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어쩌면 창룡검주의 제자
모용미는 눈을 빛냈다.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었지만 혹시 오라버니의 상처를 건드릴까 싶어 조심하고 있던 참이다.
모용단천은 천천히 말했다.
마치 손녀에게 깜짝 놀랄 선물을 주는 할아버지처럼.
“그분의 제자께서 오셨다.”
그건 과분할 정도로 극존칭의 표현이었다.
모용미 역시 그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가주 모용단천이 그런 존경을 표할 대상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모용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바로 그 창룡검주의 제자께서 모용세가에 오셨다. 제자라는 것은 우리의 추측에 불과하다만…….”
“나도 봤어.”
모용미의 품에 안겨 있던 모용상아가 재잘거리듯 말했다.
“내가 그 오빠를 제일 처음 봤거든. 하지만 말도 없이 그냥 가 버렸어. 아마 내가 화를 내서 그럴지도 몰라.”
듣고 있던 오라버니 모용진이 상아에게 한마디 했다.
“상아야, 운 대인이라고 해야지.”
모용상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용미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그냥 가셨다니?”
모용단천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은 채 모용미에게 말했다.
“내가 그분을 뵙고도 미처 알아보지 못하여 그만 떠나게 하고 말았구나.”
“아닙니다. 운 대인은 스스로를 숨기시니 알아보시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저도 처음 뵈었을 때는 평범한 서생으로 알았으니까요.”
듣고 있던 모용미가 문득 물었다.
“운 대인이라는 분이 창룡검주의 제자신가요?”
모용단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다.”
‘아마도?’
의아해하는 모용미에게 모용단천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가 서찰에 있던 검식을 진이에게 알려 줄 수 있었겠느냐?”
그리고 모용단천은 그간 있었던 일을 모용미에게 일러 주었다.
창룡검주의 제자로 추정되는 이가 모용세가를 방문하여 모용진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
모용단천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소홀히 대한 것을 자책하며 크게 후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대제자 모용진이 모용단천에게 위로하듯 말했다.
“운 대인은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세속의 명예나 부귀에 초연한 분이니 어찌 그런 오해를 마음에 두겠습니까?”
하지만 모용단천의 어두운 표정은 쉬 풀릴 줄을 몰랐다.
가만히 듣고 있던 모용미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이 이름을 밝히셨나요?”
“그래. 그분은…….”
모용진이 막 대답하려는 사이 모용상아가 먼저 끼어들었다.
“운현이야, 운현. 그래서 상아는 운 오빠라고 불렀어.”
‘운현.’
모용미는 혼란스러웠다.
운 대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누군가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름만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분이 세가를 떠난 것이 언제지요?”
모용단천의 눈이 빛났다.
세가에 온 날이 아니라 떠난 날을 묻는다는 건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네가 무림맹으로 출발한 지 보름 정도 되었다.”
모용미는 속으로 차분히 날을 계산해 보았다.
운 대인이 세가를 떠난 날과 북해빙궁 일행이 항주에 모습을 드러낸 날짜, 그리고 이곳부터 항주까지의 거리를 차분히 따져보았다.
“짚이는 것이 있느냐?”
모용단천이 물었다. 모용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운 대인이라는 분이, 어쩌면 용봉지회에 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대제자 모용진이 놀라는 것과 동시에 묵직한 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쿵.
모용단천의 손 아래서 탁자가 둔중한 소리를 냈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용봉지회에?”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네. 그는 용봉지회에서도 자신을 학사라 하였습니다. 하여 알아본 사람은 없었습니다만…….”
모용미는 새삼 운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초탈한 듯한 그의 모습은 어쩌면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기는 그런 기세였을까?
“그럼 그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냐?”
모용단천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모용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용봉지회가 끝난 후 그분은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모용미가 모용단천에게 말했다.
“남해검문에 사람을 보내야겠습니다.”
“남해검문?”
의아한 눈빛의 모용단천에게 모용미는 말을 이었다.
“아마도 남해검문의 파진한이 그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제일 먼저 알아봐야 할 곳은 북해빙궁이다.
하지만 북해빙궁은 새외다.
지금 모용세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남해검문의 파진한을 찾는 것이다.
소란이 일어났던 그 연회에서, 파진한은 운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 말했기 때문이다.
“알았다.”
모용단천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가 남해검문에 어떤 식으로 연락을 취할지 생각하는 동안, 모용미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창룡검주는, 자신의 세력을 일으킬 생각일까요?”
모용단천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대답 대신 모용미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모용미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창룡검주의 제자로 추정되는 운현이 모용세가를 방문한 의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북해빙궁의 일행으로 용봉지회를 찾은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가 과연 아무런 의도 없이 무림맹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용미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모용진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제자 모용진은 확신을 가지고 말을 이었다.
“그분이 세력을 일으키고 강호 무림을 도모할 뜻이 있었다면, 어찌 스스로를 숨기고 저를 돕겠으며,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대로 떠나겠습니까?”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강호 무림의 일은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앞날을 위한 포석일 수도 있어요.”
모용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스스로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세가의 외당 당주로서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이었다.
“그는 자신을 천외비처 창룡검주라 하였습니다. 이 천외비처라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쩌면 그저 수식어일 뿐인지도 모른다.
허나 명호 앞에 붙는 단어는 대부분 문파, 혹은 소속이다.
“어쩌면…….”
잠시 주저하던 모용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모용세가는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선택이 무엇인지 모용미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용단천도, 모용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림맹’과 ‘창룡검주’ 사이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임을.
지금은 무림맹의 세상이다.
강호의 은원은 천금보다 무겁다고 하지만, 과연 세가의 운명이 걸린 일에서 신의를 앞세우는 것이 무조건 옳은 일일까?
“하지만…….”
모용진이 무언가 반론하려는 듯 말을 꺼내는데 모용단천이 손을 내밀어 그의 말을 막았다.
“네 말뜻은 잘 알겠다.”
가주 모용단천은 모용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복숭아나무는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기며, 큰 사람 밑에는 반드시 따르는 이들이 모이는 법이다. 그가 옳은 뜻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사람들이 그와 함께할 터.”
말하는 모용단천의 눈빛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물론 우리가 얼마나 큰 힘을 기르느냐에 따라…….”
모용단천은 주먹을 쥐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더욱 많아지겠지.”
대제자 모용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미 역시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힘이 있어야 선택도 할 수 있는 거야.’
강호 무림에서 그것은 누구도 부인 못 할 진실이다.
모용미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문득 운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순진하고 어리숙하기까지 보이던 그의 모습과, 지금 나누는 이야기 속의 그가 너무나 달라 보여서일까?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
“이렇듯 친절히 맞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붉은 입술 사이로 옥구슬 구르는 듯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순간 시선을 빼앗겼던 무당파의 도사, 태청은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크흠. 오히려 무당을 찾아 주신 북해빙궁의 소궁주께 감사드리오. 이곳은 본래 청정도량인지라 부디 대접이 박하다 탓하지 마시길 바라겠소.”
으리으리한 도관 아래 앉아 있는 도사 태청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말로는 청정도량이라 하지만 지금 태청이 입고 있는 의복만 해도 금실과 은실로 자수가 놓인 것이다.
“천만에요. 이처럼 무당에 발을 디디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깊이 감사하고 있답니다.”
그것은 비아냥인지 혹은 감사인지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도사 태청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북해빙궁의 소궁주라 하나 새외의 이방인에 불과하다.
오히려 차기 장문인 후보로 거론되는 자신이 맞이한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태청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허허,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그저 고마울 뿐이지요.”
태청은 의례적으로 도호를 외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헌데 북해빙궁의 소궁주께서 이곳 무당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단도직입적인 그 물음은 긴 말이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북해빙궁과 무당이 무슨 우호가 있어 안부를 물을 것이며, 무슨 이해가 있어 서로의 눈치를 살필 것인가?
그러나 소궁주는 대답 대신 옆에 있는 빙설에게 살짝 고갯짓을 했다.
빙설은 들고 있던 작은 옥합을 조용히 소궁주의 앞에 내려놓았다.
달칵.
문양이 아로새겨진 옥합이 소궁주의 하얀 손 아래에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와 함께 반짝이는 광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호오.’
태청은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속으로 살짝 감탄을 내뱉었다.
형형색색의 보석들의 옥함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이 매우 진귀한 것임을 금은보화에 익숙한 태청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락.
소궁주의 하얀 손이 옥합을 어루만지자 비밀스러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 있던 것은 태청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아악.
청아한 향기가 도관 가득 퍼지고 은은한 한기가 주위를 감싸 안았다.
“오오.”
이번엔 태청조차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비밀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저 작은 수정 조각의 정체를, 태청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이건…….”
“네.”
소궁주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북해빙정입니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 태청을 바라보며 소궁주는 말을 이었다.
“북해에서도 백 년에 단 한 번만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태청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북해빙정은 음한 계열의 내공을 수련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또한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무당의 자소단에 버금가는 영약이 될 수도 있었다.
“크흠.”
태청은 도사답게 금방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이것을 빈도께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까지 반쯤 감으며 그가 말했다.
언뜻 초탈한 도인처럼 보이지만, 반쯤 뜬 눈동자가 옥합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음을 소궁주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후후.”
소궁주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 고혹적인 미소가 이슬처럼 맺혔다.
“그야 당연히 검성의 후계자께 북해가 예를 표하기 위함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