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그녀의 계획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소궁주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건 너무 이른 반응이었다.
사락.
앉아 있던 소궁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소궁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저도 궁금하군요. 어째서 정당한 비무의 승패가 누군가의 말 몇 마디에 없던 일로 되어 버리는지 말이에요.”
그녀의 치명적인 미소는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러니 학사님의 말씀은 제 뜻을 대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어디까지나 우연히, 말이지요.”
“우연히라…….”
매화검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은 우연이라지만 사실상 북해빙궁이 운현을 보호하고 나선 것이다.
“궁금한 것이오? 아니면 공식적으로 질의를 하는 것이오?”
매화검 영호준이 다시 물었다.
“궁금한 것뿐입니다.”
소궁주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것은 이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자, 운현이 더 이상 항의하는 것을 제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쯤에서 덮자는 뜻이다.
매화검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러면 이 문제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지.”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 말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궁주가 발을 빼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이상 더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이곳에 초청받은 사람도, 정식 참가자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운현은 참담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니구나.’
아무것도 아니다.
북해빙궁이 아니면 부조리와 불합리에 맞서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고, 창룡검주라는 허명 뒤에 숨지 않으면 조언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
지금도 비무대에 서 있을 파진한을 바라볼 자신이, 운현에겐 없었다.
사박.
운현은 입술을 깨문 채 몸을 돌렸다.
“언젠가.”
뒤에서 남궁상혁의 조롱 가득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남궁세가의 땅을 밟는 날이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남궁상혁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운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소?”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마음이 무겁다지만 저런 자에게까지 고개 숙인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더없이 당당한 눈빛으로 운현은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자부심도 없는 자의 검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으니까.”
남궁상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운현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매화검 영호준이 손을 들어 남궁상혁이 더 이상 무어라 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으드득.
남궁상혁이 이를 갈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저벅.
운현은 소궁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비록 끝까지 운현을 지지하진 않았으나 그녀가 자신을 도와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천만에요.”
소궁주는 배시시 웃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학사님은 저희가 예를 갖추어 정식으로 모신 분이니까요.”
아마도 북해의 풍습인지 모르겠지만 운현은 고마움을 느꼈다.
소궁주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잠시 이 자리를 떠나 계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녀의 요청은 현명했다. 그리고 운현 역시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요.”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파진한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볼 낯이 없다.
저벅, 저벅.
입술을 깨문 채 침통한 표정으로 운현은 자리를 떴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남궁상혁의 원독 가득한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렇게 운현이 떠나고 난 뒤에도 비무대에는 사뭇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자, 그럼 다음 비무를 진행하도록 하지.”
매화검 영호준이 후기지수들을 진정시켰다.
“그럼 다음 순서는……, 이런.”
영호준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걸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그는 남궁상혁과 북해빙궁의 소궁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음 비무의 순서는 남궁상혁과 북해빙궁이었다.
“흥!”
남궁상혁은 잘되었다는 듯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비무대로 성큼 올라섰다.
반면 소궁주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영호준을 향해 말했다.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대리인을 내세우겠습니다.”
소궁주는 긴 여행에 몸이 불편함을 이유로 비무에서 대리인을 내세우겠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그 경우 비무 결과 또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어차피 북해빙궁이 무림맹 소속도 아니니 상관은 없었다.
“알겠소.”
매화검 영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소궁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확인?”
매화검 영호준이 반문하자 소궁주는 짐짓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해에서 검을 마주한다는 것은 대단히 신성한 행위입니다. 저는 이 비무에서 앞서와 같은 오해나 견해 차이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매화검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므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비무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합니다. 북해에서는 상대의 목을 자르는 경우를 말합니다만…….”
“그건 좀 곤란하오.”
매화검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목을 자른다면 그건 이미 혈투이자 생사결이 아닌가?
무림맹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지요?”
“음, 글쎄?”
매화검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비무의 승패란 사실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그걸 갑자기 구체적으로 물으니 오히려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혹시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면 될까요?”
소궁주의 말에 매화검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소만.”
“그렇군요.”
소궁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빙혼.”
“네.”
그녀의 비무를 대리할 빙혼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들으셨지요? 상대인 남궁 공자께서.”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소궁주는 말을 이었다.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실 때까지 입니다.”
빙혼의 냉막한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빙혼은 고개를 들었다.
비무대 위에 있던 남궁상혁의 표정은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저들은 남궁상혁이 지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 북해빙궁 따위가 감히…….”
저벅.
빙혼의 묵직한 발소리에 남궁상혁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저벅, 저벅.
비무대로 올라가는 빙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궁주는 가느다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매혹적인 붉은 입술위에 머금은 미소는 더없이 차가웠다.
***
항주에 새벽이 밝았다. 그리고 용봉지회 또한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있을 용봉지회 공개 비무를 기대하며 새벽을 맞이했지만, 몇몇 사람에게 용봉지회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그러했다.
그녀에게 오늘 새벽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스락.
소궁주의 하얀 손 안에서 얇은 서찰이 소리를 냈다.
서찰을 내려다보는 소궁주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그녀의 뒤에 선 빙설과 빙혼 또한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다.
“빙혼.”
“네.”
빙혼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소궁주는 나지막하게, 그러나 조금도 주저함 없이 말했다.
“설영대를 대기시키도록 하세요.”
빙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설영대는 본래 이 서찰이 오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찰이 온 이상 설영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빙혼은 묻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이 입을 열 영역이 아니다.
“계획대로 움직이되, 내가 명을 내리기 전에는 절대 마지막 단계로 이행하지 마세요. 알겠지요?”
“네.”
빙혼은 고개를 숙여 소궁주의 명을 받들었다.
소궁주는 그런 빙혼을 내려다보며 문득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라고 묻고 싶은가요?”
더없이 친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빙혼은 소름이 돋았다.
북해에서 그녀가 이런 표정을 할 때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목숨이 사라졌다.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빙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어째서라고 묻는 대신 결과가 가져올 파장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설영대의 ‘계획’ 대상은 무림맹 소속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이다.
게다가 그중에는 거대 문파의 자제들 역시 있다.
설영대가 소궁주의 본래 계획대로 임무를 완수한다면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후후.”
소궁주에게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호 무림에서 무인들 간의 충돌은 흔한 일이지요.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라면 작은 다툼으로 칼을 빼는 일도, 그 결과 목숨을 잃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에요.”
피식 웃음을 머금으며 소궁주가 말을 이었다.
“설령 그것이 용봉지회를 마친 후기지수들에게 벌어진 참극이라 해도요.”
빙혼은 소궁주가 결코 뜻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았다.
슥.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든 빙혼은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갔다.
“빙설.”
소궁주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묵묵히 그녀 옆을 지키고 있던 빙설이 부름에 답해 고개를 숙인다.
“이제 그대의 차례예요.”
소궁주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빙설은 특유의 그 변함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그 말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항주는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오늘이 용봉지회 마지막 날이자 최종승자가 결정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물론, 강호 무림에 이해가 얽혀 있는 자들, 그리고 빼어난 후기지수를 보려는 사람들이 모두 항주로 몰려들었다.
가슴이 들뜨는 것은 용봉지회에 참가한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봉지회에서 용봉으로 선발되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컸다.
그저 한 문파의 후기지수가 아니라 무림맹의 이름으로 강호 무림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젊은 후기지수라면 누구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무공을 익힌 모든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누군가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또 누군가는 그 주인공을 보기 위해 항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용봉지회의 꽃이라는 그 마지막 날, 운현은 숙소에서 홀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음, 이걸 어쩐다?”
값싼 천으로 둘둘 휘감은 목검을 들어보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파진한을 만나기 전에 항주 시내에서 구한 것인데 아직 한 번도 못 써 본 것이다.
“돈 주고 산 건데 두고 가기도 아깝고, 가지고 가자니 이제는 쓸데도 없는데…….”
운현은 오늘로 북해빙궁을 돕는 일을 그만둘 작정이었다.
사실은 더 이상 할 일도 없었다.
북해빙궁이 스스로 비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전 비무는 대리자였던 빙혼이 일방적으로 이겼다고 하는데, 정작 정식 비무는 소궁주가 불참을 선언해버렸다.
덕분에 패배한 남궁상혁이 다시 기회를 얻었다는 것도, 그러나 빙혼에게 입은 부상으로 기권하고 말았다는 것도 운현에겐 관심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로써 북해빙궁의 일도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운현도 짐을 싸는 것이다.
‘나가면 일단 항주 시내에서 값싼 숙소를 얻어야지.’
그곳에서 운현은 무림맹 서기 시험을 준비할 작정이었다.
말하자면 다시 서생 시절로 돌아간 셈이다. 그러니 돈을 아껴야 한다.
“아까우니 가져가자.”
운현은 목검을 챙겨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