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관점의 차이
사마건의 분노를 무시하고 각파의 후기지수들은 제각기 다친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모용미 역시 남궁비연과 함께 상처를 입은 이들을 도왔다.
저벅.
인기척을 느낀 모용미가 뒤를 돌아보자 남해검문의 파진한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소저의 판단은 훌륭했습니다.”
파진한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위험한 일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에 모용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 걸요.”
“그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파진한의 말은 사뭇 울림이 있었다.
확실히 사마건이나 제갈룡은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기분을 더 우선시했다.
자칫하면 참극으로 번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용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연회장 안을 살폈다.
“누군가 찾으시는 분이 있습니까?”
파진한이 물었다.
“아, 그게…….”
모용미는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곧 말을 이었다.
“혹시 운 학사님을 보지 못하셨나요? 무공을 모르시는 분이라 걱정이 되어서…….”
아까 운현이 연회장에 온 것을 모용미는 알고 있었다.
소란 중에 혹시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한 말인데 파진한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운 학사님이시라면 괜찮을 겁니다.”
너무도 당연한듯 말하는 그 대답에 모용미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네?”
“그분은.”
파진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
서호 변에서 만난 고수의 정체를 파진한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가 보낸 서찰과, 그곳에 적힌 자신의 검에 대한 통렬한 지적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찰에 적힌 ‘대해의 기상을 담은 검’이라는 문장은 파진한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자신이 익혀 온 가문의 검은 단지 검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바다를 품고 살고자 했던 선조들의 기상과 얼,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파진한이 모욕과 수치에서 벗어난 것은 당연했다.
그는 ‘대해의 기상을 담은 검’을 펼쳐 내기 위해 밤낮을 잊고 수련에 몰두했다.
그가 운현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운현이 말해 주었던 지적들이 서찰에 있는 검로들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로 화를 당하실 분이 아니니까요.”
파진한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정중함에 모용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파진한은 운현에게 거친 말을 하고 돌아선 사람이 아니던가?
자신이 비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혹여 운현이 해를 당할까 싶어서였고 말이다.
“그럼 저는 이만.”
모용미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파진한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른 부상자를 돕기 위해 멀어져 갔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문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모용미는 까닭 모를 한숨을 가만히 흘려야 했다.
***
“후우우.”
운현은 천천히 검을 내리며 숨을 골랐다.
푸른 달빛이 가득한 작은 공터는 운현의 숨소리만이 작게 들려올 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적막하기만 했다.
방금까지 이곳을 메우던 폭음과 충격파가 마치 거짓말 같은 정적 속에 또 다른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땅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이 없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침묵하고 있었다.
“……제가.”
나지막한 여인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빙설에게서 새어 나온 목소리였다.
어지러이 흘러내린 빙설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손은 아직 검을 쥐고 있었지만, 그건 그저 놓치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졌습니다.”
쥐어짜듯 힘들게 내뱉는 빙설의 목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의 검로는 훌륭합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허나 다양한 변화들이 아직 하나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근래 커다란 진보가 있었던 듯한데, 좀 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누군가의 글을 평하듯 말한 운현은 잠시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그래도, 대단했습니다.”
그것은 진심이자 진실이었다.
비록 운현 자신이 이기기는 했으나 빙설과 같은 검은 아직껏 본 일이 없었다.
아마도 빙혼의 검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면 비슷할까?
빙설의 검에 대한 운현의 평가는 사실 극찬에 더 가까웠다.
“큭.”
빙설에게선 대답 대신 작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곧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쿨럭.”
투둑.
그녀의 입술에서 검붉은 것이 흘러내리더니 땅바닥에 방울졌다.
운현은 흠칫했다.
피를 토하는 것은 몸이 크게 상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운현은 직접 그녀를 베거나 친 적이 없다.
아마도 빙설 자신의 내력이 역류했거나, 혹은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결과인 듯했다.
갑자기 와락 걱정이 된 운현이 소궁주를 돌아보았지만 그녀 역시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운현을 보고 있을 뿐, 빙설을 도우려는 기색은 없었다.
결국 운현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저벅, 저벅.
울려 퍼지는 자신의 발소리가 운현은 유독 크게 느껴졌다.
그가 다가서는 기척을 분명히 느꼈으련만 빙설은 운현을 쳐다보지도, 무어라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운현은 가벼운 한숨을 내어 쉬고 나서 빙설을 향해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만 다치게 한 모양이군요.”
빙설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 탓에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운현은 빙설을 향해 다시 말했다.
“저……, 괜찮습니까?”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 숙인 빙설은 미동조차 없고, 더 이상 말을 걸기도 어색해진 운현은 빙설 앞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기…….”
운현이 다시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이제 그만하세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소궁주의 것이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사박, 사박.
멀리 떨어져 있던 소궁주가 운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승부가 났으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전대 낙일의 주인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자박.
발걸음을 멈춘 소궁주의 시선이 똑바로 운현을 향했다.
“이 비무의 끝을 거두시지요.”
운현은 소궁주의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비무의 끝을 거둔다’라는 말이 생소했던 탓이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소궁주의 차가운 시선에서 운현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설마…….”
운현이 자신도 모르게 흘린 말에 소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신의 검은 낙일이 아니라 해도, 당신은 낙일의 주인입니다.”
소궁주의 시선이 고개 숙인 빙설에게 향했다.
“낙일검주(落日劍主)의 검에 목숨을 잃는다면 빙설에게도 여한은 없겠지요.”
운현은 소궁주와 빙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꼼짝 않던 빙설의 태도도, 더없이 싸늘했던 소궁주의 시선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운현은 허탈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됐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거부의 뜻이었다.
싸늘하던 소궁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던 빙설도 이번만은 고개를 들어 운현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전대 낙일검주의 뜻을 잇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소궁주의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전대 낙일검주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나 죽이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낙일검주가 아닙니다.”
소궁주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녀는 마치 운현의 속마음을 살피기라도 하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운현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운현은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그리고 잠시 후, 소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신승께서 저희에게 거짓을 말하셨단 말씀인가요?”
“신승? 불영 대사님 말씀입니까?”
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된 이유에 대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아니, 아예 훤하게 보이는 듯 했다.
‘이런.’
와룡헌에서 신승과 검성은 각기 운현에게 무언가를 맡기려 한다고 했다.
검성의 경우엔 낙일검이었고, 신승은 그저 두루뭉수리 하게 넘어가 버렸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신승이 운현에게 떠맡긴 상황이었던 것이다.
신승의 ‘헐헐’ 하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생생하다.
‘이이…….’
욕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노인께 차마 상소리를 할 수는 없는지라, 운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심경을 대신했다.
운현을 바라보던 소궁주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묻는다.
“정말 검성께서 당신에게 낙일을 넘겨주지 않으셨나요?”
“아니, 그건 돌려드렸다고 벌써…….”
운현은 발끈 대답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검성은 그 검을 돌려받기를 거절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검을 주었다는 것 또한 변함없는 사실이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그분이 검을 주려 하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을 돌려 드리려 했고, 그리고 그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확신이 안 서는 운현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소궁주가 그 뒤를 이었다.
“혹시 검성께서 돌려받기를 거절하셨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쩐지 낭랑했다. 마치 운현이 불리한 점을 찾아낸 것이 즐겁다는 듯.
심각하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운현은 그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긴 합니다만…….”
말하자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
운현이 머뭇거리는데 소궁주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까 결국 당신이 현재 낙일의 주인이란 것은 변함이 없군요.”
“그건 오해입니다. 나는…….”
“오해가 아니에요.”
소궁주는 고개를 저으며 운현의 말을 끊었다.
“관점의 차이일 뿐이죠.”
사박.
소궁주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낙일이 당신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당신이 낙일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있지요.”
사박, 사박.
가만히 들리는 발소리 사이로 소궁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전대 낙일의 주인인 검성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신승께서는 그것을 확인해 주셨어요. 게다가 방금 전에는 제 눈앞에서 북해십이비의 한 명인 빙설을 쓰러뜨리기까지 했죠.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낙일도 아닌 그 볼품없는 목검으로 말이에요.”
말을 잇던 소궁주가 운현이 들고 있는 목검에 슬쩍 시선을 던진다.
‘이 목검이 뭐가 어때서.’
왜 볼품없다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현이 보기엔 크고 단단한 데다 가격마저 훌륭한 더없이 멋진 물건이다.
하지만 말하진 않았다. 지금 논제는 그것이 아니니까.
“그러니 이제 북해는 당신을 주목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의 출신과 사문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당신의 성격과 당신의 무공, 그리고 당신의 친구와 적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들까지. 왜냐하면…….”
탁.
발걸음을 멈춘 소궁주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소궁주의 붉은 입술이 달빛에 반짝이며 부드럽게 달싹였다.
“이제는 당신이 낙일의 주인이니까.”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궁주의 말대로라면 이건 정말 낭패다.
검성이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낙일을 떠맡겼는지는 몰라도, 운현은 무림의 일에 연관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허나 그것 또한 신승과 검성, 두 분의 오해입니다. 설명하자면 좀 길지만…….”
“후훗. 오해요?”
소궁주의 작은 웃음소리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나요? 천만에. 그렇지 않아요.”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빛내며 소궁주가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오해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성과 신승 그 두 분의 안목이 저보다 못하다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