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현실
운현은 늦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일찍 나온 셈이었다.
일아영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나서야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왜 이리 늦었소? 나는 아영 소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운현은 제 딴엔 걱정한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나 일아영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늦다뇨? 다른 아가씨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거예요.”
‘설마.’
운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젊은 아가씨라 유난히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보니…….’
일아영은 제법 예뻤다.
그렇지 않아도 한창때의 아가씨가 꾸미고 나서니 확실히 눈길을 끈다.
게다가 시간을 들여 단장을 했다는 건 운현과 외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닌가?
운현은 사뭇 기분이 좋아졌다.
일아영은 노총관을 향해 말했다.
“다녀올게요. 어머니께 전해 주세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노총관은 정중하게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수행하는 종들이 있었겠지만, 가세가 기운 지금은 그저 이렇게 배웅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자박.
일아영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운현도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운현은 기분이 좋았다.
비록 아무것도 없는 길이었지만 일아영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웠다.
비록 일아영은 절대 같이 걷고 싶지 않은 듯 언제나 조금 앞서 있었지만, 여동생이 생긴 것 같은 운현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아영 소저, 힘들지 않소?”
오래된 저택을 나와 길을 걸은 지도 제법 되었다.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여서 운현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지만 일아영은 담담하게 답했다.
“괜찮아요.”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아영이 운현을 쳐다보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 따라오는 운현에게 일아영은 내심 측은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일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확실히 못을 박아야 해.’
따져보면 딱히 운현의 잘못이랄 것도 없다.
죄 없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도 일아영의 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확실히 보여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운현에게는 조금 잔인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보아하니 길이 제법 먼 것 같은데…….”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오던 운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괜찮지만 아영 소저는 애써 단장한 것이 흐트러지지 않겠소?”
“그래서요?”
일아영은 짐짓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 길을 땀 흘리며 걷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것도 예쁘게 단장한 젊은 아가씨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운현은 굳어 가는 일아영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일아영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마차를 타는 게 낫지 않겠소?”
탁.
일아영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운현을 향해 돌아서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말했다.
“물론 황궁에서 지내시던 학사님께서야 당연히 그러시겠죠. 하지만 말이죠.”
일아영은 한마디, 한마디 내뱉듯 말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그럴 돈이 있다면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답니다. 아시겠어요?”
일아영은 다시 고개를 홱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운현은 그 자리에 그저 못 박힌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뿔싸.’
운현은 아차 싶었다.
마차를 타고 가자는 말에 나쁜 의도가 있었을 리 없다.
그러나 때로는 그 당연한 말조차 상처가 되는 상대가 있다.
‘바보같이 그런 생각조차 못 하고…….’
돈이 없어 겪는 서러움을 어찌 운현이 모르랴?
그런 자신이 젊은 아가씨의 상처를 건드린 셈이 되었다.
일아영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허어…….’
운현은 일아영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그리고 의형, 일충현의 남은 가족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도록 저며 왔다.
‘어찌하여 형님의 가족이 이런 어려움을 받아야 하는가?’
의기롭고 충직하던 일충현은 무고하게 목숨을 잃고, 그 가족은 이토록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옛 선현의 물은 바, ‘하늘의 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른 것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뭐해요?”
하늘을 바라보는 운현에게 문득 뾰족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안 올 거예요?”
“지, 지금 가오. 아영 소저.”
운현은 황급히 발길을 재촉했다.
허둥대며 가까이 오는 운현의 눈동자가 살짝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한 일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남자가 그거 한 소리 들었다고 운거야? 세상에나, 참…….’
그건 남자들에 대한 편견이었지만 일아영은 상관하지 않았다.
세상에 별 한심한 남자가 다 있다고 생각하며 일아영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거의 말도 못 붙이고 일아영의 뒤만 따라온 운현이 도착한 곳은 바로 악양루였다.
날아갈 듯 화려한 지붕을 가진 악양루는, 배 위에서 만난 이서연의 말처럼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가 장담했던 것처럼, 드넓은 동정호는 운현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아 버렸다.
“오오.”
운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호수와 점점이 흩어져 있는 각양각색의 섬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과연 하늘과 땅이 호수 위에 떠 있다고 할 만하구나.’
운현은 눈을 떼지 못했다.
광대한 동정호의 풍광에 답답했던 가슴마저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운현이 동정호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일아영은 주위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일아영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 공자님.”
나타난 사람은 제법 훤칠하게 차려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일아영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청년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걸린다.
“아영 누이.”
동정호에 정신이 팔려 있던 운현도 일아영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아영 소저에게 다정하게 누이라 부르는 것 또한 똑똑히 들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이분은.”
일아영은 단호한 표정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저와 혼인할 이 공자님이세요.”
일아영의 눈동자는 사뭇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운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 아영 소저…….”
당혹할 수밖에 없으리라.
함께 나가자더니 갑자기 혼인할 상대를 소개시켰으니 말이다.
일아영은 운현의 흔들리는 시선을 담담하게 맞받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 공자!”
운현이 감격한 표정으로 이 공자에게 말했다.
“아영 소저와 혼인할 분이라니,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예를 표하는 운현의 얼굴은 감격과 기쁨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오래된 친인이라도 만난 양 정겹기까지 했다.
그러자 당황한 사람은 바로 이 공자였다.
“아니, 저기……. 누구신지요?”
운현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아영 소저의 아버님과 의형제를 맺은 운현이라고 합니다.”
이 공자는 눈을 크게 떴다.
일아영의 아버지에 대해선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분의 의형제라면 이 공자 자신에겐 손윗사람이 되는 셈이다.
“아하, 그러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운 대인.”
이 공자는 정중하게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그 예에 운현 역시 기꺼이 답례했다.
여차하면 손이라도 맞잡을 기세였다.
이 공자는 일아영을 보며 짐짓 책망하듯 말했다.
“아영 누이, 이런 귀한 분을 모시려면 내게 미리 말을 했어야 하지 않소?”
“아닙니다. 저도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운현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놀랍군요. 아영 소저가 자신의 배필이 될 사람을 소개해 주리라곤……. 하하하.”
“하하, 말을 낮추십시오. 제가 오히려 거북합니다.”
운현은 정말로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아영이 자신의 배필을 소개한다는 것은 곧 운현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아영은 그런 운현의 반응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운현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지리라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이 자리를 떠나리라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반갑게 이 공자와 인사를 나누다니?
그렇지 않아도 뻔뻔스럽게 보이는 운현이 자신의 정인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일아영은 기분이 나빠졌다.
“이 공자님, 이제 우리는 그만 가요.”
그러나 이 공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아영 누이, 그게 무슨 소리요? 이렇게 귀한 분을 만났는데 어찌 술 한잔 대접하지 않고 그냥 보내 드릴 수가 있단 말이오?”
“허허, 이 공자. 아영 소저가 부끄러운가 봅니다.”
운현의 말에 일아영은 다시 핏대가 솟았다.
하지만 이 공자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말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운 대인. 아영 누이가 얌전해 보여도 얼마나 당찬데요? 제가 그 모습에 그만 홀딱 빠졌지 않습니까? 하하하!”
단번에 죽이 맞은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일아영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저벅, 저벅.
화가 난 일아영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겨 멀어져 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일아영은 속으로 생각을 곱씹었다.
‘어머니 말처럼 정말 모르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반지를 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쩌면…….’
겉보기에 어리숙해 보이지만 운현은 생각보다 고단수일지도 모른다.
일아영이 이 공자를 소개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따지자면 이 공자는 결국 일아영의 정인일 뿐이요, 운현 자신은 부친으로부터 혼인을 약속받은 사람이니 말이다.
‘대체 뭐지?’
일아영은 복잡한 심정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운현과 이 공자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그저 웃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운현은 악양루 바로 근처에서 이 공자와 술자리를 함께했다.
이 공자의 입장에서는 일아영이 직접 운현을 소개했으니 숨길 것도 없었고, 오히려 평소 말하지 못했던 속내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제법 길게 이어진 허심탄회한 술자리를 마친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악양루를 내려오고 있었다.
“허어.”
한 손에 목검을 들고 터덜터덜 걷는 운현의 걸음은 아까와 달리 힘이 없었다.
“아영 소저에게, 아니 형님 댁에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운현은 방금 전 술자리에서 이 공자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아영 누이는 자존심이 강합니다. 사실 저희 집안이 좀 여유가 있는지라 도와주려 했지만, 아영 누이가 한사코 반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억지로라도 도우려 한다면 평생 저를 안 볼지도 모릅니다.
이 공자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아영 누이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아영 누이는 혼인 후에도 친정어머님을 돌봐야 한다고 말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제게 미안한 일인데 어찌 도움까지 받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제게도 어머님이 되시니 괜찮다고 했지만, 가문의 혼인이라는 것이 또 그런 게 아닌가 봅니다.
침통한 표정의 이 공자에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본 일아영의 성품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일충현 교두 또한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니, 그 성품을 물려받았을 그녀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아영 누이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지금 아영 누이의 집안은 그녀가 지탱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일아영은 어려운 집안을 어떻게든 꾸려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나마 소출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소작농들을 위한 배려를 잊지 않아서 주변 농민들에겐 칭송을 받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영 누이는 제게 과분한 사람입니다. 누이가 제 청혼을 받아 주었을 때는 정말로 기뻤지요. 하지만 그녀의 집안에 혼사를 치를 만한 여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신부에게는 지참금이 필요했다.
때로는 지참금에 따라 신부가 평가되기도 했으니, 양가의 위신을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몰락한 가문의 형편은 비참했다.
일아영의 집안에는 지참금을 마련할 여력 같은 건 없었다.
―아영 누이는 기다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자신의 혼인보다 더 급한 일들이 많고,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혼인 준비를 마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연이어 마신 술에 취한 때문일까? 이 공자의 눈가는 기어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저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것도 못 해 주고 있는, 정말로 못난 녀석입니다.
듣고 있던 운현은 깊은 탄식을 흘렸다.
술 취한 이 공자를 위로해 주고 일어서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운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재물과 지위가 없으면 소중한 사람들마저 지킬 수 없는 것인가? 이토록 그들을 슬프게 해야만 하는가?”
운현은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러나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고 먹먹하기만 했다.
“허어.”
다시 한번 운현은 한탄했다.
악양루를 내려오던 운현은 어느 순간 충동적으로 길을 벗어났다.
저벅.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숲이지만 운현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무엇인가 안에서 터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운현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둠에 잠긴 숲이 그런 운현을 조용히 감싸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