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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86화 (86/530)
  • 086화. 장강행

    푸른 달빛이 쏟아지는 한밤의 공터엔 적막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공터에 말없이 홀로 서 있는 운현의 마음속은 아직도 어지럽기만 했다.

    그 혼란은 마치 공터에 어지러이 새겨진 격돌의 흔적처럼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후우우.”

    운현은 천천히 긴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던 비무가 끝난 지도 이미 한참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운현의 심장은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후후.”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작 두근거려야 할 비무 때는 고요하기만 하더니, 모든 것이 끝난 이제야 비로소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비무의 중압감을 이제야 실감하듯이.

    휘청.

    “이런.”

    걸음을 옮기려던 운현은 갑자기 휘청했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미처 균형을 잡기도 전에 운현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털썩.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운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슥.

    운현은 주저앉은 채로 손을 들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자신의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꽈악.

    운현은 손을 움켜쥐었다.

    스스로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빙설과 같은 고수의 검을 그렇게 당당하게 맞받아 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빙설과 자신의 검이 그려 낸 궤적은 지금도 눈앞에 잡힐 듯 생생하건만, 그 검로를 자신이 그려 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빙설의 검을 받아 낸 것도, 그리고 심지어 이기기까지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허, 허허허…….”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운현의 가슴속에선 무언가 뜨거운 것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엔 나뭇가지였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운현은 생각했다.

    처음엔 나뭇가지였고 이후엔 목검이었다.

    자금성에서 지냈던 시간들이 마치 환상처럼 운현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청명한 가을과 눈 덮인 겨울, 그리고 짧은 봄과 길고 무더웠던 여름.

    그렇게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던가?

    그래도 자신은 그저 검(劍)이 좋을 뿐이었다.

    굳이 쓸모를 따지지 않더라도, 문(文)이니 무(武)니 하는 단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그저 검을 수련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볼품없는 목검에 이름없는 수련검에 불과할지라도 그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수련이 끝나면 현실이 찾아왔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던 수련 시간이 끝나면 마음 한구석엔 늘 찬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세월이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뒤로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결국에는 소중한 인연들마저 잃고 자금성을 나와 낙척 문사가 되어 고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자신의 발로 나온 거라고, 천하유람이나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이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 운현은 빙설을 이겼다.

    그것은 자신이 지난 세월을 그저 헛되이 보낸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운현은 웃었다. 실소도, 헛웃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길지 못했다.

    “하아, 고수(高手)라…….”

    어느새 한숨으로 변해 버린 웃음의 끝에서 운현은 무심코 내뱉었다.

    지난 십여 년간 오직 무림에 대한 이야기만 붙잡고 살았던 운현이다.

    보통 고수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눈 감고도 읊을 정도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절대 내 이야기는 아니지.’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구태여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자신이 결코 무인이나 고수가 되지 못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武)로서 충의를 다하는 무관도 아니요, 한 자루 칼에 목숨과 신념을 걸고 구도의 길을 걷는 이도 아니다.

    세가나 문파라는 이름으로 무리를 짓고 검과 폭력으로 이익을 꾀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저 자신은 검이 좋을 뿐이니, 어찌 자신을 무인, 혹은 무림인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검을 평하는 문사쯤 되려나?’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일컬어 호사가라고 한다. 그걸 대중 앞에 이야기로 팔아먹으면 이야기꾼이 되고.

    그러니 고수도, 낙일검의 주인도 운현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창룡검주라는 명호조차 자신을 숨기기 위한 허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후우.”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쏴아아.

    밤하늘엔 푸른 달빛이 가득하고 귓가에는 서호의 물결 소리가 들려왔다.

    물 냄새를 머금은 바람을 음미하며 주저앉아 있자니 세상이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하지만 운현의 마음은 고요할 수도, 평화로울 수도 없었다.

    “검성, 신승, 북해 그리고 무림맹.”

    자신은 이런 것들과 상관없는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어느새 목숨을 건 비무까지 하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은혜와 원한이 쌓이고 전혀 무관하던 이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얽혀 들어가는 강호 무림이 마치 복마전의 자금성 같아서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말하는 나 자신보다 남이 판단하는 나의 모습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니…….”

    운현은 시선을 내려 푸른 달빛이 쏟아지는 공터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주위로 마치 상처처럼 이리저리 뻗어 나간 비무의 흔적들, 그리고 그 가운데 얽혀 있는 각자의 이해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관점들.

    “이것이 강호(江湖)인가.”

    마치 한숨처럼 운현은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답하는 것은 오직 텅 빈 공터에 이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스륵.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짐을 챙기고 목검을 천에 싼 운현은 허탈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자신도 모르게 운현은 가슴에 걸린 반지를 매만졌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의형 일충현이 보고 싶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그가.

    ***

    장강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다.

    해마다 우기만 되면 어김없이 범람하여 치수 사업의 가장 큰 과제가 되어 왔지만, 장강을 다스리는 데 성공한 왕조는 없었다.

    그러나 장강은 또한 동서 교통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륙을 동서로 잇는 이 물길은 많은 상인과 여행자들에게는 대단히 고마운 것이었다.

    비록 장강수로채라는 수적의 위협이 도사리고는 있지만, 장강을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상선들은 오늘도 쉴 사이가 없었다.

    촤아아.

    커다란 돛이 바람을 가득 머금고 뱃전에 물살이 부서졌다.

    운현은 장강을 거슬러 오르는 커다란 상선에 타고 있었다.

    짐이 가득한 갑판 위에는 운현 외에도 뱃멀미를 피해 올라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운현은 뱃전에 기대서서 흐르는 경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충동적이긴 하지만…….’

    부서지는 물결만 바라보고 있던 운현은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빙설과 비무를 한 다음 날 새벽.

    밤을 꼬박 새운 운현은 짐을 꾸려 항주를 나섰다.

    남경에서 장강을 거슬러 동정호까지 가는 상선을 만났고, 운현은 주저 없이 몸을 실었다.

    ‘형님.’

    미치도록 일충현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그래서 운현은 동정호로, 정확히 말하자면 악양 부근에 있다는 의형 일충현의 본가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운현은 무림맹 서기직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데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만한 자리가 없다.

    무림맹이라면 그 이름만으로도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을 것이고, 며칠간 본 바로는 강호 무림에서 그 위상이 사뭇 대단한 곳이 아니었던가?

    ‘어차피 조정의 관리나 무림맹 서기나 어떤 면으론 마찬가지인데…….’

    심지어 자신은 모용세가에 몸을 좀 의탁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다면 무림맹이라고 안 될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 잘된 일이다.

    “후우우.”

    이런저런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운현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뒤편에서 대뜸 걸걸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허, 거 젊은 청년이 한숨 한번 거창하게 하는군.”

    운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가까운 곳에 장사치 네댓 명이 가벼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중 나이 지긋한 한 명이 운현을 웃는 낯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리 와서 같이 술이나 한잔하세.”

    “저요?”

    “그럼 거기 자네 말고 누가 또 있는가? 어서 이리 오시게.”

    “아, 저는…….”

    운현이 손을 들어 사양의 뜻을 표하려는데, 옆에 있던 다른 젊은 장사치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어차피 갈 길도 멀고 시간도 많은데 뭘 그리 빼고 그라요? 어서 이리 오쇼.”

    “그려, 그려. 그 한숨 소리에 술맛이 다 떨어질 지경이라니께. 이미 오가며 얼굴도 아는 사이겠다, 어서 와서 잔 받으시오.”

    말마따나 요 며칠간 자주 지나치던 얼굴들이다.

    나이 지긋한 장사치가 재촉하듯 손짓을 하고, 운현은 결국 머뭇거리며 그들의 술자리에 끼게 되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저는 운현이라고 합니다.”

    운현이 합세하자 장사치들은 엉덩이를 움직여 자리를 내주었다.

    “폐는 무슨…….”

    옆에 앉은 장사치가 핀잔을 주고, 나이 지긋한 장사치가 웃는 낯으로 운현에게 말을 건넨다.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소. 같이 먼 길을 가는 처지에 술이나 한잔 나눌 뿐이니까. 자, 받으시오.”

    그는 운현에게 잔을 건넸다.

    옆에 짐을 내려놓은 운현은 잔을 받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운현은 마음을 굳히고 단번에 휙 들이켰다.

    “오, 이 친구 술 마실 줄 아는군.”

    “거 보게. 내가 술 잘 마시게 생겼다고 했지? 하하하.”

    생각보다 독한 술에 인상을 쓰는 운현을 보고 장사치들이 웃었다.

    옆에 앉은 젊은 장사치가 안주 삼아 육포 조각을 건네주며 물었다.

    “북경에서 오는 길인가?”

    육포 조각을 받으려던 운현은 깜짝 놀랐다.

    이 배가 출발한 곳은 남경이다. 자신의 차림새가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북경에서 온 것을 알아차렸을까?

    “그리 놀랄 것 없네. 나도 여러 번 겪어 본 일이니까. 뭐, 시험이 어디 이번 한 번뿐인가. 힘내게.”

    “그래, 젊은 사람이 너무 낙심할 것 없어. 아, 그래도 회시까지 간 게 어딘가?”

    다른 장사치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제야 운현은 이들의 친절이 이해가 갔다.

    그들은 운현을 과거에서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서생으로 본 것이다.

    “아, 저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운현은 그만두었다.

    굳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일도 번거롭고 이들의 친절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낙방 서생과 다를 것도 없는 신세 아닌가?

    “자네 옆의 그 친구는 낙방만 세 번이었다네. 자네도 너무 낙심 말게.”

    처음 운현을 불렀던 나이 지긋한 장사치가 말하자 다들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그냥 낙방인가? 연달아 내리 세 번을 향시에서 미끄러지지 않았나? 세 번이면 합이 구 년이니, 때려치울 만도 하지. 클클클.”

    “그뿐인가? 무림 세가에서 무슨 모사인가 뭔가도 하지 않았나? 이젠 장사꾼으로 변신했으니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이야.”

    “어허! 이 사람들이 실없이……. 왜 자꾸 남의 과거를 들추고 그러나?”

    젊은 장사치가 동료들의 말에 짐짓 근엄하게 대꾸하더니 운현에게 웃는 낯으로 잔을 건넨다.

    “나는 장경규라고 하네. 예전에 과거를 좀 봤었지. 자넨 운현이라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운현이 잔을 받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들 과거깨나 보았던 사람들일세. 자네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남 일 같지 않아서 부른 거니 편하게 생각하게.”

    장경규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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