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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83화 (83/530)

083화. 백호실전검 제삼식

그 한 걸음은 팽팽한 긴장을 깨는 자그마한 균열이었다.

그러나 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빙설 또한 단순한 도발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도, 귀를 찢는 기합 소리도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 빙설의 모습이 마치 바람처럼 흐릿해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현도 당황하지 않았다.

우우웅.

낯선 기운이 일렁이던 운현의 목검이 공중에 푸른 호선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순간 소궁주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운현의 목검이 가르고 지나가는 그곳, 아무것도 없는 허공중에서 커다란 파열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콰앙, 쾅, 콰앙.

‘이, 이럴 수가!’

소궁주는 경악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궤적을 따라 운현의 목검이 춤이라도 추는 듯 부드럽게 움직여 갔다.

그리고 마치 거짓말처럼, 아니 미리 짜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빙설의 검과 격돌해 나갔다.

그야말로 한 치의 어긋남조차 없었다.

콰앙, 쾅, 쾅.

쉭, 쉬식, 휘릭.

격돌의 순간마다 소궁주는 흐릿하게 빙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잔상에 불과했다.

극에 달한 빙설의 움직임을 소궁주의 안목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오직 운현의 모습과 그의 목검이 그리는 검로뿐.

그런데도 운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빙설의 검을 향해 목검을 휘둘러 갔다.

그 움직임은 지극히 부드럽고 단 한 순간도 멈춤이 없었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바라보는 소궁주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아니, 적어도 소궁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쾅, 콰앙, 쾅.

연이어 터지는 파열음이 검무의 음악이라도 되는 양, 운현의 목검은 쉬지 않고 움직여 갔다.

사박, 파바박.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운현의 걸음마다 격돌의 흔적이 상처처럼 땅에 새겨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궁주는 빙설의 공세가 더 이상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운현에게는 처음부터 위협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한 소궁주의 느낌을 증명이라도 하듯 빙설의 검을 막아 가던 운현의 목검이 일순 기이한 무게감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둔중한 기세.

순간적으로 운현이 들고 있는 목검이 무거운 돌검이 된 것은 아닐까 느껴질 정도였다.

환각과도 같은 그 한순간, 이제껏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던 운현의 목검이 둔중한 일직선의 검로를 그렸다.

그것은 바로 백호실전검 제삼식, 중검(重劍)이었다.

***

채앵, 챙.

“크악!”

화려한 전각 안은 도와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갑작스레 난입한 일단의 무사들과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곳곳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직 심하게 다치거나 쓰러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의 상처는 늘어만 가고, 난입한 청년 무인들의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그 목소리는 전각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무리 큰 소리라지만 생사가 오가는 싸움 속에서 말 한마디에 무기를 거둘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타닥.

용봉지회 후기지수들과 맞서던 무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젊은 후기지수들 역시 당황하여 공격을 멈췄다.

저벅, 저벅.

일갈로 싸움을 멈춘 그가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는 용봉지회 후기지수들도 이미 아는 사람이었다.

‘빙혼?’

검을 들고 있던 모용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로 북해빙궁의 호위 무사, 빙혼이었다.

모용미는 물론 다른 후기지수들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난입한 무인 중 한 명이 빙혼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손으로 검을 모은 채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빙혼 님.”

후기지수들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연회장에 난입한 무인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빙혼은 아랑곳없이 그 무인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이곳에 무슨 일인가?”

“용봉지회에 빙혼 님께서 오신다 함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우연찮게 다른 형제들을 만났기에 기쁜 마음으로 함께 식사를 하려던 참입니다.”

그들이 북해의 말 대신 이곳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음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무인은 고개를 돌려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헌데 저 자들이 무례하게도 시비를 걸더군요. 그래서 작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작은 소란이라기엔 너무 컸지만 빙혼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듣고 있던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주위를 슥 둘러본 빙혼은 다시 청년 무인에게 말했다.

“이곳은 장소가 좋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지.”

“네.”

말을 끝낸 빙혼은 발길을 돌렸고, 날카로운 눈매의 무인은 기쁜 낯으로 검을 거두었다.

스릉.

그와 함께 살기등등하던 다른 이들 역시 일제히 검을 거두고 빙혼을 뒤따랐다.

방금 전까지 싸움을 벌이던 용봉지회의 참석자들은 마치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거기 서라!”

그 광경을 그냥 보아 넘길 후기지수들이 아니다.

남궁상혁은 분노한 표정으로 빙혼에게 소리쳤다.

“네놈들은 뭐냐!”

그건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심정이기도 했다.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빠져나가려는 그들에게 분노한 사람은 남궁상혁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탁.

빙혼이 멈춰 서고, 날카로운 눈매의 무인이 남궁상혁을 죽일 듯 노려본다.

“네놈들?”

빙혼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남궁상혁을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과연 무례하군.”

남궁상혁은 움찔했다.

이번 무림맹 비무에서 빙혼에게 처참하게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날 남궁상혁은 빙혼에게 스스로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몇 번을 땅에 나뒹굴었으며, 눈앞에 빙혼의 칼날을 마주한 것은 몇 차례였던가?

모두의 앞에서 스스로 패배를 자인해야 하는 그 굴욕을 남궁상혁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남궁상혁은 빙혼의 눈빛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남궁상혁을 대신하여 소리친 사람은 바로 제갈세가의 제갈룡이었다.

“북해의 무사들이 감히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을 상하게 했다!”

제갈룡은 칼을 든 채로 분노하여 소리쳤다.

“이 큰일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그의 분노는 당연했다. 그러나 빙혼에게는 아니었다.

“책임이라고?”

빙혼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제갈룡이 울컥하는데, 빙혼은 천천히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북해의 칼에 죽은 자가 있나?”

“뭐?”

제갈룡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나 빙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면 팔다리가 잘리거나 눈을 잃은 자가 있나? 아니면 손가락은 어떤가?”

제갈룡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빙혼은 살벌한 시선으로 제갈룡을 쳐다보며 말했다.

“없나? 그렇다면 작은 소란이 맞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빙혼은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산파의 사마건이 나섰다.

“멈춰라!”

빙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돌아보자 사마건이 분노로 외쳤다.

“너희가 이 일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기느냐? 감히 북해빙궁 따위가 어디서…….”

그러나 사마건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빙혼의 시선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사마건을 덮쳐 왔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해라.”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빙혼이 말했다. 그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비수처럼 사마건에게 박혀들었다.

“북해빙궁은 도망가지도, 숨지도 않는다. 너희가 복수를 원한다면 뜻대로 해라. 아니면 아예 이곳에서 끝을 보는 것도 좋지. 너희에게 그럴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거짓이 아니라는 듯, 빙혼은 자신의 검에 손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북해 무인들 역시 일제히 검을 뽑을 자세를 했다.

그 눈빛과 기세가 사뭇 살벌하니, 용봉지회 후기지수들 중에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흥.”

빙혼은 비웃었다. 작은 그 비웃음이 각 문파 후기지수들의 귀에 메아리쳤다.

“이익.”

분노를 참지 못한 사마건이 무어라 막 외치려던 때였다.

“잠시만요.”

청아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모용미였다.

스릉.

검을 거둔 그녀는 사마건과 제갈룡에게, 아니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에게 말했다.

“저들의 난폭함에 대한 의분은 모두가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친 이들을 돌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빙혼의 말처럼 죽거나 중상을 당한 사람은 없다 해도 치료가 필요한 이들은 많았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무공을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연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무림인은 아니다.

그중에는 후기지수들과 친분을 맺으려 참석한 상단이나 세가의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니 지금은 잠시 분노를 거두시고 차후에 정식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모용미의 말은 정확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남궁세가의 아가씨, 남궁비연이 나섰다.

그녀 역시 들고 있던 검을 거두며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끝을 보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에요.”

사마건과 제갈룡 그리고 후기지수들은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난장판이 된 전각 안 곳곳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더구나 모용미의 지적처럼 무공을 모르는 이들도 많으니 이대로 싸움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두 분의 말씀이 옳소.”

묵직한 목소리가 모용미와 남궁비연을 거들고 나섰다.

이번에 나선 사람은 무당파의 청년 도사였다.

진영이라는 도호를 가진 그는 뒤늦게 용봉지회에 참석하여 우승을 거머쥔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은 다친 이들을 돌보는 것이 먼저요. 화산파의 공자께서는 저를 보아 잠시만 화를 참아 주시오.”

무당의 후기지수, 진영까지 나서자 더 이상 사마건이나 제갈룡도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사마건은 이를 악물고 빙혼을 노려보았다.

“지금은 보내 주겠다. 그러나 언제고 이 모욕은 반드시 되돌려 줄 것이다.”

빙혼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북해의 다른 무인들도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저벅, 저벅.

거친 발소리와 함께 그들은 연회장 밖으로 사라져 갔다.

덕분에 그들이 북해의 언어로 나지막이 말하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결투가 시작되었다.”

빙혼이 자신을 뒤따르는 날카로운 눈매의 무인에게 말했다.

“즉시 복귀한다. 가로막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베어라.”

북해의 무인들은 눈을 빛냈다.

방금까지 도검이 난무하던 연회장을 빠져나왔지만, 그들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빙혼과 북해의 무인들을 연회장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조용해진 연회장 안에서 문득 사마건이 검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이이익!”

콰직.

쓰러져 있던 탁자가 단숨에 반으로 잘려 나가고, 사마건은 어깨를 들썩이며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되었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마건의 행동에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난입했던 북해 무인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직접 겪은 사실이다.

분노하는 저 사마건 역시 북해 무인들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내내 수세에 몰려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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