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생명의 은인
악양루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운현과 일아영 사이는 일종의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일아영은 여전히 운현에게 냉랭했지만 그저 그것뿐, 전처럼 괜한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운현 역시 묵묵히 안뜰을 손질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형수님과 일아영을 돕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른 척하고 슬쩍 드려 볼까?”
운현은 묵직한 주머니를 들어 보며 중얼거렸다.
주머니에 든 것은 운현이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모은 돈의 딱 절반이었다.
물론 운현에게는 꽤 큰 돈이지만 일아영의 혼사를 치르기엔 어림도 없는 돈이다.
그러나 이것이라도 주지 않으면 도저히 양심의 가책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걸 주면 아영 소저는 내 얼굴도 안 보려 하겠지만 어차피 나야 떠날 몸이고.”
어떻게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형님 댁에 머물고 있지만 여기서 살 것도 아니다.
슬쩍 놓고 가면 설마 뒤따라 와서 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야. 아영 소저 성격에 어쩌면 노발대발하며 집어 던질지도 몰라. 아예 손도 안 댈지도 모르고. 떳떳하게 건네줄 방법이 없을까?”
운현은 고민했다.
그러나 무슨 핑계로 이 돈주머니를 건네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밥값이라고 할까? 아니야. 그럼 안뜰 같은 곳에 묻어 놓고 나서…….”
우스꽝스러운 고민이라는 건 운현도 안다.
그러나 때로 동정은 상대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법인지라, 돕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응?”
한숨만 쉬고 있던 운현이 문득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누가 들어오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달칵.
그러나 역시 밖에는 아무도 없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상하네?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문에 구멍이 뚫린 것도 아닌데 누가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운현은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리 오너라!”
대문 쪽에서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현은 문을 닫으려다 말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리 오너라!”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다.
‘누구지?’
운현은 호기심에 방을 나섰다.
며칠간 이 집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손님은커녕 드나드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니 대체 누가 이 집에 찾아왔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 오너라!”
혹여 방문자가 포기할까 싶어 운현은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셨나요?”
부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부인의 앞에 서 있는 중년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그렇습니다.”
중년인은 품 속에서 조심스럽게 서찰 한 장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부인께 내밀었다.
“제 주인어른께서 이 서찰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바스락.
부인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가 건네주는 서찰을 받아 들었다.
부인이 서찰을 꺼내 읽어 내려가는 동안 옆에 선 일아영의 얼굴에도 궁금한 표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함부로 서찰을 곁눈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사이, 운현은 서찰을 가지고 온 중년인을 살펴보고 있었다.
‘심부름꾼치고는 대단히 예의 바른 사람이로군.’
중년인은 이 집에 들어온 후로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랫사람의 품행이 저러하니, 주인어른이라 칭하는 사람 역시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스락.
서찰을 다 읽었지만 부인은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영아.”
부인이 딸 일아영에게 서찰을 건네고, 일아영이 서찰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부인은 중년인에게 말했다.
“선부(先夫)께 구명의 은혜를 입은 분이라니……,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서찰을 가지고 온 중년인은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단지 서찰을 전하라는 명을 받았을 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주인어른께서는 부디 초청에 응해 주시기를 각별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때, 서찰을 다 읽은 일아영이 물었다.
“여기, 이 이의신이라 하는 분은 어디 계시죠?”
“주인어른께서는 지금 장사에 있는 호암상단의 본가에 머물고 계십니다.”
호암상단을 이끌고 있는 이호암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하물며 장사와 그리 멀지 않은 이곳 악양에서랴.
그 이름의 영향력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일아영이 놀란 얼굴로 반문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호암상단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이호암 어르신의 친척이 되십니다.”
친척이라지만 본가에 머무를 정도라면 매우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인과 일아영이 서로를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데, 서찰을 가지고 온 중년인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인어른께서는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미 마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중년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부인은 주저했다.
악양에서 장사가 가깝다지만 마차로 반나절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게다가 이호암의 친척이라니? 갑작스럽기도 했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일아영은 무엇을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어요.”
대답을 들은 중년인은 미소를 지으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던 중년인은 문득 운현을 돌아보고는 정중한 어조로 부인에게 묻는다.
“대단히 실례입니다만 이분께서는…….”
일아영이 입을 벌리며 뭐라 하려 했지만 그보다는 부인의 대답이 빨랐다.
“선부의 의제가 되시는 분입니다.”
일아영이 살짝 눈을 찌푸렸지만 중년인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운현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인사가 늦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부디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진작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중년인은 간곡한 목소리로 권했다.
갑작스레 초대받은 운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건너편에서 날아온 일아영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사뭇 따끔거렸다.
***
얼마 후, 두 대의 커다란 마차가 오래된 저택을 출발했다.
서찰을 전한 중년인은 감히 함께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부인과 일아영, 그리고 운현에게 마차를 통째로 내어 주었다.
덕분에 세 사람은 중년인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 공자.”
부인이 운현에게 말했다.
“공자께서 함께 계시니 마음이 든든하군요.”
“아닙니다. 저야 그저…….”
운현은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부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낯선 사람의 초청에 여자 둘만 가는 건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다.
그러니 운현이 함께 있는 것이, 비록 힘쓰는 건 못 할 것 같아 보일지라도 부인에겐 적잖이 의지가 되는 것이다.
다만 일아영의 눈치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운현은 슬쩍 일아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일아영은 고개를 돌릴 뿐 별말은 없었다.
따가닥, 따가닥,
창밖으로 빠르게 경치가 지났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는 별다른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북해빙궁의 마차 같군.’
물론 호화스러운 장식이나 크기를 보면 비교할 바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호암상단의 위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지는 안 물어봤었지?’
운현이 일충현의 의형제라 하자 그 사내는 극구 운현에게 동행을 간청했다.
하지만 일충현과 관계된 또 다른 사람이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손님이라곤 나 혼자뿐이긴 했지만.’
어쩌면 괜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요즘 이상하게 예민해졌다는 생각을 하며 운현은 지나는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부인도, 일아영도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따가닥, 따가닥.
귓전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는 빠른 속도로 유서 깊은 대도시, 장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크고 화려한 장사의 번화가를 뒤로 한 채 마차는 그대로 호암상단의 본가로 들어섰다.
호암상단의 본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물론 크기야 대단하고 오래된 느낌도 역력했지만 운현에겐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들어 왔던 호암상단의 이름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 듯한 느낌이었다.
‘상단의 본가는 원래 이런가?’
운현이 생각하는 동안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달칵.
마차 앞에는 머리가 허연 노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노인은 마차 안에 있는 부인과 일아영, 운현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일행을 안내해 온 중년인이 노인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명하신 대로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주인어른.”
“수고했네.”
그 말에 중년인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고는 옆으로 물러섰다.
운현은 일아영과 부인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다가 새삼 노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주인어른? 그러면 저 사람이 이의신인가?’
사박.
마차에서 내린 부인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노인에게 예를 표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아!”
털썩.
인사를 하려던 부인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노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이 이의신, 은공의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여태껏 갚을 길이 없더니…….”
말하는 노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 은공의 가족을 뵙게 되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쿵.
노인, 이의신은 서슴없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말했다.
“어, 어르신. 이러시면…….”
늘 침착하던 그녀였지만 나이 많은 노인이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까지 흘리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인의 만류에도 이의신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은공이 아니 계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의신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머리가 허연 이의신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몸을 떨며 부인에게 말했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갚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하늘이 돕지 아니하였습니다. 은공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야 비로소 이렇게 은공의 가문을 찾게 되었으니…….”
이의신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격정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뭉클하게 할 정도였다.
“이 큰 죄를 어찌 용서받을 수 있으리까!”
쿵, 쿵.
이의신은 연신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이미 눈물을 글썽이던 부인은 사색이 되었다.
“어르신,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부인은 물론 일아영과 운현, 그리고 중년인까지 만류했지만 이의신은 고개를 조아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만에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한 이의신은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의신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던 부인은 깜짝 놀랐다.
넓은 연회장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온갖 산해진미도 놀라웠지만, 이 집의 주인인 이호암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풍채가 좋은 이호암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함께 들어오던 운현과 일아영도 깜짝 놀랐다.
일아영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이호암의 모습에 놀란 것이지만 운현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호암의 뒤에, 상선에서 보았던 아가씨 이서연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