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삶에 책임을 진다는 것
“오라버니가 다듬었다고요? 직접요?”
이서연은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나 일아영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가 신경을 쓰신 모양이네.’
물론 이 후원은 일충현과 부인의 추억이 담긴 곳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이 집안의 어느 한 곳인들 추억이 없으랴?
후원을 단장하되 꽃나무만은 그대로 놓아두라 한 것은 아마 운현을 배려한 탓일 것이다.
운현이 며칠씩 매달려 가며 이 후원을 다듬은 것은 일아영도 부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설마 어머니는 아직도…….’
조금 전까지도 좋았던 기분이 갑자기 확 나빠졌다.
“아하!”
하지만 이서연은 오히려 탄성을 터트렸다.
그녀는 방금 전 불편한 표정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라버니가 다듬은 정원이군요. 설마 이런 쪽에도 조예가 있으셨던 건가요?”
“아니, 조예는 없고…….”
운현이 아는 건 정원의 조경에도 법칙이 있고 추구하는 바가 있으며 매우 복잡하다는 것뿐이다.
“그래도 꽃은 정말 예쁘게 피었는데요?”
이서연은 꽃나무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직접 다듬어서 그런 걸까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서연이 운현에게 말했다.
그 말에 당황하는 운현의 모습이 어쩐지 일아영에겐 더욱 기분 나빴다.
“먼저 가겠어요.”
“아, 아영 소저. 그러지 말고 같이…….”
“오라버니, 여기 좀 보세요.”
운현의 대답과 이서연의 목소리는 동시에 나왔다.
저벅, 저벅.
일아영은 운현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연회장으로 걸어갔고, 운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이서연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이곳요.”
운현은 이서연이 말하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뭇가지가 잘려 나간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라버님이 직접 다듬으신 곳인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 말고도 전부 다 운현이 한 것이다.
이서연은 잘려나간 부분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여기도요?”
“그렇소. 전부 다 내가 다듬은 곳이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연은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하나하나 잘려 나간 자국들을 찾아다니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반면 운현은 토라져 가 버린 일아영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연회장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이 꽃은 왜 이렇죠?”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이서연이 마른 꽃나무 하나를 가리키며 묻고 있었다.
화사하게 꽃이 핀 다른 나무들에 비해 죽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왜 이런 꽃나무를 그냥 놔두었냐고 추궁하는 것 같아서 운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변명을 했다.
“아, 그 나무는 원래 잘 자라던 것이었는데 내가 그만 잘못 칼을 대는 바람에 그리되었소.”
“잘못 칼을 대요?”
이서연의 반문에 운현이 궁색하게 대답했다.
“그게, 뭐랄까. 갑자기 반대로 한번 해 보면 어떨까 해서…….”
“반대로라니요?”
이서연은 사뭇 집요했다.
하지만 딱히 숨길 것도 없어서, 운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본래 가지를 치는 건 잘 자라라고 하는 것 아니겠소? 나도 그런 마음으로 다듬고 있었는데, 문득 잘못 자란 가지를 잘라내려는 마음으로 하면 어떨까 해서…….”
듣는 이서연의 표정은 이상했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고요?”
그녀의 표정은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물론 그냥 내 생각이 그랬다는 것뿐이고…….”
운현은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이서연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왜 저러지?’
생각하던 이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잘라 낸 가지들은 어떻게 했죠?”
그녀의 물음은 조금 난데없었다.
하지만 대답은 쉬웠다.
“어……, 벌써 다 불태웠소.”
가지를 친 지가 언젠데 그게 아직 남아 있을까?
진작에 아궁이에서 불타 버렸다.
“그렇군요.”
이서연이 살짝 한숨을 내쉰다. 운현이 궁금한 표정으로 이서연에게 묻는다.
“헌데 그건 왜 묻는 거요, 서연 누이?”
“아니에요.”
이서연은 허리를 펴고 운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 돌아갈까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일아영에 대해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
연회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이호암은 알려진 것과 다르게 매우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이었다.
그는 운현에게도 흥미를 가진 듯 개인적인 것들을 물어보았지만, 운현이 대답을 얼버무리자 곧 화제를 돌렸다.
그가 꺼낸 화제는 부인의 딸, 일아영에 관한 것이었다.
“따님은 훌륭한 재목이더군요.”
이호암의 칭찬에 부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부족한 딸을 좋게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허허허.”
윗사람의 칭찬이 듣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일아영의 뺨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듣자하니 따님께서 곧 성혼할 예정이라 하던데, 부군 되실 분이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건 상대를 축하하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일아영도, 부인도 살짝 표정이 굳었다.
부인이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는 동안 일아영이 고개를 들어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어.’
운현은 성심성의껏 자신들을 도와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보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비록 그가 크게 낙심하게 될 지라도 말이다.
일아영은 결심을 굳혔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때였다.
“악양의 이 공자님이시죠?”
말한 사람은 이서연이었다.
일아영이 놀란 표정으로 이서연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운현을 바라보며 방긋 웃는다.
“두 분의 사랑 이야기는 악양 전체에 파다하거든요. 안 그런가요, 오라버니?”
운현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이호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악양의 이 공자라면, 그 이가장 말이냐?”
“네, 아버지.”
이서연의 대답에 이호암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렇군요. 악양의 이가장은 제가 잘 압니다. 이 공자는 성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우니 틀림없이 좋은 배필이 될 것입니다.”
이호암은 쐐기를 박았다.
“좋은 사윗감을 얻으셨군요, 허허허.”
연회는 갑자기 일아영의 혼인을 축하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벌써 성혼 날짜라도 잡힌 듯한 분위기였다.
이서연도 일아영과 부인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지만 정작 당사자인 일아영은 어쩐지 얼굴색이 그리 밝지 않았다.
‘……적어도.’
최소한 자신이 직접 말해야 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결별의 뜻을 전한 셈이니, 일아영으로서는 차마 운현을 볼 낯이 없었다.
그때였다.
“아, 그리고 운 공자.”
이호암이 자연스럽게 운현에게 물었다.
“혹시 다른 계획이 없다면 내 일을 좀 도와주지 않겠소?”
갑작스러운 제의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호의였다.
사락.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 짧은 순간, 사람들의 마음에는 수많은 생각과 입장이 스쳐 지나갔지만 운현은 알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이호암의 눈빛이 빛났다. 이서연이나 이의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허나 저는 이곳을 떠나 항주의 무림맹으로 갈까 합니다.”
이호암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곧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운현에게 물었다.
“무림맹이라 하셨소?”
무림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갑자기 운현의 입에서 왜 무림맹이라는 말이 나오는가?
일아영도, 그녀의 어머니인 부인도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무림맹에 계신 분께서 제게 제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운현은 일아영을, 그리고 부인을 천천히 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두 분께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운 공자, 그렇지 않아요.”
부인이 다급히 말했지만 운현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분께서 제게 베푸신 호의는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허나 제가 이곳에 계속 머무른다면 자칫 다른 이들의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두렵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는 여자들만 있는 집에 남자가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의형제라지만 결국은 타인이니까.
하지만 부인과 일아영에게는 조금 달리 들렸다.
그들에게 운현의 말은 ‘의형의 약속을 믿고 왔으나 혼인을 거절당했으니 어찌 이곳에 더 머물 수 있겠느냐’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운현은 이의신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였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어르신의 의로운 성품은 제게 큰 경종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형님께 받은 것이 작지 않으니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듣는 이의신이나 이호암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전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건 일아영과 부인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저는 무림맹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운현의 말이 끝났지만 사람들은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부인도, 일아영도, 그리고 이서연은 물론 이호암도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의신의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운 공자의 뜻은 알겠소. 허나 다시 생각해 보실 수 없으시겠소? 아무래도 운 공자께서 이곳에 계시는 것이…….”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깊은 생각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제가 제 삶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책임을 진다는 말은 사뭇 무거운 느낌을 담고 있었다.
그 말에 이의신도 말을 잇지 못하는데 이호암이 문득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이호암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운 공자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 어찌 더 권할 수 있겠소? 다만 우리에게 배가 있으니 항주까지 가는 길은 사양 마시기를 바라오.”
“아, 저는…….”
운현이 거절의 뜻을 내비치려 하자 이호암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마저 거절하시면 나는 화를 내겠소.”
이호암이 뜻을 거두지 않을 것임을 운현은 알았다.
“어르신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호암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연회는 다시 계속되었다.
하지만 부쩍 말이 없어진 일아영과 부인 때문인지 연회의 분위기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
연회가 끝나고 이호암과 이서연 그리고 이의신은 마차를 타고 장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세 사람은 침묵을 지킬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연 것은 이의신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처리가 미숙했습니다.”
이호암과 이서연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이서연이 문득 이호암에게 말했다.
“투자를 퍼부은 진짜 목적이 날아가려 하고 있는데 가만 계실 건가요?”
이호암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가 목줄을 쥐고 있는데 누가 날아간단 말이냐?”
“그럼 무림맹으로 가지 못하게 하실 건가요?”
딸 이서연을 바라보며 이호암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릇 투자란 연애와 같아서 많은 인내와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이호암은 이서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는 깃털을 잡아 본 일이 있느냐?”
이서연은 이호암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깃털을 억지로 잡으려 하면 오히려 달아날 뿐이다. 때로 사람의 정(情)은 쇠로 된 사슬보다 더 강한 법이니, 그가 이곳을 떠난다 해도 우리 손을 벗어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