한 손을 내밀자 운현은 조심스럽게 손에 든 것을 그녀의 손 위에 얹었다.

톡.

손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

섬세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지만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그것은 바로 반지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 준 두 개의 반지 중 하나이자, 며칠간 그녀를 잠 못 이루게 했던 바로 그 반지.

일아영은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 고집으로 괜히 아픈 기억을 생각나게 한 것 같아 미안하오.”

운현은 일아영의 손에 놓인 반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 내게 남긴 유일한 것이라 차마 돌려 드리지 못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형님을 그리워하실 분은 바로 형수님이시니…….”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일아영에게 말했다.

“형수님께 전해 주시오, 아영 소저.”

일아영은 고개를 들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운현은 여전히 쓸쓸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일아영은 혼란에 빠졌다.

‘……왜?’

어째서 지금 이 반지를 돌려주는 것일까?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깨끗하게 포기했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설마…….’

언젠가 어머니가 한 말처럼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운현이 보여 준 모든 행동은 사실 전적으로 호의에서 비롯한 것들이었을까?

일아영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확신하던 모든 것들이 갑작스레 엉켜 버리고 있었다.

바스락.

그사이 운현은 품속에서 얄팍한 서찰을 꺼냈다.

“그리고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아영 소저의 성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형수님께 드리는 것이니 전해 주시오.”

일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운현에게 서찰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폈다.

바스락.

운현이 말릴 틈도 없었다.

그리고 일아영의 눈에 드러난 것은 바로 작지 않은 금액의 전표였다.

일아영의 표정이 굳자 운현이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겨, 결코 다른 뜻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오. 더구나 아영 소저는 이제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도 혼례를 치를 수 있지 않소? 이건 그저 작은 성의일 뿐이니…….”

뒷말을 흐리던 운현은 급히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아영 소저, 나는 이만 가보겠소.”

그렇게 말하며 운현은 몸을 돌리려 했다.

“아, 저기…….”

일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운현을 불렀다.

운현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지만 일아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일어난 이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운현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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