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85화 (85/530)

085화. 비무의 끝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이제껏 운현은 와룡헌의 일을 오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것이 오해만이었을까?

신승과 검성이 그저 오해만으로 이 모든 일을 결정했을까?

어쩌면 운현이야말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에 잠긴 운현을 바라보며 소궁주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비무의 끝을 거둘 시간은 아직도 되지 않은 건가요?”

소궁주의 얼굴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 재촉하는 듯한 그 표정에 운현도 지지 않으려는 듯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안 하겠다고 이미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삼십 년 전.”

운현의 말을 끊듯 소궁주는 말을 이어 나갔다.

“북해를 찾아온 검성과 검을 겨룬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북해는 그가 진정한 무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는 한 자루 검에 상대의,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걸었으니까요.”

운현을 바라보는 소궁주의 눈길은 더없이 싸늘했다.

그녀는 운현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어떻죠? 당신은 자신의 검에 목숨을 걸고 있나요?”

다분히 도전적인 물음이었지만 운현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무인이 아닙니다.”

운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그저 검을 좋아하는 일개 문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검의 도(道)가 꼭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엔 소궁주가 잠시 말을 잊었다.

북해에서 검을 마주하는 행위는 지극히 신성하며 더없이 잔혹한 것이기도 하다.

한 자루 검에, 단 한 번의 검격에 목숨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북해이며, 북해의 율법이다.

그러므로 운현의 단호한 그 말은 소궁주로서는 상상조차 못 한, 그것도 검성의 의지를 이은 낙일검주에게 들으리라곤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더없이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기까지 한 말이다.

지금껏 소궁주가 보아 오던 학사 운현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말할 테니까.

당혹한 얼굴로 운현을 쳐다보던 소궁주는 결국 가볍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후훗. 정말이지 당신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군요. 하지만 그런 천진난만한 생각은 문사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작게 웃음을 흘리던 소궁주가 다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빙설의 목숨을 거두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제게도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고?”

소궁주의 말에 운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왜 소궁주께……. 응?”

운현이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 운현의 행동엔 아랑곳없이 소궁주가 말했다.

“그런가요? 정말 감사한 일이군요. 하지만 덕분에…….”

사박.

소궁주가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풀숲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애써 준비한 제 계책이 그만 쓸데없이 되어 버렸군요.”

바스락.

풀숲을 헤치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냉막한 얼굴에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독특한 기세.

그는 바로 빙혼이었다.

“빙혼?”

운현은 빙혼의 등장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소궁주의 곁에 빙혼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껏 그가 이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운현이 신경을 쓰는 것은 주변 풀숲에서 빙혼과 비슷한 기세를 흘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였다.

‘앗!’

운현은 용봉지회 참석자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한 소궁주의 말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지금 빙혼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설마…….”

운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소궁주는 운현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빙혼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빙혼.”

빙혼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소궁주는 조용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계획을 종료합니다. 다음 행동은 따로 지시를 기다리세요.”

빙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반문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소궁주의 명을 받들었다.

바스락.

빙혼은 아무 말 없이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흘리던 기세도 점차 멀어져 갔다.

“저들이 온 것은 만약의 경우 제가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소궁주가 말했다.

“비록 당신을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저들 전부의 목숨이라면 최소한의 시간은 벌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비무의 끝을 거둘 생각이 없다 하시니 쓸데없는 계책이 되고 말았군요.”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들이 전부 자신에게 덤벼든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지만 덕분에.”

소궁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용봉지회의 젊은이들은 목숨을 건졌네요.”

그 말이 거짓이나 과장이 아님을 운현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저희는 이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운현은 이제껏 소궁주가 시간을 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답지 않게 대화가 길었던 것 역시 그 때문이리라.

“빙설, 일어나세요.”

사락.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빙설이 조용히 일어섰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운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은 운현도 알 수 있었다.

슥.

빙설은 말없이 소궁주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옆에 서는 것을 확인한 소궁주가 운현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비무의 끝을 거두지 않으셨으니 이 비무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북해를 찾아오게 될 그때, 당신을 맞이할 상대는 바로 이 빙설이 될 거예요.”

그건 사뭇 위협에 가까웠지만 운현은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어차피.’

북해에 안 가면 그만이다.

찾아갈 생각도 전혀 없고,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갈 기회가 생기더라도 적극 피해야 한다.

사박.

갑자기 소궁주가 운현을 향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이 빙설에게 기회를 주셨으니 북해도 마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겠죠.”

사박, 사박.

조용히 걸어오는 소궁주의 자태는 푸른 달빛 아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걸음마다 반짝이는 것은 바로 칼끝처럼 날카로운 적의다.

사박.

운현의 바로 눈앞에서 소궁주는 멈춰 섰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그녀 때문에 운현이 슬며시 몸을 뒤로 빼려는데,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낮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암천무제, 그리고 창룡검주.”

운현은 순간 움찔했다.

그것은 예기치 않게 튀어나온 익숙한 이름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바로 코앞에서 속삭이는 그녀의 숨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사람일 수도, 혹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무림맹은 이 이름을 주목해야 할 거예요. 그리고…….”

소궁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 모든 일 뒤에 존재하는 사람, 상인(上人)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당신은 북해로 올 수밖엔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속삭이듯 말하던 소궁주가 불현듯 운현에게 몸을 기대 왔다.

“엇!”

운현은 순간 그녀가 쓰러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뻗은 운현의 두 팔 사이로 소궁주의 가냘픈 듯 부드러운 몸매가 마치 깃털처럼 안겨들었다.

사락.

그녀의 두 손이 운현의 가슴을 짚었다.

향긋한 머리 내음이 운현의 코끝을 스치고, 귓가에 그녀의 가느다란 숨결이 느껴진다.

그 잠깐 사이,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달싹이며 몇 마디를 속삭였다.

오직 운현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단어를.

탁.

소궁주는 즉시 힘을 주어 운현을 밀어냈다.

운현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사이, 소궁주는 어느새 뒤로 물러나 빙설 곁에 내려서고 있었다.

사락.

그 몸짓은 그녀 역시 무공을 수련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북해에서 만날 날을.”

매혹적인 미소를 달빛 아래 빛내며 소궁주가 말했다.

“기대하고 있겠어요.”

소궁주가 빙설에게 살짝 고갯짓을 하자 빙설은 기다렸다는 듯 소궁주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는 발을 굴렀다.

파라락.

옷자락을 휘날리며 두 사람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공터에 오직 운현만이 홀로 남겨져 있었다.

‘어…….’

지금도 귓가에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운현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두근두근.

비무 때도 평온했던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

“빙설.”

소궁주의 낮은 목소리에 빙설은 즉시 땅으로 내려섰다.

사박.

빙설이 부드럽게 땅에 내려서고 소궁주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소궁주는 가볍게 옷매무새를 매만진 후 고개를 돌려 빙설을 보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죠?”

빙설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건 무슨 말인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빙설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가 낙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언제고 한번은 겨루어 보고 싶은 상대였습니다.”

“언제부터였나요?”

“무림맹에서 처음 검성을 만났던, 그때입니다.”

빙설이 말하는 것은 용봉지회에 참가한 후기지수들을 향해 검성이 기세를 쏟아 냈던 바로 그 때다.

그곳에서 운현이 마음의 검을 세우는 것을 느낀 사람은 검성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군요.”

소궁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빙설을 바라보았다.

“또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나요?”

빙설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그녀를 살피던 소궁주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요. 어차피 당신이 내게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할 의무를 가진 것은 아니니까요.”

소궁주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의외였어요. 아무리 상대가 낙일의 주인이라지만 검성도 아닌 무명의 상대에게 이처럼 완벽히 패배했다는 것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빙설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북해에는 꽤 충격적인 소식이 되겠죠.”

잠시 말을 멈추고 소궁주는 빙설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소궁주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그리 나쁜 소식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소궁주는 발밑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걸음을 내디뎠다.

“대책 없는 평화론으로 나태하게 늘어져 있던 남린파에게도, 그리고 상인(上人)이 전해 준 힘에 취해 들떠 있던 정남론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겠죠. 아마도 한동안은 이 문제로 꽤 시끄러울 거예요. 어느 쪽이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겠지만 말이죠.”

소궁주는 고개를 돌려 빙설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느 쪽이죠? 당신의 패배를 옹호해 주는 쪽인가요?”

“저는 북해십이비의 일원, 다만 북해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빙설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소궁주는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궁주의 시선이 그들이 지나온 쪽을 향했다.

방금 전 빙설과 운현이 비무를 벌였던, 운현이 홀로 남겨져 있는 방향이었다.

“낙일의 새로운 주인.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지만 악재만은 아니죠. 특히 앞으로 남은 여정을 생각한다면 이만한 호재도 없을지 몰라요.”

쏴아아.

밤의 호수로부터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화려한 옷자락을 휘날리며 소궁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의 원한은 잊지 않겠다, 라고 해야 했을까요?”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공터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빙설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궁주가 대답을 바라지 않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달빛이 내려앉은 서호를 바라보는 소궁주의 붉은 입술은 옅은 미소를 제법 오랫동안 머금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