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81화 (81/530)
  • 081화. 낙일의 주인

    “뭐, 뭐야!”

    연회장을 지키는 무사와 하인들이 소리쳤지만 이미 숫자에서 상대가 안 된다.

    그들은 그저 소리만 높일 뿐, 서른여 명의 청년 무인들은 거침없이 연회장으로 밀려 들어왔다.

    “뭐지?”

    “무슨 일이야?”

    용봉지회 참가자들인 각 파의 후기지수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난입한 자들은 애초부터 후기지수들에겐 관심이 없다는 듯 연회장 이곳저곳에 무리를 지어 앉았다.

    “다, 당신들은 뭐예요?”

    화려하게 차려입은 몇몇 아가씨들이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후기지수들만이 아니다.

    그들과 친교를 다지고자 하는 상단과 세가의 젊은이들 역시 연회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네놈들은 뭐냐!”

    화산파의 사마건이 내력을 담아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리자 난입한 청년 무인들이 반응을 보였다.

    “네놈들? 새파랗게 어린 자식이 말이 거칠군.”

    “뭐, 뭐라고?”

    사마건의 눈매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때 제갈세가의 제갈룡이 나섰다.

    “너희는 어디의 누구냐?”

    “훗.”

    정체를 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 대신 조소였다.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청년 무인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우리는 밥만 먹고 가면 그만이다. 이봐! 여기 주문 안 받나?”

    그는 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식사를 하러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놈들!”

    화산파의 사마건이 외쳤다.

    “참으로 안하무인이로구나! 감히 어디서…….”

    슥.

    사마건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청년 무인이 칼집을 들어 사마건에게 그 끝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경고하건데, 한 번만 더 이놈 저놈 했다가는 그 혀를 뽑아 주겠다.”

    청년 무인의 눈동자는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마건의 말문이 막힐 만한 기세였지만 옆에 있던 제갈룡은 아니었다.

    “참으로 호기롭군. 하지만 사마 공자가 화산파의 제자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겠지?”

    거대 문파의 이름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 제자를 직접 만나는 일은 대단히 드물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무림인들에게 화산파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구름위에 노니는 신선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제갈룡은 저들이 분명 놀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신은 너무나 쉽게 깨어졌다.

    “화산파? 흥.”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 무인은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화산의 쓰레기였군.”

    그는 제갈룡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러는 너는 또 어디의 쓰레기냐?”

    “너, 너 이노오옴!”

    사마건은 분노했다.

    문파가 모욕을 당했다. 그리고 자신을 쓰레기라 불렀다.

    여기서 분노하지 않으면 그는 화산의 제자로서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건의 분노는 지극히 당연했다.

    채앵.

    사마건은 거침없이 검을 뽑았다. 제갈룡 역시 자신의 손을 검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차창.

    난입한 서른여 명의 청년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서슴없이 검을 뽑았다.

    “엇!”

    지켜보던 각파의 후기지수들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저들의 태도에 이미 분노하고 있던 그들 역시 즉시 검과 도를 뽑았다.

    “쳐라!”

    “하아아아!”

    청년 무인들은 즉시 후기지수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최소한의 탐색이나 주저함도 없었다.

    후기지수들도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갑작스럽다해도 이미 검을 뽑는데 익숙한 젊은 후기지수들은 즉시 반격에 나섰다.

    “모두 조심하시오!”

    “꺄악!”

    연회장을 뒤덮은 함성과 비명 소리들.

    연회장은 순식간에 도검이 난무하는 곳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

    운현이 소궁주를 찾아낸 것은 서호 변을 한참이나 걸어간 후였다.

    아예 연회장과는 반대편으로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가 되어서야 운현은 저 멀리 서 있는 소궁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

    밤의 서호 변에 서 있는 소궁주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본래 아름다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보니 그야말로 한 폭의 미인도가 따로 없다.

    자신도 모르게 살짝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운현은 소궁주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운 학사님.”

    소궁주도 운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운현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미녀가 미소를 지으니 그야말로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다.

    “크흠.”

    소궁주에게 다가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서호의 밤풍경이 운현의 눈앞에 펼쳐지는데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는 아름다운 곳이군요.”

    “네. 그렇군요.”

    운현은 그녀의 여유로운 모습에 조금 의아해했다.

    ‘연회에는 안 갈 건가?’

    자신이 보기엔 벌써 늦었다.

    그런데도 소궁주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저, 그런데…….”

    연회에 안 가냐고 물으려던 운현의 말은 소궁주의 목소리에 끊어져버렸다.

    “연회는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사락.

    소궁주가 운현을 향해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마치 춤을 추듯 가볍게 돌아선 그녀는 매혹적인 눈동자로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어…….’

    그녀의 그런 모습은 운현의 예상보다 더욱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서호의 밤풍경보다 아름다워서 감히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운현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크흠. 저기, 그러니까 연회장에는 왜…….”

    가까스로 화제를 떠올려 묻는 운현에게 소궁주는 웃음을 흘렸다.

    “왜냐하면.”

    소궁주는 말했다.

    “지금 간다 해도 어차피 연회장에 남아 있는 것은 죽은 시신들 뿐일 테니까요.”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며 소궁주를 쳐다보았다.

    붉은 입술에 매혹적인 미소를 떠올린 소궁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운현은 차가운 무엇이 등을 타고 번져 가는 것을 느꼈다.

    소궁주의 눈동자는 그녀가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마치 얼음으로 된 칼날처럼 차가운 진실을.

    “그게 무슨…….”

    “만일.”

    운현의 물음은 소궁주의 목소리에 막혔다.

    “당신이 끝까지 나를 속이려 하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아직은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속이다니, 제가요?”

    운현이 물었지만 소궁주는 대답 대신 웃었다.

    어찌 보면 연인에게 장난치는 아가씨의 모습 같았지만,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장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 바로 당신이요.”

    소궁주는 결코 농담을 하는 것도, 운현을 놀리는 것도 아니었다.

    운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교차하며 냉정하고도 분명한 사실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그 말씀은.”

    운현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궁주께서 그 일을 계획하셨다는 뜻입니까?”

    “그래요.”

    소궁주는 시인했다.

    “내가 했어요. 그러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운현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것은 결코 질 나쁜 농담도, 허언도 아니다.

    “물론 당신이라면 막을 수도 있겠지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소궁주가 말했다.

    “그 전에 빙설을 상대해야 할 테지만 말이에요.”

    바스락.

    소궁주의 뒤에서 빙설이 모습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고 말없는 빙설의 모습.

    그러나 지금 그녀의 두 손에는 고풍스러운 검 한 자루가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슥.

    운현은 눈을 들어 빙설을 보았다.

    늘 느끼던 범상치 않은 기세가 이제는 더욱 확실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역시.’

    그녀, 빙설은 운현이 느낀 것처럼 빙혼보다 더욱 무서운 기세를 지닌 여인이었다.

    운현은 다시 소궁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그것은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소궁주의 얼굴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하.”

    허탈한 듯 소궁주가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차가운 한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운현은 분명히 보았다.

    “의외로군요. 설마 아직도.”

    아득.

    소궁주가 이를 악물었다.

    그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소궁주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소궁주의 분노는 거짓이 아니었다.

    운현이 그녀를 본 이래 처음으로 소궁주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소궁주님, 뭔가…….”

    오해가 있다고 하려던 운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차가운 눈동자로 소궁주가 말했다.

    “낙일의 주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요?”

    ‘아!’

    운현은 문제의 원인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낙일은 와룡헌에서 검성이 운현에게 주려던 검이다.

    문외한인 운현이 보기에도 결코 범상치 않았던 엄청난 검, 낙일.

    아마도 그 검과 연관하여 커다란 오해가 발생한 듯했다.

    “후.”

    운현은 다행이라는 듯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소궁주에게 말했다.

    “무언가 오해하셨군요. 낙일검은 분명히 돌려드렸습니다.”

    그러나 소궁주의 반응은 운현의 기대와 달랐다.

    소궁주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 땅에서 그 검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뿐입니다. 그 검의 전대 주인이었던 검성 이검학과 그리고 새로운 주인인…….”

    소궁주의 눈이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로 당신 운현.”

    소궁주의 붉은 입가에 어린 싸늘한 미소가 달빛에 반짝였다.

    “오늘, 북해가 낙일(落日)을 돌려받겠습니다.”

    속삭이듯 매혹적인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번져가는 것은 바로 희열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운현은 경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검을 돌려받겠다는 소궁주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검성이라고? 그가?’

    자신에게 검을 주었던 이가 바로 검성 이검학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검성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넘치도록 납득이 갔다.

    멀리서 뿜어낸 기세만으로 후기지수들을 압도해 버린 사람.

    운현이 이제껏 만난 모든 고수들을 단번에 별것 아닌 경지로 만들어 버린 그가 검성이 아니면 누구랴?

    문득 운현은 와룡헌에서 만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승과 함께 묵묵히 차를 음미하던, 회한이 서린 그 깊은 눈동자가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후후.”

    운현을 상념에서 일깨운 것은 소궁주의 웃음소리였다.

    “정말 대단하군요.”

    소궁주가 운현에게 말했다.

    “그 모습은 이제껏 알던 학사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군요. 모든 것이 드러난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태연하다니, 정말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어요.”

    운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소궁주는 운현이 이제껏 그녀를 속였다 생각하고 있었다.

    “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운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당신의 진심이 어떠했든.”

    소궁주의 눈동자에 단호한 빛이 떠올랐다.

    “지금 당신에게 용봉지회 참석자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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