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괴서찰
운현은 새삼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이를 가지면 오자등과라 새겨진 거울을 가지고 다니고 장원급제를 바라는 동전을 주변에 돌리는 세상이다.
그러니 아주 가난한 집이 아닌 다음에야 과거 공부 한두 해쯤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자네는 어디까지 가나?”
“저는 동정호까지 갑니다.”
“동정호? 그쪽이 고향인가?”
“아닙니다. 형님 댁이 그쪽이라……. 여러분은 어디까지 가시는지요?”
이어지는 장경규의 질문이 부담스러운 운현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중경까지 가는 길이라네.”
“중경이면……, 멀군요.”
운현이 탄 배는 남경을 출발하여 동정호를 거친 후 중경까지 가는 꽤 큰 상선이다.
동정호까지도 그리 짧은 길은 아니지만 중경이라면 더욱 멀다.
“그래도 중경까지는 가야 제대로 물건값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 나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잘은 모르네만……. 다들 중경까지는 갈 걸세.”
장경규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상선답게 배 안에는 여행객들보다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운현의 눈에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복장을 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들어왔다.
‘응?’
어디선가 본 듯한 단정한 무복과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당당한 행동들, 그리고 등이나 허리에 차고 있는 긴 검들.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은 무림인들이 분명했다.
‘무림인이라…….’
갑자기 운현의 마음이 번잡해졌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마치 물 흐르듯 운현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왜, 배에 무림인들이 타고 있는 게 궁금한가?”
옆에서 장경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면 저 아가씨한테 반했나?”
싱긋 웃으며 장경규가 말했다.
그 말에 운현이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무복을 입은 무림인들 가운데 유난히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 한 명이 보였다.
용모가 빼어난 데다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남자들의 시선을 모을 만 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괜찮네. 감히 말도 못 붙일 귀한 아가씨라지만 보는 거야 무슨 상관이겠나? 저렇게 예쁜데.”
그 말대로였다.
무복을 입고 있어도 어여쁜 용모는 가려지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모인다.
게다가 밝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 주변에 젊은 무인들이 몰려 있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뭐,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북해빙궁의 소궁주만은 못하다.
분위기도, 미모도, 그리고 치명적인 매력도 말이다.
“아서게.”
다른 장사치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다가 잘못 걸리면 큰일 날지도 몰라. 눈빛이 기분 나쁘다며 목을 치려 들면 어쩌려고 그러나?”
함부로 쳐다보는 것이 무례라는 건 운현도 동의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빛이 기분 나쁘다고 목을 칠 정도일까?
운현은 설마 싶었지만 다른 장사치들은 아니었다.
“맞아. 칼 든 자들은 항상 조심해야 돼. 무림인들은 우리를 사람 목숨으로 치지도 않으니 말이야.”
장사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데 저 무복은 어느 문파지?”
젊은 무인들은 모두 비슷한 복식을 하고 있었다.
“아, 그건…….”
저들의 무복이 기억에 생생한 운현이 무언가 답하려고 할 때였다.
“아직도 그걸 몰랐단 말인가?”
장경규가 사뭇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저들은 말이야, 그 이름도 대단한 남궁세가 사람들일세.”
그 사실은 운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용봉지회에서 운현을 향해 이를 갈던 남궁세가의 공자를 잊을 리가 없다.
“자, 그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왜 이 상선에 단체로 탔는가? 그걸 또 이야기 안 할 수가 없지.”
“쯧쯧, 또 버릇 나왔구먼.”
“그냥 놔둬 보게. 심심한데 얘기나 듣자고.”
장경규의 말에 다른 장사치들이 호응을 했다.
강바람을 맞으며 사뭇 취한 장경규는 목소리까지 가다듬으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또 이런 쪽엔 정통한 소식통 아닌가? 얼마 전까지 무림 세가의 모사였다니까? 잘나가다가 막판에 망하는 바람에 발을 빼긴 했지만 강호 무림의 어지간한 소식은 다 내 손안에 있다고.”
“클클, 그놈의 과거 이야기는 언제까지 할 건가? 남궁세가가 이 배에 탄 이유나 말해 보라고.”
“그래, 그래. 빨리 해 보게.”
“좋아, 내가 해 주지!”
장경규는 사람들의 호응에 신이 난 듯 술 한 잔을 들이켰다.
“모든 일은 바로 한 장의 괴서찰에서 시작되었다네.”
‘서찰?’
무심하게 듣고 있던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물론 서찰이라고 해서 자신의 이야기일 리는 없다.
하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운현은 귀를 기울였다.
“몇 년 전에 장강 어귀에 무식파라는 수채가 하나 있었네. 뭐, 조그만 수채다 보니 큰 배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작은 배들을 위협해서 통행세를 뜯어내며 그럭저럭 살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어느 날 이 수채에 이상한 서찰이 하나 날아들었네. 근데 이 두목이 일자무식이라, 완전 까막눈이야. 아는 건 한 일(一) 자 하나뿐이란 말도 있었어. 어쨌든 서찰이 왔으니 안 읽어 볼 수도 없고, 글은 모르고, 그래서 밑에 있던 부하에게 읽어 보라고 맡겼지.”
거침없이 말하던 장경규가 목이 마른지 다시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커. 그래, 그 육포 좀 줘 봐. 그런데 서찰을 맡은 이 부하 녀석이 또 살아온 인생이 파란만장해요.”
장경규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자기 말로는 소림사에서 무심(無心)이라는 법명까지 받은 승려였다는데, 동굴에서 참선을 하던 중에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서는 음양의 도리를 깨우쳐 줬다는 거야. 뭐, 진짜 선녀겠어? 길 잃은 시골 처녀라도 하나 덮쳤나 보지.”
피식 웃던 장경규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파계승은 수도를 때려치우고 사교 교주 겸 깡패 비슷한 짓을 몇 년간 했다네. 그러다 관부의 추적이 시작되니까 숨어든 게 바로 이 무식파 수채였거든.”
장황한 이야기에 다들 지루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장경규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근데 이 가짜 중 놈이 두목에게 서찰을 받자마자 바로 수채를 튀어 버린 거야.”
“뭐? 왜?”
“그 서찰이 뭐라도 되나?”
“어허, 재촉하기는. 좀 기다려 보라고. 이야기에는 다 순서가 있어요. 순서가.”
장경규는 사뭇 여유를 부리며 말을 이었다.
“서찰을 받은 놈이 튀어 버리니 두목도 아차 싶었지. 혹시 토벌령이라도 내렸나 해서 한동안 수채를 비우기까지 했다더군.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장사치들의 얼굴에 실망이 번지는데 장경규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났나? 이 땡중이 다시 수채에 나타났다네. 그것도 엄청난 고수가 되어서 말이야.”
장경규는 입에서 침까지 튀겨 가며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다.
“이놈이 한번 손을 뻗으니까 두목이고 뭐고 펑펑 나가떨어지는데, 순식간에 수채를 접수해 버렸다네. 한순간에 두목이 바뀐 거지.”
장사치들은 눈을 빛내며 장경규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 손을 뻗으면 수채 두목이 날아간다니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무식파는 무심파로 이름을 바꾸고 쑥쑥 세력을 불려 가기 시작했네. 이젠 지나가는 상선이라면 큰 거 작은 거 가릴 거 없이 무조건 건드리고 본다는데, 아주 깡패가 따로 없다더군.”
듣고 있던 장사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상선을 괴롭히는 것과 큰 상선을 넘보는 건 확실히 다르다.
실력도 없는 수채 따위가 그저 규모만 조금 커졌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하여간 일이 이쯤 되니 그 땡중이 어떻게 단번에 고수가 되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네. 자네 같아도 궁금하겠지? 그렇지?”
갑자기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는 장경규의 말에 운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밀이 바로 서찰에 있었다는 거야. 그놈이 한번은 술에 만취해서는 예전 수채 동료들에게 하는 말이, 네놈들은 눈이 삐어서 보물을 앞에 두고도 못 알아봤느니 하며 놀렸다는군. 사실은 그 서찰이 무슨 절세 무공 비급 같은 거였다나?”
“허어, 저런…….”
장경규의 말을 듣던 장사치들이 혀를 찼다.
“어떤 미친놈이 수적들에게 그런 비급 같은 걸 보냈단 말인가?”
“그러게. 정말 벼락 맞을 놈일세. 괜히 우리 같은 사람들만 더 살기 어렵게 된 것 아닌가?”
장사치들의 규탄이 이어지는 사이, 옆에 앉은 운현은 실망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역시 아니었군. 하긴, 내가 보낸 서찰이 무슨 이야깃거리가 될 리가 없지.’
적어도 자신은 수로채 같은 도적들에게는 서찰을 보낸 적이 없다.
나름 조언을 적어 놓긴 했지만 무슨 무공 비급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운현이 생각에 잠긴 사이 옆에서는 장경규의 장황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무심파에 피해를 입은 배들 중에 호암상단의 배가 끼어 있었다는 걸세.”
웅성거리던 장사치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그래 맞네.”
장경규는 듣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탄 이 배를 소유한 호암상단 말일세.”
장사치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륙의 동서 물길을 오가며 이름을 떨치고 있는 호암상단의 배를 건드렸다는 건 그 의미가 아주 컸다.
“그래서 남궁세가가 나섰군.”
장사치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장경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호암상단이 남궁세가와 손을 잡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이게 바로 남궁세가의 무림인들이 이 배에 타고 있는 사유올시다, 이거지. 이제 알았나?”
장경규가 턱을 쳐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마치자 옆에 있던 장사치 하나가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저 무림인들은 이 배를 보호하려고 탔다는 거 아닌가? 간단한 얘기로구먼.”
“어허.”
장경규가 뭘 모르는 소리라는 듯 말했다.
“간단하다니? 전혀 간단하지 않은 일일세.”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장경규는 입을 열었다.
“장강이란 게 말이야, 아주 기이이인 강이거든. 저 위에 사천성부터 시작해서 아래로는 절강성까지 대륙을 가로지르면서 안 거치는 데가 없단 말이지. 게다가 지나는 커다란 도시만 해도…….”
“이 사람아. 그걸 누가 모르나.”
장황해지려는 장경규의 말에 누군가 핀잔을 주자 장경규의 눈매가 꿈틀한다.
“아, 그러니까! 남궁세가가 호암상단하고 같이 장강을 따라 움직인다면 당장 심사가 불편한 문파가 한둘이 아니란 말일세. 오랫동안 앙숙이던 혁련세가는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도 절대 기분이 좋을 리 없다고. 자네라면 자기 집 앞마당에 옆집 사람들이 제멋대로 들락거리는데 기분이 좋겠나? 앙?”
장사치들은 그제야 장경규가 하려는 말뜻을 알아차렸다.
무림 세가들은 장강의 상행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만일 이 일로 인해 문파 간의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 피해는 당장 장강을 오르내리는 상인들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다들 얼굴이 굳어지는데 옆에 있던 장사치 하나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그래도 설마 배 몇 척 호위하는 일인데…….”
“어허, 이런. 또 뭘 모르는 소리를.”
그러나 장경규의 목소리는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깨 버렸다.
“한번 발을 들이밀고 나면 다음엔 엉덩이를 붙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일세. 다른 문파들이 경계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정식으로 양해를 얻기도 문제인 게, 그러다 그 문파들이 호암상단과 연결되지 말라는 법이 또 없거든.”
장경규는 어깨를 으쓱했다.
“잘못하면 남궁세가가 큰 돈줄을 잃는 거라고.”
호암상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궁세가의 힘이어야 한다.
그래야 호암상단이 남궁세가만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시에 실소를 머금었다.
‘여기도 참 복잡하군.’
이리저리 이해관계가 얽히는 것이 궁중의 암투와 버금간다.
하긴 이권이 얽힌 일에 그런 일이 어찌 없으랴?
“거 참……, 꽤나 복잡하구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장사치 한 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술자리 분위기는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그 분위기에 장경규가 다시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말일세, 그런 수채가 무심파만이 아니라는 걸세.”
“그러고 보니 요즘 장강 물길이 불안해졌다는데…….”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장사치들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술을 마실 분위기조차 아니었지만 취한 장경규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다 그 괴서찰 때문일세. 내가 있던 하남성에서도 모용세가가 그 서찰을 받은 게 확실하다니까? 분명 이러다 큰 난리가…….”
“크흠.”
헛기침 소리가 장경규의 말을 막았다.
나이 지긋한 장사치가 장경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게. 이러다 다른 사람들 술맛이 달아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