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검성의 후계자
쿵.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태청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거, 검성의 후계자라 하셨소?”
“네, 그렇습니다.”
소궁주는 당연한 듯 대답했다. 그러나 태청에게는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보, 본문의 제자 중에 검성의 후계자가 있단 말이오?”
태청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궁주는 오히려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검성의 후계자께서 무당의 제자가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태청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검성의 후계라는 말조차 처음 듣는 판국에 무엇을 알아야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할 것이 아닌가?
‘검성이 제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태청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검성 이검학은 제자를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검성은 검에 미친 자다.
‘본래 검성은 사문이나 강호 무림의 관습에 초연하니…….’
초연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만일 검성이 스스로 인정할 만한 자질을 가진 자를 만났다면 강호 무림의 관습 따윈 아랑곳없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태청이 복잡한 가능성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소궁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신승께서 말씀해 주신 검성의 후계자가 무당파가 아니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요.”
“시, 신승?”
이번에는 태청의 얼굴이 아예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소궁주에게 달려들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맹의 신승께서 검성의 후계자에 대해 말씀해 주셨단 말이오?”
소궁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나 그분이 어느 문파의 누구신지는 알지 못하던 터라, 당연히 검의 태산북두인 무당의 분이라 여겨 찾아온 것인데…….”
아쉽다는 듯 소궁주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하얀 손을 뻗어 옥합을 닫았다.
달칵.
작은 소리를 내며 옥합이 닫혔다.
청아한 한기가 사라지고 빛나던 보석의 광채도 옥합 안으로 숨었다.
소궁주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미소가 사라진 소궁주의 표정은 더없이 냉랭했다.
자신을 헛걸음하게 한 것이 마치 태청의 탓인 양, 은은한 비난의 눈빛마저 보인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빙설이 다시 옥합을 챙겨 들었다.
소궁주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잠깐만 기다려보시오.”
태청은 급히 말했다.
소궁주의 차가운 시선이 날아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본문의 제자 중 혹 검성의 후계자로 선택된 자가 있을지 모르오. 그저 내게 아직 전해지지 않은 것뿐인지도 모르지 않소?”
태청은 급히 생각했다.
얼마 전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도사 진영은 무림맹에 검성이 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진영이 검성에게 인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태청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내 장문인께 문의해 볼 터이니 소궁주께서는 잠시 기다리셨다가…….”
그러나 돌아온 것은 소궁주의 차가운 반응이었다.
“저런, 설마 도사님께는 그런 중대한 일조차 알려지지 않는단 말인가요?”
태청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궁주의 지적이 그의 아픈 곳을 찔렀기 때문이다.
무당의 비밀스럽고 중요한 일은 절대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아직 장문인이 아니고 계파도 장문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해빙궁의 소궁주 앞에서 그걸 시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장문인만 아는 비밀스러운 일이 타인에게 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일인데도 말이다.
“그, 그렇지 않소. 무당에서 내가 모르는 것은 없…….”
“그러면 제가 기다릴 필요는 없겠군요.”
소궁주의 말은 단호했다.
“무당이 아니라 하시니 저는 화산으로 가 보겠습니다.”
사박.
소궁주는 우아한 걸음으로 미련 없이 도관을 떠났다.
마치 그림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태청은 참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화산, 화산이라고…….”
검의 하늘이라면 누구나 무당과 화산을 꼽는다.
유사한 도가 문파이자 검의 길에 우뚝 선 두 거산(巨山), 그들이 바로 무당과 화산이다.
그러나 검성이 화산의 절기를 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무당의 자존심은 구겨졌다.
비록 정식으로 입문하지는 않았다 해도 검성이 화산과 인연이 있다는 것은 무당으로서는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그런데 검성의 후계자마저 화산에서 나온다면 무당으로서는 또 한 번 자존심을 크게 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탁.
태청은 급히 몸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장문인을 만나야만 했다.
이것은 무당과 화산만의 일이 아니다.
무림맹의 신승이 검성의 후계자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어쩌면 강호 무림 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파바박.
태청은 도관을 나와 급히 경신술을 펼쳤다.
잔뜩 구겨진 태청 도사의 얼굴에서 그가 늘 강조하던 평정은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운현이 탄 커다란 상선은 거침없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가끔씩 정체불명의 조각배가 주변을 배회하기도 했으나, 무심파의 일전이 소문난 탓인지 상선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여정을 계속했다.
그렇게 무한과 적벽을 지나, 운현이 탄 상선은 어느새 동정호의 초입이자 호남성의 첫 도시인 악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곧 동정호군요.”
운현의 말에 장경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동정호가 처음이라고 했지? 아마 꽤나 볼만할 걸세.”
사뭇 기대하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보다는 어서 배에서 내리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장강을 오르는 여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 유명한 적벽조차 평범한 절벽에 불과했으니, 운현이 기대보다 한숨을 내쉰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하하하, 아닐세. 자네가 봤다는 서호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지. 동정호는…….”
“동정호는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갑자기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이서연이었다.
“자그마한 서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죠.”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연스럽게 운현과 장경규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마 놀랄걸요? 악양루에서 바라보는 동정호의 풍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니까요.”
말하는 이서연의 표정은 자부심이 넘쳤다.
호암상단의 본가가 동정호에 있다 했으니 그녀가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물론 정말 호암상단의 본가에 속한 사람인지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특히 악양루는 수많은 시인들이 노래할 정도로 아름다움과 충정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말을 잇던 이서연은 갑자기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당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죠?”
운현이 동정호에서 내린다 했으니 아마도 동향 사람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녀의 얼굴이 가깝다고 생각한 운현이 슬그머니 상체를 뒤로 뺐다.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형님의 본가가 있어 잠시…….”
“그래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서연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드시 악양루에 올라가 보세요. 그곳에는 시인 두보의…….”
그렇게 말하던 이서연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광경이 그려졌다.
그것은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의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투박한 목검 한 자루를 차고 짐짓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생 운현의 모습이었다.
“풋.”
이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흘렸다.
운현은 대번에 뒤로 물러서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왜 이러십니까?”
“아, 미안해요.”
이서연은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여하튼 악양루는 실망스럽지 않을 거예요. 나도 자주 가는 곳이니까요.”
아직도 이서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어깨가 또 한 번 들썩하는 것은 아마도 참지 못한 웃음이 다시 터져 나오는 것이리라.
“뭡니까? 저 아가씨는…….”
운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장경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상단 사람인데다 무공까지 배웠으니 여느 아가씨들보다야 활달하겠지만…….”
하지만 저 정도라면 활달하다는 정도를 넘는다.
장경규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네를 좀 띄엄띄엄 보는 것 같은데?”
“네?”
운현의 반문에 장경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띄엄띄엄, 대강대강 본다고. 그러니까 만만하게 본다는 뜻이지. 내가 보기엔 아마…….”
‘갖고 노는 것 같다’는 말은 꿀꺽 삼켰다.
아무리 착해 보이는 운현이라도 젊은 아가씨가 놀리는 것을 알면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운현은 벌써 반쯤 체념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 그런가요.”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웃는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처음 만났을 때도 운현에게 용기가 가상하다며 웃지 않았던가?
물론 진심이긴 하겠지만 운현으로선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봤자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악양에는 언제 도착할까요?”
운현이 묻자 장경규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선원들 말로는 오늘 저녁쯤 될 거라더군. 자네도 슬슬 짐을 챙겨 놓는 게 좋겠네.”
짐을 챙기라지만 봇짐 하나를 들어 올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 보이지 않는 동정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악양루라…….”
이서연의 말이 아니더라도 악양루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두 뺨에 느끼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형님 댁을 찾아뵌 후에 한번 들러 볼까?”
배는 거침없이 동정호로 향했다.
운현의 지루한 뱃길도 비로소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배는 저녁 무렵 악양에 도착했다.
운현은 앞으로도 뱃길이 많이 남은 장경규를 걱정해 주었지만, 오히려 장경규는 그에게 낙심하지 말라며 위로해 주었다.
같이 배를 내린 이서연은 운현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화려한 마차에 올라타고 떠났다.
그리고 운현은 악양 근교에 있다는 의형 일충현의 집을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악양을 벗어나 한참을 걸은 운현이 오래된 저택을 발견한 것은 어스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저 집이 형님 댁인가?”
그리 크지 않은 고택을 바라보며 운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일충현이 운현에게 가지는 의미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처음에는 그저 학사와 교두로서 만났지만, 그는 충직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켰고 한 번도 운현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죽는 순간까지 충의를 지키며 운현에게 신의를 다했다.
자금성을 나온 지금도, 아니 많은 사람들을 보아 온 지금이야말로 일충현이 얼마나 강직한 무인이며 소중한 존재였는지 운현은 더더욱 실감하고 있었다.
그 일충현의 집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새삼 저며 오는 가슴 탓일까?
운현은 옷깃 아래 감춘 반지를 매만졌다.
“가자.”
운현은 발에 힘을 주었다.
저 멀리 보이는 낯선 고택의 정문이 왠지 자신을 반기는 듯 정겹게만 느껴졌다.
***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운현은 총관으로 보이는 노인의 안내로 방 안에 들어섰다.
“곧 마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머리가 허연 노인은 운현을 자리에 안내하고는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나갔다.
운현은 탁자 앞에 앉아서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언뜻 보니 손님을 맞이하는 방인 듯한데 생각보다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