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수적
은은한 힘이 실린 장사치의 말에 장경규도 그제야 주변의 분위기를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장경규는 목을 움츠리며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나이 지긋한 장사치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들 말게. 장강 물길이 위험해질 정도면 무림맹이 가만있겠나?”
“아하!”
어둡던 장사치들의 표정이 단번에 환해졌다.
“그렇군. 무림맹이…….”
“맞아. 그 정도면 무림맹이 가만있을 리 있나.”
장사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말했다.
과거 정사대전 당시 장강은 정파와 사파의 경계선이었다.
장강수로채 연합은 그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정파와 사파 양편에서 이득을 거두고 있었다.
그 후 무림맹이 설립되고 나자 장강수로채와 녹림은 가장 먼저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명분도 충분했을 뿐더러 원한도 많았고, 무림맹의 결속을 이끌어 내며 세를 과시하기에도 최적의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때 입은 괴멸적 타격으로 인해 장강수로채 연합과 녹림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니 무림맹이 존재하는 한 장강수로채들이 함부로 움직일 리가 없는 것이다.
“예끼, 이 사람. 괜히 놀랬잖은가.”
“그러게. 우릴 놀래킨 벌로 오늘 저녁은 자네가 사게.”
분위기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장사치들은 장경규를 향해 농담을 던지기도 하며 다시 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현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설마 무슨 말썽이 나는 건 아니겠지?’
자신이 모용세가에 서찰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절대 괴서찰 같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수채에는 쪽지 한 장 보낸 적 없는데, 이러다가 잘못하면 죄를 덮어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궁주의 말을 무림맹에 전했어야 했나?’
소궁주는 암천무제와 창룡검주, 그리고 상인이라 하는 자를 유념하라고 말했다.
그건 운현만이 아닌 무림맹을 향한 경고가 분명했지만 운현은 전하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데다, 당시엔 그럴 심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자칫 일이 크게 번질지 모른다는 염려가 들기 시작했다.
“자네도 한잔 들게.”
장사치의 목소리에 운현의 상념이 깨어졌다.
“쯧쯧, 안색이 안 좋구먼. 저놈 헛소리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어허, 헛소리라니.”
장경규가 항의했지만 힘은 실리지 못했다.
그렇게 술자리 분위기는 다시 무르익어 갔지만, 운현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번잡해졌다.
쏴아아아.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 위에는 항상 바람이 분다.
처음엔 귀가 멍멍하던 물소리도,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강한 바람도 며칠이 지나면 그저 그런 일상이 되어 버린다.
지금도 변함없이 부는 장강의 바람은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은 아름다운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아직도 보나?”
옆에서 문득 장경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데 장경규가 술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조심하게. 무림인은 무서운 사람들이니까. 아무리 어여쁜 아가씨라도 말이야.”
그건 어딘가 회한이 담긴 듯한 목소리였다.
술을 들이키는 장경규에게 운현이 말했다.
“무림 세가에 계셨다더니 꽤 고생하셨던 모양이군요.”
“뭐, 고생이랄 것까지야…….”
장경규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운현은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 모용세가 얘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
“응, 그랬지. 왜? 궁금한가?”
운현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딱히 숨길 일도 아니고.”
장경규는 다시 한잔을 더 들이켰다.
“사실은 내가 하남성 철가장에 모사로 있었네. 그 유명한 소림사하고 모용세가가 있는 하남성 말일세.”
운현이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이 모용세가에 서찰을 보내게 된 동기가 바로 철가장 장주와 모용세가 가주의 비무 때문 아니던가?
“향시에서 세 번이나 떨어지고 나서 나는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에 철가장 모사로 들어갔네. 그때는 철가장이 아주 작았지만 그래도 날 불러 줬거든.”
장경규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과장이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철무웅과 함께 철가장을 일으키고 한때는 하남성을 주름잡던 이야기도 했다.
모용세가 가주와의 비무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의기양양하게 받아들인 재비무에서 철가장이 패배하고, 하남성의 문파들을 모아 모용세가를 압박하려고 했던 것까지.
“그런데 말일세, 세상엔 진짜 무인이 있더군. 아무리 상황이 불리해도 절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그런 사람들 말일세.”
장경규는 감탄하듯 말했다.
“모용세가의 가주도 그런 사람이었지만 외당 당주 모용미는 정말로 대단했네. 여자라고 얕보던 사람들이 찍소리도 못 하더군. 흐흐흐.”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장경규는 웃음을 지었다.
운현도 용봉지회에서 보았던 모용미의 모습을 떠올렸다.
“후우, 세상일이란 게 참 이상도 하지.”
장경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 저게 진짜 무림인이구나’ 하는 걸 느꼈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절대 무림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네.”
모용미에게서 장경규는 대단히 강렬한 인상을 받은 듯했다.
“그 일 후에 나는 미련 없이 짐을 쌌네. 어차피 철가장도 망해가는 판국이었고……. 그리고 저 어른을 만나 장사꾼이 되었지.”
그가 슬쩍 눈짓하는 ‘어른’은 나이 지긋한 장사치였다.
“저분은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준다네. 안목도 뛰어나고. 나도 아직은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저런 상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네.”
운현이 보기에도 그 나이 지긋한 장사치는 사람들을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어 보였다.
“그렇게 되실 겁니다.”
그 말에 장경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맙네.”
술잔을 들이키는 장경규는 할 말을 다했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운현이 알고 싶은 건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저기 그런데…….”
“응?”
“아까 모용세가가 무슨 서찰을 받았다는 얘기를 하신 것 같은데…….”
“아, 그거?”
장경규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대답한다.
“하남성 문파들 사이에선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지. 모용세가가 서찰을 보낸 사람을 찾는다는 것도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고.”
운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모용세가가 서찰을 보낸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뭐, 신경 쓸 필요 없네. 강호 무림에 그런 소문이 한둘인가?”
그러나 운현으로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잘못하면…….’
강호 무림을 어지럽히는 괴서찰의 범인으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자네도 너무 낙심 말고.”
어두운 운현의 표정에 장경규가 나름 위로를 던졌다.
“과거 시험이야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관직 말고도 길은 많다네.”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서당을 열어도 괜찮을 걸세. 회시까지 올라갔다면 아이들이 제법 모이지 않겠나? 아니면 나처럼 장사를 해도 되고.”
장경규는 웃으며 말했다.
“혹시 장사를 해 볼 생각이면 나를 찾아오게. 내 힘써 도와줄 테니.”
“감사합니다.”
운현은 진심으로 장경규에게 인사를 했다.
물론 찾아갈 마음은 없지만 그의 마음이 고마운 것이다.
촤아아아.
뱃전을 때리는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한낮이었던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고 장강이 석양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장사치들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아예 본격적인 술판으로 들어가려는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배다! 전방에 배다아아아!”
한 선원의 외침이 갑작스레 갑판 위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선원들 사이로 긴장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선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런!”
운현 옆에 있던 장사치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곧 휘청거려야 했다.
어느새 꽤 술이 취한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운현이 장경규에게 물었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그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듯했다.
대답한 사람은 나이 지긋한 장사치였다.
“그냥 지나가는 배라면 저렇게 소리를 칠 리 있겠나. 무언가 말썽이 난 모양일세.”
그 역시 얼굴이 사뭇 굳어 있었다.
운현은 뱃전에 몸을 기대 고개를 빼고 앞을 바라보았다.
뱃머리 쪽으로 가 보고 싶었지만 앞쪽은 선원들과 무림인들이 벌써 자리를 차지한 후였다.
‘무슨 일이지?’
붉게 물든 장강 저편으로 몇 척의 배들이 보였다.
아직 거리가 멀었지만 운현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상선이라면 반드시 달게 되어 있는 표기가 그들의 돛대에는 보이지 않았다.
운현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그러나 상황은 이미 명백했다.
저들은 바로 악명 높은 장강의 수채였다.
***
“부채주님, 좀 이상한데요?”
무심파 부채주 장삼채는 수하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넌 사업을 개시하는 이 신성한 순간에 꼭 초를 쳐야겠냐?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그가 말하는 사업은 지나가는 배를 위협하여 돈을 뜯어내는 것이다.
긴장된 순간이니 그가 퉁명스레 반응한 것도 당연했지만, 수하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그게, 왕눈알 말로는 선원들 말고도 무림인 같은 사람들이 보인답니다.”
왕눈알은 눈이 좋아 사업 대상을 탐색하는 수하다.
물론 따로 이름이 있지만 수채 사람들은 그냥 왕눈알이라고 불렀다.
“뭐? 무림인?”
장삼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채주께서 무림인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어떡할까요. 그냥 지나갈까요?”
“뭐 인마?”
장삼채의 입에서 대뜸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지나가긴 뭘 지나가! 이렇게 바리바리 몰고 나왔는데 그냥 지나가 봐라. 그게 무슨 웃기는 짓이냐? 지금 우리가 저 녀석들 즐겁게 해 주자고 여기 나온 걸로 보여?”
“하지만…….”
“시끄러!”
장삼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썰어야 하는 거야. 빈손으로 돌아가더라도 할 말은 있어야지. 잔말 말고 일단 부딪쳐 봐!”
‘췌, 솔직히 굴러온 돌이라 채주한테 잘 보여야 하는 처지라고 할 것이지.’
괜히 욕을 먹은 부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부채주 장삼채는 뒤늦게 무심파에 합류한 덕에 다른 부채주들 중에서도 위치가 애매한 터였다.
덕분에 고생하는 건 언제나 밑에 있는 수하들뿐이다.
그러나 목숨이 아까우니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일, 수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화풀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사업 시자악!“
사업 시작이라는 말 역시 무심파에서만 통하는 은어였다.
채주는 수채의 품격을 높인답시고 늘 이상한 짓을 생각해 내어 수하들을 괴롭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용어야 어떻든, 서너 척의 배들은 그 소리에 일제히 속도를 늦추며 호암상단의 표기를 단 상선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
“이봐, 어떤가?”
운현의 옆에 있던 장사치가 운현에게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러나 운현이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알 리가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가까이 오던 배들이 상선의 진로를 막는 바람에 배가 거의 멈춘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는 것뿐이다.
“아무래도…….”
운현은 뒷말을 삼켰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저쪽 갑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이미 모두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그래도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있으니…….”
장사치 중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위안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남궁세가는 호암상단의 배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이지 장사치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켜 주려고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궁세가 사람들 때문에 반드시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통행세만 내면 조용히 지나갈 일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