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배 위의 전투
촤아아.
사람들은 다가오는 배들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초조한 마음으로 상황을 살폈다.
장사치들 중에는 벌써 자기의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겨 드는 사람들도 있다.
운현도 한편에 내려놓았던 봇짐과 천으로 싼 목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때, 수적들의 배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멈추시오오오!”
그 외침에 상선의 선장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시오?”
선장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 부채주 장삼채는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무사히 사업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어느 상단의 소속이며 어디로 가는 중이오?”
‘씨펄, 꼭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하나?’
정해진 절차에 따라 고함을 치는 수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장삼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채주가 정한 것이다.
부채주인 장삼채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고, 더구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상대의 분위기를 살펴야 하니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른다.
“이 배는 호암상단의 배이며 지금 중경으로 가는 중이오.”
선장의 말에 처음 고함을 질렀던 수하가 장삼채를 바라본다.
드디어 통상 절차가 끝나고 자신이 나설 차례가 된 것이다.
장삼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 뱃머리에 나와 있는 선장에게 짐짓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암상단의 소속이셨군. 호암상단이라면 우리의 보호 아래 있는 배니 안심하셔도 좋소.”
즉, 얌전히 통행세를 바치면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장삼채는 이대로 분위기 좋게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늘 기대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흥! 보호라니, 누가 누굴 보호한단 말이냐?”
남궁세가의 무인 중 한 명이 말했다.
하지만 장삼채는 못 들은 척 선장에게 말을 건넸다.
“선장께서도 물길의 예법을 아실 터이오. 그러니 이제 통행세를 내고…….”
“호암상단은 이제부터 통행세를 내지 않는다!”
대답은 선장이 아니라 옆에 있던 무림인에게서 나왔다.
아까 빈정거리듯 말했던 젊은 놈이다.
장삼채는 눈살을 찌푸렸다.
선장은 어느새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젊은 무인이 뱃머리에 서서 장삼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호암상단의 배에서는 절대 통행세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장삼채는 속이 끓어 올랐다.
그러나 애써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린 소협께서 장강의 예법을 잘 모르시는가 본데…….”
“이놈! 수적 따위가 감히 누구에게 어리다 하느냐!”
장삼채는 기가 막혔다.
분명히 자기보다 어려 보이건만 상대는 자신을 어리다 했다고 난리다.
“썩 물러가지 않는다면 나, 남궁상민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손가락질까지 해 대는 상대의 말에 장삼채는 열이 올랐다.
“뭐, 이 자식아?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물로 보이냐?”
“이익! 감히 수적 따위가!”
챙.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남궁상민은 서슴없이 검을 뽑았다.
수적을 상대로 위세를 보이려 했는데 장삼채가 욕을 하자 수치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남궁상민이 검을 뽑는다고 겁을 집어먹을 장삼채가 아니다.
“오냐, 네가 검 뽑는다고 무서울 줄 아냐? 부채주 자리는 노름으로 딴 게 아니란 말이다!”
챙.
장삼채도 지지 않겠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이곳은 장강이며 그들에게 익숙한 영역이다.
게다가 뒤늦게 합류한 장삼채가 부채주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실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다.
실력으로 보자면 마땅히 다른 부채주들보다 낫다고 장삼채는 자신하고 있었다.
“부채주님. 이러시면…….”
옆에서 수하가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장삼채는 크게 외치고 있었다.
“똥개도 자기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다! 여기가 남궁세가가 아니라 장강이란 걸 알아야지. 가라! 저놈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자!”
“와아아아아!”
고함과 함께 수적들의 배가 상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적들의 습격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운현은 급히 다른 장사치들에게 말했다.
“어서 피하……. 이런.”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장사치들 역시 눈과 귀가 있으니 진작부터 피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시원한 강바람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벌써 꽤나 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운현은 얼른 나이 지긋한 장사치를 부축했다.
그러나 몸을 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사이 수적들은 상선에 줄을 걸고 무리 지어 건너오고 있었다.
“와아아아!”
“막아라!”
챙, 채챙.
선원들과 남궁세가 무인들이 맞섰지만 수적으로 열세다.
나중엔 어찌 될지 몰라도 일단은 피해야 했다.
와장창, 콰장.
“사, 살려 주시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건너온 수적들은 상인들을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운현과 함께 있던 상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케헤헤. 어딜 가시려고?”
“짐을 내놓으면 혹시 목숨만은 살려 주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무슨 말인지 알겠냐? 응? 낄낄낄낄.”
어느새 올라왔는지 수적 둘이 웃으며 말했다.
‘하필.’
운현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수적들의 모양새를 보니 곱게 보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장경규를 비롯한 장사치들은 술에 취한 상태라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한다.
‘두 사람이라…….’
둘이라지만 빙설과 마주했을 때를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상대도 아니다.
스륵.
운현은 장사치를 부축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던 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엥? 뭐야?”
운현이 무언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자 수적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운현이 꺼내 든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미친놈이야?”
수적들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자신들의 예리한 칼에 맞서 운현이 꺼내 든 것은 투박한 목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현의 눈동자는 진지하기 그지없다.
더없이 진지한, 그러나 조금은 어색한 말투로 운현은 수적들에게 말했다.
“자, 오너라.”
***
“크아악!”
칼날이 혈흔을 만들자 수적이 비명을 질렀다.
이서연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상대에게 치명타를 날리기 위해 다가섰다.
채앵.
갑자기 옆에서 들린 날카로운 소리에 이서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사매, 조심해야지.”
남궁가의 무복을 입은 청년이 이서연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녀를 향해 날아들던 수적의 검을 그가 쳐 낸 것이다.
“쓸데없는 참견이군요.”
이서연은 냉랭하게 반응했지만 청년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남궁가의 검을 배운 사람이 이 정도도 혼자 처리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나.”
말을 잇는 사이에도 청년의 검은 수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쉬익.
“크악!”
수적이 가슴에서 피를 내뿜으며 비명을 질렀다.
치명상이었다.
이서연은 아름다운 눈을 살짝 찌푸렸다.
“피가 튀잖아요.”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쓰레기를 치우려면 손이 더러워지는 걸 각오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우리 호암상단을 위해 손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이건가요?”
“뭐, 꼭 그런 뜻은 아니고……. 하아!”
쉬익, 채앵.
어느새 달려든 수적 하나를 맞아 청년이 검을 휘둘렀다.
수적의 칼은 제법 현란했지만 청년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이서연은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수적의 모습을 확신하며 고개를 돌렸다.
채앵, 챙.
“으아악!”
콰장창.
아직 싸움은 한창이었지만 승패는 점차 확실해지고 있었다.
비록 수적들의 수가 많다지만 잘 훈련된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맞아 싸울 정도는 아니다.
물론 배와 화물에는 어느 정도 피해가 있겠지만 무심파의 기를 꺾어 놓으려면 이 정도의 손실은 감수해야 한다.
‘흐음.’
이서연은 고운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남궁상민은 무심파의 부채주를 맞아 호각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우세를 점하고는 있지만 잘난 체 나선 것에 비하면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다.
‘실망이네.’
남궁상민이 나선 것은 이서연을 의식한 때문이다.
호남상단의 영애이자, 외문제자의 형식으로 남궁세가에서 검을 배운 이서연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서연 역시 그가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차라리 방금 말을 나눈 청년이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그때였다.
“풋.”
주위를 돌아보던 이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대단히 특이한, 사뭇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광경이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저건 또 뭐지?’
이서연이 웃음을 참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서생 차림의 청년이 수적 둘과 팽팽하게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투박한 목검 한 자루를 들고.
‘세상에…….’
이서연은 어이가 없었다.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지만 서생이 들고 있는 것은 목검이다.
그것도 살벌한 칼날을 빛내는 수적 둘을 상대로 말이다.
‘정말이지, 뭘 모르는 서생이나 할 짓이네.’
탓.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이서연은 발을 굴러 몸을 날렸다.
지금은 우습지만, 저 서생이 피를 뿌리고 죽어 넘어지는 모습은 결코 유쾌하지 않을 테니까.
***
“뭐? 오너라?”
수적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이 자식이 아주 우릴 우습게 보나 본데? 네가 뭔데 우리더러 오라 가라야?”
“그러게? 야! 우리가 개돼지로 보이냐? 몽둥이를 들고 나오게.”
운현과 대치한 수적들은 아예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상대가 천을 풀 때만 해도 긴장하고 있었지만, 나온 것이 투박한 목검이었던 탓이다.
“다치기 전에 그거 내려놓고 얌전히 꺼져라, 응?”
“그래. 그러다가 찔리면 아주……. 컥!”
갑작스러운 신음 소리와 수적 하나가 풀썩 무너졌다.
옆에 있던 수적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칼날이 날카로운 빛을 번득였다.
“아악!”
기세등등하던 수적 둘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에서 내려섰다.
사박.
그녀는 바로 이서연이었다.
운현 앞에 선 그녀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냈다.
핏.
피가 바닥에 붉은 선을 그렸다.
운현은 눈을 껌뻑이며 이서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까 남궁세가 무인들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던 바로 그 아가씨였다.
“푸흡.”
멍하니 목검을 들고 있는 운현의 모습에 이서연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운현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이서연은 웃는 얼굴로 운현에게 말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자신의 능력은 알고 있어야겠죠?”
운현은 당황했다.
감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고 해명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이서연은 벌써 발을 굴러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탁.
“아, 저기…….”
운현이 그제야 말을 꺼내 봤지만 이미 이서연은 뱃머리 쪽으로 몸을 날린 다음이었다.
“그게 아닌데…….”
운현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목검을 다시 천에 둘둘 말아 갈무리한 운현은 주저앉아 있는 장경규와 장사치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피하시죠. 싸움은 대강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만…….”
아닌 게 아니라 수적들의 수는 확연히 줄어 있었다.
기세등등하게 갑판에 올라왔던 수적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배로 퇴각하고 있었다.
부채주라며 나섰던 수적 역시 벌써 몸을 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으으으으…….”
갑판에는 쓰러진 수적들 외에도 부상당한 상선의 선원들이 상당수 있었다.
비릿하게 풍겨오는 피 냄새에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쯧.”
운현은 혀를 찼다.
붉은 피와 신음 소리가 가득했지만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림이며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바로 무림인이다.
자신이 이런 세상에 사는 모습을, 운현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란…….”
쓰러진 장경규를 부축하며 운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탐욕과 어리석음은 끝이 없고 불행한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운현은 멀어져 가는 수적들의 배를 바라보았다.
장강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과 함께 무심파의 습격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