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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82화 (82/530)
  • 082화. 서호의 비무

    소궁주는 운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슥.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빙설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사박, 사박.

    발음 멈춘 빙설은 두 손으로 검을 맞잡고 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북해의 예법을 모르는 운현도 매우 정중한 예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낙일의 주인을 뵙습니다.”

    처음 듣는 빙설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서툰 그 목소리는 단지 이곳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빙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어색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당신과 검을 마주할 순간을.”

    빙설이 천천히 눈을 들며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빙설의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그녀의 말이 한 점 거짓도 없는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 대상이라는 것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나는…….”

    “빙설의 예를 받으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고개를 저으려는 운현을 소궁주의 목소리가 막았다.

    “젊은 후기지수들의 목숨을 생각하신다면 말이에요.”

    그 섬뜩한 말에 운현은 소궁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일렁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은은한 분노였다.

    “이래도 당신을 움직이기엔 아직 부족한가요?”

    쏴아아.

    서호의 바람이 소궁주의 옷자락을 일렁였다.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운현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결의를 보았다.

    소궁주는 반드시 자신이 말한 대로 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낙일과 연관된 빙설의 비무이건, 혹은 용봉지회 참가자들의 목숨이건 말이다.

    “후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말로써 해결될 일은 분명 아니군요.”

    소궁주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라도 이해를 해 주시니 기쁘군요.”

    툭.

    운현은 들고 있던 짐을 조금 떨어진 곳에 던졌다.

    그리고 천으로 말아 두었던 목검을 들었다.

    사락.

    천이 벗겨지고 목검이 드러났다.

    소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모르는 사이 낙일이 많이 변한 건가요?”

    그것은 분명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했지 않소? 돌려드렸다고. 비무라면 이 검으로도 충분히…….”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우욱.

    엄청난 기세가 운현을 향해 쏟아져 왔다.

    그것은 이전 무림맹에서 느꼈던 검성의 기세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우웅.

    운현의 마음에 즉시 검이 떠올랐다.

    그리고 운현은 보았다.

    파라락.

    빙설의 옷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빙설 스스로 뿜어낸 기세가 그녀의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빙설이 화가 난 모양이군요.”

    소궁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운현은 빙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요. 빙설은 북해가 키운 비장의 한 수예요. 아무리 당신이 낙일의 주인이라 해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운현은 왜 빙설이 이런 기세를 뿜어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빙설은 이미 진검을 들고 있는데 운현이 목검을 꺼내 들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했으니 말이다.

    ‘역시.’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는 빙설을 목검 너머로 바라보며 운현은 생각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북해가 키운 비장의 한 수라는 말이 전혀 부족하지 않은 기세였다.

    저런 눈빛과 기세를 가진 사람을, 비록 그녀 스스로 감추고 있었다 해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허나 지금은 자신의 안목이 옳았음을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락.

    “낙일의 주인에 대한 예의로서.”

    낯선 목소리와 함께 빙설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가 느껴지는 그녀의 기세에 운현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빙설의 말이 끝나는 것과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동시였다.

    쉭.

    ‘엇!’

    그녀의 모습을 놓친 운현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지금도 운현의 피부를 찔러 오는 살기가, 그녀의 존재를 너무나도 분명히 알려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현은 지체 없이 목검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낯선 기운이 운현의 목검을 뒤덮었다.

    웅.

    그리고 강렬한 폭음이 그 뒤를 이었다.

    콰앙.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폭풍 같은 바람이 주위를 휩쓸었다.

    소궁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파라락.

    폭풍 같은 기세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렸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도, 얼굴을 돌리지도 않았다.

    북해빙궁의 소궁주로서 그녀는 두 사람의 격돌을 반드시 직접 지켜봐야 했다.

    휘릭, 탁.

    빙설은 뒤로 날아와 자신의 자리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사락.

    천천히 몸을 일으킨 빙설은 검을 뻗었다.

    그녀의 검은 달빛 아래 여전히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을 바라보는 운현의 얼굴엔 당혹감이 번져 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조금 전 빙설의 일검은 분명히 운현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이것은 운현이 아는 비무가 아니다.

    이 상황은 마치 목숨을 건 혈투, 혹은 생사결에 가까웠다.

    게다가 조금 전 운현은 분명 빙설의 움직임을 놓쳤다.

    아무리 갑작스러웠다곤 해도 치명적인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이건…….’

    익숙하지 않은, 그리고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운현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과연.”

    낭랑한 소궁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현은 목검을 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낙일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군요. 목검으로 빙설의 검을 막아 내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에요.”

    소궁주는 운현을 향해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는 드디어 운현의 가면을 벗겨 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동시에 빙설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운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녀도 분명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요행이 과연 얼마나 갈까요?”

    소궁주가 말했다.

    그건 운현의 동요를 더함과 동시에, 기울기 시작하는 이 승부의 승패를 확정 짓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빙설은 북해십이비, 그중에서도 바로 검성을 상대하기 위한 검이니까요.”

    검성을 상대하기 위한 검.

    그 말이 가진 의미는 컸다. 그것은 빙설의 경지가 검성과 견줄 정도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무인이라면 그 말에 의지가 꺾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눈앞에서 빙설의 실력을 본 이후라면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현은 달랐다.

    ‘응?’

    빙설의 경지가 대단함은 이미 운현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소궁주의 말 중에서 한 단어가 운현의 가슴 속 무언가를 툭 건드리고 지나간 것이다.

    ‘빙설이…….’

    그건 어쩌면 난데없는 생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운현으로선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검성을 상대하기 위한 검이라고?’

    빙설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소궁주의, 혹은 북해의 견해다.

    검성을 상대할 만하다는 것 역시 실제 겨루어 보기 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니 소궁주가 그렇게 자부한다 한들 검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운현은 바로 그걸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건…….”

    “당신은 나를 속였어요.”

    소궁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운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궁주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선언했다.

    “그 대가로, 당신의 목숨을 취하겠어요.”

    아득.

    소궁주의 입에서 새어나온 소리와 함께 그녀가 명했다.

    “빙설.”

    탓.

    소궁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빙설이 땅을 박차고 운현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이 섬뜩한 기운을 머금은 채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콰앙.

    격렬한 폭음이 다시 두 사람 사이에서 터져 나왔지만 빙설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쉬익.

    빙설의 검이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다시 운현을 향했다.

    운현의 목검 역시 원을 그리며 빙설의 검에 맞서 나갔다.

    콰아앙.

    검과 목검의 격돌이 가져온 충격은 사방을 뒤흔들었다.

    빙설은 그 기세에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몸을 실어 뒤로 솟아올랐다.

    휘리릭, 탓.

    공중으로 몸을 날린 빙설이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방금 전 두 번의 격돌이 거짓인 듯, 처음의 자세 그대로 빙설은 운현과 마주 섰다.

    그러나 이번에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빙설이었다.

    “후우우.”

    운현이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든 운현의 눈동자에 더 이상의 동요는 없었다.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 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나는 소궁주님을, 그리고 여러분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우우웅.

    운현의 목검에 낯선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의 목검이 빙설의 검을 상대할 수 있을지 운현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것은 그저 비무라 생각한 탓도 있었겠지만 운현 스스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에 검이 있는 한, 그리고 의형 일충현이 전해 준 내력이 있는 한 그런 걱정 따위는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슥.

    낯선 기운이 일렁이는 목검을 들어 빙설을 똑바로 향하며 운현이 말했다.

    “아직 검성과 비견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후우욱.

    강렬한 기운이 빙설을 향해 덮쳐 왔다.

    이제껏 없던 운현의 기세에 빙설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반면 운현의 눈빛은 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운현의 뜻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은.’

    담담한 눈빛으로 빙설을 바라보며 운현은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다.’

    빙설의 경지와 검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녀가 과연 검성과 비견할 만한가?

    소궁주의 말처럼 검성을 상대하기 위한 검이라 할 정도인가?

    그에 대한 운현의 답은 ‘아니다’였다.

    빙설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검성에겐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검법의 우열이나 내공의 고하를 따지기 이전의 어떤 본능 같은 확신이었다.

    운현의 마음속 검, 검성의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던 그 검이 빙설에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실이 운현을 혼란과 당혹감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스윽.

    빙설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운현의 변화를 누구보다 분명히 느끼는 사람은 바로 빙설이었다.

    달빛에 빛나는 그녀의 검은 여전히 운현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가볍게 움직일 수 없었다.

    달라진 것은 소궁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운현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 그 말에 반박하는 것은 오히려 빙설을 방해할 뿐임을 알 수 있었다.

    소궁주는 이를 악문 채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쏴아아.

    서호의 밤바람이 세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푸른 달빛이 검 끝에서 빛나고 마주 선 이들은 미동도 없이 침묵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검에 서린 낯선 기운은 지금 이곳이 생사의 비무가 벌어지는 곳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바삭.

    순간, 마치 도발이라도 하듯 빙설이 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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