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가지치기
생각보다 일이 컸다.
하지만 운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일을 하겠다고 나선 주제에 일감을 보고 겁을 먹어서야 될 일인가?’
스스로 그렇게 이르며 운현은 가장 가까운 꽃나무로 다가섰다.
“어디 보자. 이게 이렇게 하는 건가?”
운현은 밖으로 뻗어 나온 가지 하나를 잡고는 밑 부분에 작은 칼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강하게 힘을 주었다.
“엇차.”
서걱.
“엥?”
가지는 생각보다 쉽게 잘려 나갔다.
그런데 모양이 애매하게 되었다. 남은 부분이 너무 긴 것이다.
“어디, 이번엔…….”
운현은 바짝 칼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다시 힘을 주었다.
슥.
“어이쿠.”
이번에는 칼날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꽃나무가 아예 반으로 잘라질 지경이다.
“이, 이런…….”
운현은 칼을 빼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는데?”
이러다간 가지를 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꽃나무를 다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으음.”
운현은 작은 칼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것도 역시 검이다. 흐트러진 마음으로 아무렇게나 휘둘러서는 안 돼.”
스륵.
운현은 호흡을 고르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그러나 확실하게 칼을 쥐었다.
마치 한 손으로 검을 든 것처럼.
운현은 진중한 눈동자로 눈앞에 있는 꽃나무를 응시했다.
그렇게 조용히 가지를 응시하던 그의 손이 한순간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스윽.
가지가 무성했지만 칼의 움직임은 마치 허공에 휘두른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쉭.
칼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원을 그리며 또 한 번 꽃나무를 지나쳐 갔다.
자박.
운현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꽃나무 가지들 몇 개가 후두둑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됐군.”
잘려 나간 부분은 방금 전과 달리 대단히 깔끔했다.
의도대로 된 셈이지만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너무 느린데? 가지치기 하나 하면서 매번 이렇게 자세를 잡을 수도 없고.”
운현이 방법을 다시 궁리하려던 때였다.
‘응?’
운현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누군가 있는 것 같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누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언뜻 받았다.
그러나 운현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누가 보고 있는 것같은…….”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은 야트막한 담장과 그 너머에 멀리 있는 언덕뿐이다.
운현은 혹시나 싶어 언덕을 유심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역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경이 예민해졌나…….”
운현은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칼을 들어 꽃나무를 향했다.
“결국 하나하나 직접 하는 수밖에 없군.”
무성한 꽃나무들을 보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검에 여러 가지를 쳐 내는 건 사뭇 멋있어 보이지만 실효성은 없다.
결국 여느 일꾼들이 그러하듯 꽃나무에 달라붙어 하나하나 직접 잘라 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가지 하나마다 상황과 형편을 생각해 가며 말이다.
“마차바퀴를 깎는 일에도 도(道)가 있고, 소를 잡는 칼에도 도(道)가 있거늘 어찌 가지치기라 하여 허술히 볼 수 있겠는가?”
운현은 얼른 해치우려던 자신의 허술한 인식을 반성했다.
그리고 진지한 마음으로, 조급함 없이 본격적으로 가지치기에 임했다.
사각.
꽃나무의 가지 하나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앞으로 해야 할 수많은 가지치기 중 단 한 번에 불과했지만 이것이 시작이며 또한 전부다.
사각, 사각, 사각.
무성하게 자란 꽃나무 사이로 속삭이듯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혹은 지나는 세월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일아영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 안채에서 나왔다.
그리고 노총관으로부터 운현이 오전 내내 안뜰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뭐?’
일아영은 깜짝 놀랐다.
‘벌써 해가 중천인데 아침 내내 일을 했다고? 그것도 그 엉망진창인 안뜰에서?’
안뜰의 상황은 일아영도 잘 안다.
숙련된 일꾼들도 혀를 내두르는 그곳에 오전 내내 있었다니, 일아영은 걱정보다 화부터 났다.
“어서 가서 그만하라고 전해요!”
일아영은 노총관에게 급히 말했다.
총관이 허겁지겁 안뜰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일아영은 속이 상했다.
‘미련한 사람 같으니. 해 보고 안 되면 얼른 포기해야지, 그걸 지금까지 하고 있었다고?’
입술을 깨물며 일아영은 어리숙해 보이는 운현을 떠올렸다.
‘혹시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지? 손에 물 한번 안 묻혀 본 사람 같던데…….’
홧김에 퉁명스럽게 대하긴 했지만 운현이 다치기를 바란 건 절대 아니다.
‘이게 다 자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된 것도 운현 때문이다.
대체 이 사람은 자신과 무슨 원한이 있어 이리도 속을 썩이나 생각해 보지만, 딱히 무슨 사연이 있을 리도 없다.
혹시라도 운현이 다쳤을까 봐, 일아영은 초조하게 총관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터벅, 터벅.
발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리자 운현이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심 걱정하던 일아영은 그 태평한 모습에 그만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점심시간이 되면 부르기 전에 와야지, 무얼 하느라 시간 가는 것도 몰라요?”
“하하하. 미안하오, 아영 소저.”
운현은 웃었다. 머리며 옷자락에 온통 나뭇잎과 가지 조각을 묻힌 채였다.
“꽃나무를 다듬다 보니 나름대로 재미있어서 말이오. 깜박 시간 가는 것도 잊었소. 하하하.”
그 모습에 일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데?’
오전 내내 가지치기를 한 사람치고는 얼굴이 너무 멀쩡하다.
힘든 기색도 없어 보이고 땀을 흘린 흔적도 없다.
‘가지치기는 안 하고 놀았나?’
일을 한 흔적은 머리며 옷에 역력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겉모습일 뿐, 사실은 시나 읊으며 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크흠, 그럼 안뜰을 다 다듬으려면 며칠이나 걸리겠어요?”
일아영은 은근히 비꼬는 듯한 투로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마 반나절만 더 하면 될 듯하오만…….”
일아영의 표정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하! 반나절?’
운현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일아영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엉망이 된 안뜰은 숙련된 젊은 일꾼을, 그것도 여러 명 쓴다 해도 며칠이 걸리는 일이다.
아무리 오전 내내 일을 했다 해도 앞으로 반나절이라니?
‘그럼 그렇지. 역시…….’
일도 안하고 놀았으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잘도 나오는 것이다.
마치 하루면 모든 시험공부를 끝낼 수 있을 것처럼 자신하는 서생처럼 말이다.
일아영의 표정에 어이없는 비웃음이 번져가던 그 때였다.
탁탁탁.
말을 전하러 갔던 총관이 황급히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그만 늦었습니다.”
일아영은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그보다 안뜰은 어떻게 되었지요? 잘 다듬어졌던가요?”
짐짓 점잖은 표정으로 일아영이 총관에게 물었다.
곧 운현이 무안당하는 모습을 볼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일아영의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그, 글쎄요? 제가 보기엔 거의 다…….”
“네?”
일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총관은 당황하여 다시 말했다.
“아, 물론 잘린 나뭇가지도 치우고 보기 좋게 하려면 며칠 더 필요하겠습니다만, 일단 가지치기는 거의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순간 총관과 운현이 짜고 자신을 놀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다.
그러나 운현은 그렇다 치고 총관이 그럴 리가 없다.
저벅.
일아영은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어디로 가십니까?”
총관이 물었지만 일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운현을 놓아둔 채 일아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직접 안뜰에 가 볼 참이었다.
저벅, 저벅.
그리고 잠시 후, 일아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 이게 어떻게…….”
안뜰은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그나마 간신히 보이던 뜰 바닥이 잘려진 가지로 가득했다.
하지만 무성하게 우거져 있던 꽃나무들은 확실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잘린 가지들을 전부 치우고 정원을 다듬자면 며칠 더 걸리겠지만, 예전과 비교해 보면 거의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슥.
일아영은 허리를 숙여 잘려진 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잘려진 단면이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그사이에…….’
일아영은 혼란스러웠다.
안뜰 가득한 꽃나무는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있었다.
비록 아름다움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어도 보기 싫게 자라던 가지들은 전부 쳐 냈다.
도저히 글만 읽던, 어수룩해 보이는 문사가 한 일이라곤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설마 황궁에서 학사가 아니라 정원사를 했나?”
일아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가지는 많이 쳤지만 그저 그 뿐, 아름답게 다듬어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일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었다.
바닥에 마구 흐트러져 있는 나뭇가지들을 발로 툭 차 보았지만, 잘려진 가지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
점심 식사가 끝나고 나서 운현은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아니, 걷어붙이기만 했다.
“뭘 하려는 거예요?”
일아영의 말에 운현이 눈을 껌뻑이며 대답했다.
“뭐라니……. 아직 가지치기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소, 아영 소저?”
운현은 처음 해 보는 가지치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마치 백호 수련검을 수련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곧 가지치기나 검술 수련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몸의 움직임은 완전히 다르지만 검의 움직임은 본질적으로 유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현의 흥미를 자극한 것은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자를 때 느끼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결과도 사뭇 흥미로웠지.’
운현은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을 하느냐에 따라 잘려진 나뭇가지들이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 차이를 더 알아보고 싶었기에 운현은 정말로 남은 가지치기를 마저 하고 싶었다.
“됐어요.”
일아영은 운현에게 쌀쌀맞게 말했다.
“그 일은 놔두고 잠깐 저와 같이 나가도록 해요.”
“아영 소저와 말이오?”
운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일아영이 같이 외출하자는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아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잠시 준비를 하고 올 테니 기다리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일아영은 휭하니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뒤에 남은 운현은 헤벌쭉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이쿠,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운현은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고는 황급히 사랑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봇짐 안에 옷이 한 벌 더 있는 것을 운현은 기억하고 있었다.
꽃다운 아가씨와 외출하면서 일하던 복장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요즘 세상이 참 험하던데…….”
장강 뱃길에선 수적까지 만났었다.
일아영과 외출했다가가 혹여 못된 무리라도 만나면 자신이 나서야만 했다.
운현은 만약을 대비해서 천으로 말아 두었던 목검을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옷도 갈아입고, 목검도 가져가려면 빨리 서둘러야겠군.”
어느새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운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아가씨를 기다리게 해서야 안 될 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