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반지
콰당.
자기 방으로 돌아온 일아영은 세차게 방문을 닫았다.
그래도 아직 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뭐야!”
그녀는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눈앞에 떠오르는 운현의 뻔뻔한 얼굴은 그때마다 일아영의 속을 왈칵 뒤집어놓았다.
“에잇!”
털썩.
일아영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상에 누워 버렸다.
자신을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마음 한편이 아려 오는 것은 자신의 말이 심했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아는 까닭이리라.
“쳇.”
일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사실 가장 힘든 사람은 어머니일 터이다.
그리고 일아영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번 양보한다 해도…….’
순간적으로 떠오른 운현의 모습에 일아영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서며 진저리를 쳤다.
“말도 안 돼! 절대!”
일아영은 방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바로 그 운현이라는 작자 때문이다.
그 사람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민은 있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운현에 대한 원망을 불태우던 일아영은 문득 그가 꺼냈던 반지를 떠올렸다.
‘그 반지…….’
일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방 한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옷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륵.
일아영은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작은 목함 하나를 꺼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조잡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어린아이에게나 어울릴 법한 함이었다.
일아영은 그 함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탁.
탁자 앞에 앉은 일아영은 한참 동안 그 함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가득하던 분노도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그녀의 표정에는 은은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그러다 무엇인가 결심한 듯 그녀는 조심스럽게 함을 열었다.
달칵.
함 안에는 아이들이 갖고 놀 만한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었다.
색이 변한 머리 장식이며 작은 노리개,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구슬들도 보였다.
일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함 안에 손을 넣어 붉은 비단으로 싼 것을 꺼냈다.
사락.
붉은 비단이 벗겨지자 작은 반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운현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반지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섬세한 조각이며 문양, 그리고 크기와 색깔까지 그대로였다.
“아빠, 엄마가 처음 이 반지를 제게 주셨을 때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일아영은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빠가 내 신랑감을 데리고 올 거라고, 어린 마음에 하루하루 두근대며 기다렸어요. 하지만, 하지만…….”
툭.
작은 눈물방울이 반지 위에 떨어졌다. 일아영의 고운 뺨 위에 눈물이 방울져 구르고 있었다.
“애써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간신히 아빠 없이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투두둑.
“이제 와 이러시면 저는 어쩌라는 거예요? 네? 아빠…….”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일아영의 목소리는 점차 울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아영은 어머니와 함께 운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지만 운현을 부르러 간 노총관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아영아, 어쩔 생각이니?”
문득 어머니가 물었다.
일아영은 어머니의 시선을 피한 채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쩌기는요. 전 반대예요.”
의외로 차분한 반응에 부인은 다시 딸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보니 그가 반지에 대해 아는 것 같지는 않더구나. 그러니 혹시 무슨 들은 말이 있는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일아영은 고개를 홱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하지 마세요. 아니, 그가 먼저 말하더라도 모르는 일이라고 해야 해요. 왜 굳이 말을 해서 문제를 만들어야 하죠?”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일아영의 표정은 단호했다.
“이미 모든 건 끝났어요. 그가 나타났다고 해서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요.”
“하지만 그가 이해해 줄지도 모르잖니. 그도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됐어요.”
일아영은 짧은 말로 어머니의 말을 막았다.
“어머니는 가만히 계세요.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괜히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건 싫어요.”
부인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 딸이 고민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사실 그녀 자신과 남편의 책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해 주지 못한 것을 딸이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데 어느 부모가 강하게 말할 수 있으랴?
부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노총관의 음성과 함께 운현이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운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인사했지만 일아영은 냉랭하게 맞받아쳤다.
“정말 늦었네요. 시간을 전해 듣지 못하셨나 보죠? 문사시라면서 이렇게 늦게 일어나도 되는 건가요?”
“아영아.”
듣고 있던 부인이 말렸지만 운현은 머쓱해져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긴 뱃길에 쌓인 피로 때문이었는지 운현은 지난밤 눕자마자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사실 이럴 때 검을 수련하면 오히려 몸이 가뿐해지는데, 어젯밤엔 손님으로 온 처지라 차마 수련을 할 수 없었다.
그 탓일까? 드물게도 운현은 늦잠을 자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실례를 범한 것은 운현 자신이니 할 말이 없었다.
“이리 앉으시지요.”
부인의 권유에 따라 운현은 식탁에 앉았다.
주인이 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최고의 예우다.
그것은 이미 운현이 그들에게 남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가끔씩 흘러나오는 부인의 한숨과 일아영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조금 부담이 되긴 했어도, 운현은 오랜만에 맛보는 단란한 식사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식사가 끝나고 부인은 안채로 돌아갔다.
하지만 운현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운현만 보면 심사가 뒤틀리는 일아영이 한마디를 쏘았다.
“왜 그러시죠? 그렇게 기웃거려 봤자 얻어먹을 것도 없을 텐데.”
그러나 운현은 오히려 반색을 했다.
곤란한 참에 말을 걸어 준 일아영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아, 조카. 실은…….”
“마음대로 조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는 당신 같은 숙부를 둔 적이 없어요.”
일아영의 반응은 냉랭했다.
사실 운현 자신도 조카라는 호칭이 어색했지만 나름 용기를 낸 것인데, 상대가 이리 반응하자 단번에 머쓱해졌다.
‘하긴, 나라도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에게 조카라는 소리를 듣기는 싫겠지.’
실제로야 운현이 나이가 많지만 겉보기엔 비슷하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어린사람 취급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도 당연하리라.
더구나 섬세한 아가씨라면 더더욱 말이다.
“미안하오, 아영 누이.”
그러나 시도는 좋았어도 결과는 매우 나빴다.
일아영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빽 질렀다.
“누구 마음대로 누이예욧!”
“아, 미, 미안하오.”
일아영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운현은 일단 사과부터 했다.
‘조카도 안 되고 누이도 안 되고.’
젊은 아가씨의 기분이란 정말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운현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그러면 무어라고 불러야…….”
일아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흥! 좋은 사람이라고? 좋기는 뭐가…….’
어머니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말을 떠올리며 일아영은 진저리를 쳤다.
이렇게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을 보면 반지에 대해 아는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자신의 처지가 있으니 대놓고 말은 못하고 이렇게 접근하려는 것이리라.
“그냥 소저라고 부르세요.”
마지못한 어조로 일아영이 말했다.
소저는 존중의 의미를 담은 제법 격식 있는 호칭이다. 시대에 따라서는 의미가 바뀌기도 했지만 말이다.
“가능하면 날 부를 일이 아예 없었으면 좋겠군요.”
“아, 알았소. 아영 소저.”
운현의 말에 일아영은 다시 표정을 구겼다.
자신이 소저라고 부르라 했지만 정작 듣고 보니 심하게 귀에 거슬리는 까닭이다.
‘……며칠만 참으면 돼.’
일아영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이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괜히 풀이 죽어 있던 운현은 일아영이 용건을 묻자 다시 반색이 되었다.
“실은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 해서 말이오…….”
운현은 말꼬리를 흐렸다.
이 저택엔 노총관 외에는 다른 사람도 없고, 식구라고 해 봤자 부인과 일아영 단둘뿐이다.
아무래도 일손이 필요할테니 뭔가 도울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래요?”
평소의 일아영이라면 운현의 그런 말이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자신과 어머니께 잘 보여서 어떻게든 눌러앉으려는 속셈으로만 보이는지라, 운현의 제의가 곧이곧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정히 그러시다면…….”
일아영은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야트막한 담 넘어 보이는 무성한 수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지라도 좀 쳐 주시는 게 어때요? 아, 고귀한 학사님께는 너무 거친 일이 될까요?”
그것들은 본래 이 저택의 안뜰에 자라던 작은 꽃나무들이었다.
본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뜰이었지만 제대로 돌보지 못하다 보니 이제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흐음.’
운현은 야트막한 담 너머로 보이는 꽃나무들을 바라보았다.
해 보진 않았지만 가지를 치는 정도라면 그리 큰 힘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무들이 높은 것도 아니다.
‘제일 큰 것이 내 키 정도이니…….’
나무를 오를 필요도 없으니 그리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해 볼 만하겠군.’
사실 그건 오판이었지만 가지치기를 해 본 적이 없는 운현은 알지 못했다.
“알았소, 아영 소저. 내가 한번 해 보리다.”
절대 빠트리지 않는 ‘소저’에 일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대로 하세요.”
속으로 비웃음을 한번 날려 주고 일아영은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운현은 혼자 싱긋 웃었다.
‘허어, 저런 모습도 귀여워 보이기만 하니…….’
일아영이 매몰차게 대하는 걸 운현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운현은 그런 모습조차 좋게 보였다.
매사에 쌀쌀맞고 애교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지만, 그런 일아영의 모습조차 운현에겐 정으로만 느껴지는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일아영의 단호한 그 눈동자는 의형 일충현을 빼닮았으니 말이다.
“이것이 여동생을 둔 오빠의 기분인가?”
세상의 오빠들이 들었다면 전혀 공감하지 않을 말을 중얼거리며 운현은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일아영이 톡톡 쏴 대도 기분이 나빠지질 않고, 그저 모든 것이 좋게만 보이는 걸 어쩌란 말인가?
“자, 그러면 이제 형님 댁 정원을 손질해 볼까?”
가지치기는 처음이다. 아니, 사실 이런 일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이 낡은 집에 운현은 애착이 갔다.
어쩐지 일충현 형님의 흔적조차 느껴지는 것 같아서,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더더욱 만감이 교차했다.
저벅, 저벅.
운현은 느긋한 마음으로 노총관을 찾아 나섰다.
안뜰을 정리하자면 먼저 그에게 묻는 것이 제일일 테니까.
***
“아이고, 안 됩니다.”
늙은 총관은 혀를 찼다.
“너무 힘드셔서 못 하실 겁니다. 저래 보여도 아주 큰일이니까요.”
“괜찮네.”
운현은 그렇게 말하며 작은 칼을 하나 받아 들고 안뜰로 향했다.
노총관이 꼭 가져가라며 장갑도 하나 챙겨 주었지만, 맨손으로 칼을 잡는 느낌이 좋아서 놓고 왔다.
그렇게 정원으로 들어온 운현은 상황이 예상보다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 이게 다……, 뜰인가?”
운현은 조금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담 너머로 볼 땐 몰랐는데 안쪽으로 들어와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못한 꽃나무들이 이리저리 가지를 뻗어, 명색이 안뜰인 주제에 사람이 제대로 다니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긴 이러니 아영 누이 아니, 아영 소저와 형수님께서 손도 못 대셨던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