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모용미의 귀환
무심파의 습격 이후 상선은 순조롭게 장강을 거슬러 올랐다.
비록 다친 사람들과 수적들의 처리로 분주하긴 했지만, 한차례 정박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호암상단의 위세를 말해 주듯 다친 선원들 대신 새로운 선원들이 즉시 빈자리를 메웠고, 수적들은 포박되어 줄줄이 배에서 끌려 내려갔다.
“저 사람들은 어찌 될까요?”
운현은 뱃전에 서서 끌려가는 수적들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던 장경규가 대답했다.
“글쎄? 일단은 이곳 관아에 넘겨지지 않겠나? 아마도 중형을 면하기는 힘들 걸세.”
운현은 수적들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수적들 대부분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제대로 치료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불쌍하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운현의 말을 장경규가 받았다.
“그래도 죽어서 장강에 던져진 녀석들보다는 운이 좋은 거지.”
“운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에 운현과 장경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가 대단히 젊은 여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땅한 보응을 받은 것뿐이죠.”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은 그녀는 바로 이서연이었다.
거침없이 걸어와서 뱃전에 선 그녀는 수적들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목숨과 재산을 노렸으니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지요. 아마도 저들은 중형을 받게 될 거예요. 먼저 죽은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로 말이에요.”
그녀는 운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우린 구면이죠?”
“아, 안녕하십니까.”
운현은 그녀의 인사에 황급히 답했다.
옆에서 장경규가 어찌된 일이냐는 듯 운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운현은 장경규에게 말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를 구해 주신 분입니다.”
“아, 그때!”
장경규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녀가 수적 둘을 처리하고 자신들을 구해 준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장경규는 취해 있었던 데다 운현 뒤에 있어서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제 기억엔 아직 감사하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요?”
약간 토라진 듯한 이서연의 말에 운현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런!’
운현은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장경규도 얼결에 같이 인사를 했다.
이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운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호암상단의 이서연이에요. 방금 그건 농담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환한 그녀의 웃음과 목소리는 듣는 이들의 기분마저 유쾌하게 만들었다.
장경규가 멍하니 이서연을 쳐다보는데 운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호암상단이라고요?”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고 그들과 함께 있기에 남궁세가의 아가씨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호암상단 사람이라고 하니 사뭇 의외였던 것이다.
이서연은 운현의 반응에 살짝 웃었다.
“남궁세가에서 몇 년간 검을 배웠어요. 하지만 아직 남궁세가의 사람은 아니랍니다.”
“그러셨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지만 호암상단과 남궁세가가 긴밀한 관계라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경까지 가나요?”
“저는 동정호까지만 갑니다. 중경까지 가시는 분들은…….”
“그래요?”
이서연의 목소리가 운현의 말을 잘랐다.
“저도 동정호까지 가니 같이 내리게 되겠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볍게 손을 흔들고 그녀는 그대로 멀어졌다.
이서연이 자리를 뜨자 운현은 미처 인사도 못하고 그저 그녀의 뒤통수만 바라볼 뿐이었다.
“동정호라면 호암상단의 본가가 있는 곳인데.”
옆에서 장경규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설마 이호암의 친척인가?”
“이호암요?”
운현의 반문에 장경규는 눈살을 찌푸렸다.
“호암상단의 최고 어르신이신 이호암을 모른단 말인가? 천하 삼대상단에는 못 들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꼽히는 거상일세.”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천하 삼대상단도 모르는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호암상단을 알 리가 만무하다.
“자네 공부만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닌가? 도무지 아는 게 없군.”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상단 이름을 모른다고 그게 무슨 죄가 되랴?
“여하튼 임자가 있는 모양이니 자네가 눈독 들여 봤자 소용없게 됐네. 쯧쯧쯧.”
“임자라뇨?”
“아까 그 말 못 들었나? 아직은 남궁세가의 사람이 아니라 하지 않았나? 아직은 아니라니 결국 언젠가는 된다는 뜻이겠지.”
운현은 장경규의 말에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그런 뜻인 것 같기도 하다.
“차라리 잘된 일일세. 저런 여자는 대가 세거든. 더군다나 검을 익혔다니 부부싸움 한번 나면 최소한 중상이겠네그려.”
그건 짓궂은 농담이었다.
누가 봐도 호암상단의 영애와 낙방 서생이 잘될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운현은 그런 농담에 익숙하지 못했다.
“네? 아니, 이름밖에 모르는 사이에 무슨 부부싸움까지…….”
당황한 운현의 반응에 장경규가 더욱 흥을 냈다.
“어이쿠 맙소사. 이거 실연한 사람에게 내가 너무한 거 아닌지 모르겠구먼. 위로주라도 사야 하나?”
“실연이라니요?”
운현은 인상을 썼지만 장경규는 운현을 놀리는 것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그사이, 일을 마친 상선은 나루터를 떠나기 시작했다.
촤아아.
다시금 뱃전에 부서지는 장강의 물살을 바라보며 운현은 문득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상한 수식어로군. 천하 삼대상단에는 못 들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꼽힌다니…….’
그것은 듣기에 따라서 오히려 모욕으로 들릴 법도 했다.
천하 삼대상단과 호암상단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지금 운현의 처지에 그런 사람들 걱정까지 해 줄 필요는 없으리라.
멀어지는 부두를 보며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커다란 상선은 도도한 장강을 다시금 천천히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
“외당 당주께서 오셨습니다.”
나지막한 시비의 목소리에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은 반색을 했다.
“오, 그래? 어서 들라 해라.”
그렇지 않아도 항주에서 돌아왔다는 기별을 받은 터라 내심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잠시 후 조용히 문이 열리고 단아한 옷을 차려입은 한 명의 아가씨가 서재로 들어섰다.
사박.
그녀는 바로 용봉지회로 떠났던 모용미였다.
들어서던 모용미는 모용단천 옆에 대제자 모용진이 앉아 있음을 보았다.
모용진의 변화를 모르는 모용미에겐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먼저 가주에게 예를 표했다.
“명을 받들어 용봉지회에 다녀왔습니다.”
모용단천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수고했다. 먼 길에 고생이 많았구나.”
짧았지만 그건 모용단천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모용미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모용단천은 그녀에게 손짓해 자리에 앉게 했다.
사락.
단아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는 모용미를 모용단천은 사뭇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대제자 모용진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동생을 지켜보았다.
“그래, 무림맹은 어땠느냐?”
모용미가 자리에 앉자마자 모용단천이 물었다.
“특별한 소득은 없었습니다만 다른 문파들의 정황과 무림맹의 분위기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기록해 두었습니다.”
사락.
모용미는 얄팍한 서책을 내려놓았다.
모용단천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첫 시도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 큰일을 함께할 상대를 찾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 그건 그렇고…….”
모용단천은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네 눈에 들어올 만한 사람은 없더냐?”
모용단천의 말에 모용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답을 했다.
“남궁세가의 남궁비연이라는 아가씨가 사뭇 인상 깊었습니다만, 같은 세가의 남궁상혁은 행동이 가볍고 언사가 오만하여 뜻을 같이하기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런. 쯧쯧.”
갑작스레 혀를 차는 모용단천의 목소리에 모용미의 대답이 끊어졌다.
“누가 그런 말을 듣자더냐? 미아, 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느냔 말이야.”
모용단천이 ‘미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 대화가 지극히 사적인, 가족 간의 대화라는 뜻이다.
그제야 모용미는 모용단천의 뜻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하, 할아버지…….”
“하하, 누이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옆에 앉아 있던 모용진이 한마디를 거든다.
모용단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냐? 정말 네 눈에 드는 사람이 있더냐?”
이러다 문제가 어디까지 커질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모용미는 얼굴을 굳히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없었습니다.”
“에이, 쯧쯧.”
모용단천은 흥이 깨졌다는 듯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모용미는 한순간 떠오른 누군가의 모습 때문에 내심 당혹해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 사람 모습이…….’
각 문파와 후기지수들의 속내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용봉지회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초탈하고 수수한 분위기를 풍기던 한 문사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미아야, 네가 떠나 있는 동안 이곳에도 기쁜 소식이 하나 있었다.”
모용미는 모용단천을 바라보았다.
모용단천의 두 눈동자는 자부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진이가 돌아왔구나.”
모용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모용단천에게 인사를 올렸다.
“경하드립니다, 할아버지.”
“오냐.”
모용단천은 기쁜 마음으로 모용미의 축하를 받았다.
대제자 모용진이 돌아왔다는 말은 모용세가에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박.
모용미는 살짝 몸을 틀어 대제자 모용진을 향했다.
“축하해요, 오라버니.”
말하는 모용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인사를 받는 모용진 역시 눈가에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 탓에 얼마나 큰 걱정과 수고를 가족들에게 끼쳤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못나서 그동안 너와 할아버지께 참으로 많은 걱정을 끼쳤구나. 오라비로서 정말 미안하다.”
모용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모용진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이처럼 직접 들으니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모용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앞으로는 오라버니께서 외당을…….”
모용미는 대제자의 복귀가 당연히 그것을 의미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모용진도, 모용단천도 고개를 젓는다.
모용미는 의아한 표정으로 모용단천을 바라보았다.
“진이는 제자들의 수련을 맡기로 했다. 앞으로 얼마간은 자신의 검을 찾는 데 집중하고 싶다는구나.”
‘자신의 검?’
그것은 사뭇 이상한 말이었다.
모용미가 막 그걸 물어보려는 때였다.
“가주님.”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오, 상아가? 들라 해라.”
모용단천이 말하자 잠시 후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작은 소녀가 통통거리듯 뛰어 들어왔다.
“할아버지!”
“오냐, 허허허.”
모용상아는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모용단천에게 매달렸다.
모용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상아야. 할아버지께 또 버릇없이.”
그러나 모용상아는 모용미를 향해 입을 삐쭉 내밀어 보였다.
“핏. 언니는 나한텐 알리지도 않고 이리로 왔잖아. 언니 미워.”
어린 동생의 투정에 모용미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기는 네 선물을 들고 올 수 없잖니.”
“선물? 정말?”
모용상아는 언니의 말에 금방 반색을 했다.
모용미에게 폴짝 뛰어들며 모용상아가 웃었다.
“역시 언니밖에 없다니까. 헤헷.”
모용미는 어린 동생을 안아 들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가주 모용단천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미아야, 진이가 어떻게 다시 검을 들게 되었는지 들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