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난입
운현이 한창 짐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응?”
문득 문 쪽에서 들린 인기척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운 학사님, 안에 계신지요?”
그건 소궁주의 목소리였다.
운현이 문을 열자 문 밖에 소궁주와 빙혼, 시녀 빙설이 서 있었다.
“아, 어쩐 일로 이렇게…….”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같은 일행이라 숙소는 가까운 편이다. 하지만 소궁주가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소궁주는 운현을 보고는 반갑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
“운 학사님.”
운현은 순간 움찔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소궁주가 미소를 머금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 웃는 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이라서 오히려 경계심이 든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진짜 물러서지는 않았지만.
“지금 떠나시려는 건가요?”
소궁주가 물었다.
운현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용봉지회도 사실상 끝이고, 이제 제가 필요한 일이 없는 것 같아서…….”
이곳에 와서 운현이 한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했었으니까.
“아, 그러시군요.”
소궁주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한 가지 더 도움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궁주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소궁주가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용봉지회가 끝난 후에 참가자들을 위한 연회가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인 행사는 아닙니다만.”
말하자면 참가자들끼리 뒤풀이를 하는 것이다.
강호 무림은 칼과 무공만이 아니라 인맥과 연줄도, 아니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한 곳이니 말이다.
“운 학사님께서 저희와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셨군요.”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도 비공식 일정이라 이렇게 부탁을 하는 듯했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그런 비공식적인 자리야말로 진짜 인맥과 연줄이 형성되는 곳이 아니던가?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소궁주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운현은 다시 한 번 움찔했다.
‘윽.’
소궁주의 미모와 매력은 대단하다.
그녀가 웃자 마치 활짝 핀 얼음 꽃을 보는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여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운현에겐 너무나 자극이 컸다.
덕분에 소궁주가 이제껏 무림맹의 공식적인 연회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도, 운현에게 이상하리만큼 깍듯이 예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소궁주는 운현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막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혹시 제가 늦는다면 아마도 서호 남쪽 부근을 산책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 네…….”
사박, 사박.
우아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궁주가 멀어져 가고 빙혼과 빙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잠시 서 있던 운현은 문을 닫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늦으면 서호 남쪽에 있을 거라고?”
늦을 것 같으면 기다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왜 자신이 서호 남쪽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 준 것일까?
“찾으러 오라는 뜻인가?”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모시러 오라는 뜻 같지는 않은데,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뭐, 어차피.”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면 끝이다. 그리고 나면 다시 서생 시절처럼 무림맹 서기 시험을 준비하는 익숙한 일상이 이어지리라.
“무림맹 서기라…….”
새삼 주위를 돌아보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휴가는 잘 주려나?”
일충현 형님의 유품은 운현에게 있다. 대단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직접 가족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를 매만졌다.
옷 안쪽에 걸어놓은 반지의 익숙한 감촉이 손 끝에 느껴졌다.
서기가 되면 좀 늦어질 수도 있겠지만, 휴가를 받아서라도 반드시 갈 작정이다.
탁.
문이 닫히고 운현은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손길은 한결 여유로웠다.
용봉지회 공개 비무를 맞이하는 무림맹은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운현과 북해빙궁의 숙소 주변은 유독 적막하기만 했다.
***
화려한 누각은 흥겨움이 가득했다.
이미 해가 지고 서호에 어둠이 깔렸지만, 누각에 걸린 오색 등은 오히려 서호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고 있었다.
누각에 가득한 후기지수들도 홀가분한 심정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하하. 역시 대협이 될 분의 자질은 남다르군요.”
“그런 것을 일컬어 그릇이 크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과 멋진 복장을 한 귀공자들이 한껏 젊음을 뽐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각 입구에 서 있던 운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쩐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항주에 도착해서도 저런 광경을 보았다.
그래도 그때는 이해라도 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보기 싫을 뿐이다.
‘소궁주는……, 없군. 아직 안 왔나?’
운현은 용봉지회 참가자들을 위한 비공식 연회가 열리는 누각에 와 있었다.
이미 연회가 시작되었지만 소궁주는 물론, 빙혼이나 빙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늦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니…….’
두리번거리던 운현은 문득 아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
그녀는 바로 모용미였다.
단아한 그녀의 옷은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성숙한 매력을 지닌 모용미와 정말로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남궁세가의 아가씨도 있군. 그리고 파진한도.’
운현은 눈에 익은 사람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파진한은 물론이고 그와 첫날 비무를 했던 남궁비연이라는 아가씨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파진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몇몇 청년들이 파진한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표정들이 사뭇 환하다.
‘역시.’
모두가 남궁상혁처럼 무례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가 이해관계에만 얽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잘됐군.’
운현은 파진한의 밝은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기가 잘된 것처럼 뿌듯하다.
‘자, 그럼 북해 일행만 오면 되는데……. 역시 찾으러 가야 하나?’
결국 소궁주를 ‘모시러’ 가기로 한 운현은 짐과 목검을 들고 전각을 나섰다.
저벅.
화려한 전각을 벗어나자 밤의 서호가 운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하늘과 서호에 뜬 두개의 달, 그리고 아름다운 항주의 불빛이 서호에 물결에 반짝이며 부서지고 있었다.
‘……항주 무림맹의 서기직이라, 어쩌면 꽤 좋을지도 모르겠군.’
귓가를 어지럽히던 소음은 어느새 사라졌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운현은 서호의 흥취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응?’
그러나 운현의 흥취는 길지 못했다.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 빙혼.”
나타난 사람은 빙혼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소궁주님은…….”
저벅.
발걸음을 멈춘 빙혼이 말했다.
“소궁주님께서 뵙기를 원한다 하셨소.”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빙혼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소궁주님께서는 서호 남쪽에 계시오.”
저벅.
빙혼은 그대로 다시 발길을 옮겨 운현을 지나쳐 갔다.
스치는 그에게서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지만, 본래 늘 긴장을 유지하던 빙혼인지라 운현은 그러려니 했다.
저벅, 저벅.
빙혼은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운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법 많은, 또다른 사내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응?’
“하하하.”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운현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의복이며 인상은 흔히 볼 수 있는 무인들 같았는데, 풍기는 기세로 보아 적지 않은 수련을 쌓은 듯 했다.
‘제법 인상들이 강렬한데? 일행인가?’
단순한 일행치고는 꽤 많았다.
언뜻 보기에도 서른 명 가까이 되어보였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항주다.
‘뭐, 서원 서생들도 단체로 오는 곳이니 문파 제자들이 함께 오지 말란 법도 없겠지.’
운현은 가볍게 그렇게 생각했다.
청년들은 운현에겐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쳐 갔다.
하지만 문득, 운현은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나 기세가 어쩐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
하지만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다.
청년 무인들은 그대로 운현을 지나쳐 멀어져 갔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운현은 몸을 돌렸다.
그보다는 지금 소궁주를 찾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니까 아침에 소궁주가 했던 말은 결국 찾아오라는 뜻이었군.’
그럼 그냥 오라고 할 것이지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운현은 서호 변 남쪽 어딘가에 있을 소궁주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등에 진 짐과 손에 든 목검이 덜렁거렸지만 서호의 밤 풍광이 운현의 걸음을 사뭇 가볍게 했다.
그 탓에 운현은 방금 지나친 청년 무인들이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
“어허, 손님! 왜 이러십……. 어이쿠!”
콰당.
한창 무르익어 가던 연회의 분위기를 깬 것은 요란한 소음과 누군가의 신음소리였다.
용봉지회 참가자들은 일제히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소란이 난 것은 연회장 입구였다.
연회장을 관리하는 뚱뚱한 중년 사내가 나뒹굴고 있었고, 십여 명의 젊은 사내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타다닥.
누각에서 일하는 젊은 사람들과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즉시 입구로 달려갔다.
칼을 찬 중년 무사는 눈을 부라리며 청년들에게 말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목소리며 태도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자리가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손님이면 손님답게 행동하셔야죠.”
연회장을 지키는 무사의 태도는 고압적이었다.
그러나 난입한 청년 무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리가 없다고?”
청년 무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건 자리가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넓은 전각이다.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 도련님들이로군. 여기 계신 분들이 누군지 아시오?”
“누구면, 뭐?”
안하무인격인 청년의 태도에 연회장을 지키는 무사도 화가 났다.
“자네들 지금……. 컥.”
호통을 치려던 무사는 칼도 뽑지 못한 채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시비를 벌이던 청년 무인이 갑자기 그의 명치를 가격한 것이다.
쿵.
쓰러진 무사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으악!”
하인들이 급히 뒤로 물러서고, 연회장을 지키는 무사들도 안색이 변해 칼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들은 칼을 뽑지 못했다.
저벅, 저벅.
난입한 청년 무인들은 십여 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디에 있었는지 다른 청년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은 순식간에 서른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대로 칼을 뺐다간 연회장 무사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