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97화 (97/530)
  • 097화. 이서연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로군요.”

    달빛 아래 부서지는 동정호의 물결을 보며 이서연은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녀가 배에서 입고 있던 남궁세가의 복장은 간데없고, 화려하게 장식된 부드러운 비단옷이 그녀의 미모를 더욱 빛내주고 있었다.

    “역시 동정호는 이렇게 고즈넉하게 바라보는 것이 좋아요.”

    이서연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지금 이곳에는 그녀와 그녀를 수행한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위해 악양루 주변에 있던 이들을 급히 몰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잡음도 있었지만 감히 이호암의 영애에게 맞서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군요.”

    이서연은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절경을 그저 잠깐 동안밖에는 볼 수가 없다니 말이에요.”

    그녀는 동정호에 풍광에 취해 있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이곳도 지나는 길에 잠깐 시간을 내어 들렀을 뿐이다.

    물론 그 잠깐을 위해 다른 사람들은 쫓겨나듯 내몰려야 했지만 말이다.

    사박.

    이서연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악양루를 나섰다.

    평소라면 바로 마차를 탔겠지만, 잠시 걷고 싶어 하는 이서연의 뜻에 따라 몇몇 수행원이 그녀와 함께 밤길을 걸어 내려왔다.

    그 길 역시 그녀만을 위해 완전히 비운 후였다.

    사박, 사박.

    그렇게 얼마나 걸어 내려왔을까?

    “웃!”

    이서연을 호위하던 무사 한 명이 갑작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경계하라!”

    무사의 외침에 다른 호위들이 즉시 반응했다.

    스릉, 스르릉.

    타닥, 탁.

    호위 무사들은 삽시간에 이서연을 지키듯 둘러쌌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경계하는 무사들의 모습에도 이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그 물음은 처음 외쳤던 무사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무사는 길 옆, 숲 속을 노려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 손잡이에 얹혀진 그의 손과 꽉 다문 입술은 그가 지금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후욱.

    한순간 숲 속에서 전해진 기세에 이서연의 표정이 변했다.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서연은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남궁세가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벅.

    이서연은 본능적으로 어두운 숲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위험합니다.”

    무사가 경고했다.

    그러나 이서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요?”

    이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의 상대가 우리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었으면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그 판단대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맹수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다행이라 여기고 물러갈 일이다.

    자신들에게 이빨을 들이대지 않았다고 해서 굳이 그쪽으로 다가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훗.”

    하지만 그런 상식적인 판단은 이서연에겐 통하지 않았다.

    위험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기 마련이다.

    “따라오지 마세요.”

    이서연은 무사를 향해 말했다. 존칭을 썼지만 그건 분명 명령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여차할 때에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이서연이 붉은 입술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이 있어도 당해 낼 수 없는 상대잖아요?”

    무사는 이를 악물었다.

    사박.

    이서연은 아랑곳없이 홀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어두운 숲 속이었지만 이서연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라고 어찌 두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저 너머에 도사리고 있을 무시무시한 존재를 향한 기대는 그녀의 눈동자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붉은 입술에 걸린 미소가 어둠 속에서 더욱 짙어지고 있음은, 그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다.

    ***

    후우웅.

    운현의 목검이 달빛 가득한 밤하늘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 검로를 따라 마치 환영처럼 낯선 기운이 허공에 자취를 남겼다.

    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운현의 목검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홀로 춤추고 있었다.

    사락.

    백호수련검 제십이식이 끝났다.

    그러나 운현의 검은 몇 번째일지 모를 제일식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후웅.

    이미 하늘도 없고 땅도 없었다.

    슬픔도 한탄도 존재하지 않았다.

    있는 것은 다만 한 자루 목검이 그려 내는 검로뿐.

    운현은 그 검로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잊었다.

    아니, 이젠 자신과 검로의 구분조차 의미가 없었다.

    우우웅.

    낮은 울림과 함께 목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가고 운현은 그 검로와 함께 밤하늘을 갈랐다.

    마치 영원히 계속되는 검무처럼 운현의 검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직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아아.’

    이서연은 전율에 몸을 떨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그녀의 예상을 여지없이 박살 내고 있었다.

    우우웅.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런 검술은 검왕가라 일컬어지는 남궁세가에서조차 보지 못했다.

    호암상단의 영애에게 남궁세가의 진면목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에서조차 말이다.

    후웅.

    어두운 하늘 아래 목검이 춤을 추었다.

    그의 검 끝이 하늘을 향하면 하늘이 그 모습을 감추었다.

    땅으로 내려앉으면 땅이 그 앞에서 물러섰다.

    그곳에 감히 이서연이 설 자리는 없었다.

    간신히 모습을 알아볼 정도로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서연은 그곳에서 포효하는 맹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가히 세상을 씹어 삼킬 이빨과 발톱을 가진 전설의 신수(神獸)였다.

    사락.

    이서연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저 그뿐인 움직임이었지만 이서연으로서는 목숨을 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온몸을 내달리는 전율 탓에 자신의 몸조차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칫 저 신수의 기분을, 슬픔에 포효하는 맹수의 신경을 건드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옥죄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곳은 그리고 이 광경은 결코 자신에게 허락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락.

    이서연은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호흡마저 멈춘 지 한참이 되었지만, 이서연은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락, 사락.

    얼마나 멀어졌을까?

    신수의 이빨과 발톱이 더 이상 그녀의 가녀린 목에 닿아 있지 않음을 느꼈을 때, 비로소 이서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그것은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보다는 압도적인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목숨을 아까워 해 본 적이 없는 그녀조차도 자신의 의지를 무시하고 몰려드는 전율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풀썩.

    다리가 풀린 이서연은 옆에 있는 나무를 짚고 힘없이 몸을 기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탈진한 것처럼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붉은 입술은 신음처럼 낮은 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드디어…….”

    이서연의 눈가에 희열이 번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서연은 중얼거렸다.

    “드디어……, 발견했어.”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새파란 빛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호암상단의 본가는 대도시 장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문턱조차 넘기 힘들다는 호암상단의 본가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은 바로 상단주, 이호암의 집무실이었다.

    누구라도 이곳에 들어오려면 목숨을 절반은 내놓아야 한다.

    그 목숨이 진짜 목숨이건 아니면 그의 재산과 미래이건 간에 말이다.

    그러나 그 이호암의 집무실을 언제든 마음대로 드나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호암의 영애, 이서연이었다.

    “아버지.”

    이서연은 이호암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붉은색으로 쓰여진 문서를 들고 있던 노년의 이호암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너는 내 딸이라는 특권을 너무 남용하는 것 같구나. 나는 지금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있는 중이란다.”

    그러나 이서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박.

    이호암에게 다가선 그녀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도 그것이 저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죠?”

    당돌한 딸의 말에 노년의 이호암은 웃음을 지었다.

    바스락.

    이호암은 들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우며 대답했다.

    “너무 확신하지는 말거라. 어쨌든 지금은 네 말이 맞았다.”

    이호암의 눈동자는 노년의 나이를 의심케 할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그가 늦은 나이에 이서연이라는 딸을 얻은 것조차 주위에선 당연하게 여길 정도였다.

    달칵.

    이서연은 이호암의 맞은편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이호암은 그런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이서연은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보물을 발견했어요.”

    이호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축하한다. 얼마짜리더냐?”

    이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제가 어려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이서연은 방긋 웃음을 지었다.

    “여불위가 거둔 것 정도는 될 거 같아요.”

    “흐음.”

    이호암은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여불위는 과거 전국 시대에 황금과 백금을 투자하여 진나라 황제를 결실로 거두어 내었다는 전설적인 상인이다.

    즉, 지금 딸 이서연은 천하를 가져다 줄 만한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확실하냐?”

    “확실해요.”

    이서연은 주저없이 단언했다.

    “제 눈조차 속일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조금 문제가 있어요.”

    이서연은 말했다.

    “그게 남의 밭에 묻혀 있다는 것이죠.”

    “남의 밭에 묻힌 보물이라…….”

    이호암은 중얼거렸다.

    딸의 말을 믿느냐는 것은 제쳐 놓더라도, 문제의 해결은 매우 간단했다.

    “밭을, 아니 그 밭이 있는 마을까지 전부 사들여라. 아무도 그 밭에 손을 댈 수 없도록.”

    이호암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투자란 그렇게 하는 법이니까.”

    그의 말에 이서연도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이호암이 해결책을 말해 주었다는 의미는 그렇게 해도 좋다는 허락이기도 했다.

    이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달칵.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이호암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을뿐이겠느냐? 필요하다면 한 성이라도 사들여야지.”

    호암상단은 천하 삼대상단에는 들지 못하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꼽힌다.

    그 평가는 이호암 개인에게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딸 이서연의 말처럼 정말로 천하를 쥘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기꺼이 내줄 수 있었다.

    “네 말대로 과연 그것이 호암상단에 천하를 가져다준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호암은 상인이다.

    가치가 없는 것에 투자할 생각은 한 치도 없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딸, 이서연이라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아는 이서연은, 조금 전 사실상 자신의 전부를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스락.

    이호암은 다시 붉은색 글씨의 서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투자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니까.

    그것이 화려한 성공이든, 혹은 비참한 몰락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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