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도둑맞은 승리
파진한의 검술은 오히려 다른 후기지수들보다 좋았다.
다만 젊은 혈기에 모욕당한 것이 분하여 스스로 궁지에 몰렸을 뿐이다.
물론 운현의 지적처럼 가문의 검에 대한 깊은 통찰도 부족했었고.
‘그래도 열심히 했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자존심 강하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일단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자 파진한의 탁월한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각 문파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들이다.
지금 당장 대단한 고수는 아니어도, 그들의 재능만은 동년배의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러니 파진한이 놀라보게 달라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후후.’
운현은 흐뭇한 마음에 미소를 머금었다.
파진한의 검에서는 그야말로 대해의 기상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때로는 빠르게, 그리고 묵직하게 흐르는 파진한의 검은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저렇게 되기까지, 비록 운현 자신이 도왔다지만, 파진한이 흘렸을 땀은 얼마나 많았으랴?
그 결과가 지금 모두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길어야 십여 합 정도인가?’
운현에겐 이미 이 비무의 결과가 보이고 있었다.
물론 파진한이 승리한다 해서 운현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운현은 뿌듯했다.
며칠간 애썼던 자신의 노고가 넘치도록 보답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운현의 예상처럼 비무는 끝이 났다.
탁.
파진한의 검이 멈췄다.
그 검끝은 정확히 제갈룡의 가슴 한복판에 가 닿아 있었다.
웅성웅성.
운현으로서는 예상된 결과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파진한에게는 그의 승리를 기뻐해 줄 만한 다른 동료조차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박수도, 환호도 없이 그저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일어나고 있었다.
슥.
파진한은 검을 거두었다.
“다음에는 네 검이 더 날카롭기를 바란다.”
그렇게 제갈룡에게 한마디를 던진 후, 파진한은 몸을 돌렸다.
짝짝짝.
몇몇 사람들로부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파진한은 묵묵히 비무대를 내려왔다.
그러다 한순간, 그의 시선이 북해빙궁의 일행들, 그중에서도 운현을 향해 날아왔다.
‘응?’
운현은 가슴이 뜨끔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쳤던 것이다. 그리고 파진한의 입가에 스친 것은 분명 미소였다.
운현은 당혹스러웠다.
‘설마 탄로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누군가의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나 남궁세가의 남궁상혁은 매화검 영호준 대협께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합니다.”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사람은 남궁세가의 청년이었다.
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의라고?”
매화검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상혁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매화검이 아닌 주변의 다른 후기지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남해검문의 검법이 제갈세가에 미치지 못함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제갈룡 공자는 많은 협객행(俠客行)으로 강호에 그 명성이 높은 반면, 남해검문의 저자는 첫날 우리 남궁세가의 사매에게 패해 바닥을 뒹굴지 않았습니까?”
그건 다분히 억지였다.
가문의 검법이 우위라 하여 늘 이기란 법도 없고, 제갈룡의 명성이 높다는 것 역시 과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파진한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것 또한 사실이어서,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번져나갔다.
“만일 실력을 숨긴 것이었다면 어찌 첫날부터 치욕스럽게 바닥을 뒹굴었겠습니까?”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남궁 공자?”
매화검 영호준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이제 와서 무어라 한들 비무의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남궁상혁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저자가 무언가 암수(暗手)를 쓴 것이 분명합니다.”
“암수라고?”
매화검 영호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불평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비겁한 암수를 썼다면 전혀 의미가 다르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비무, 그것도 다름 아닌 용봉지회에서 암수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증거가 있나?”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더 말하려던 남궁상혁의 목소리는 매화검 영호준의 말에 의해 끊어졌다.
“증거가 없다고?”
매화검 영호준은 남궁상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남궁상혁이 움찔했다.
“그렇다면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자네가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두고 싶군.”
매화검의 목소리는 서늘한 한기마저 담고 있었다.
무림맹은 절대 함께할 수 없으리라 여겨지던 문파들을 하나로 엮어 낸 유일무이한 문파 협의체다.
모든 일에 협의와 공조를 중요하게 여기는 무림맹도 두 가지만은 결단코 용서하지 않는다.
하나는 무림맹을 거역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무림맹 문파들 간의 반목을 고의로 조장하는 행위다.
증거가 없다는 말에 대해 매화검 영호준이 경고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매화검 영호준의 매서운 눈빛에 남궁상혁이 물러섰다.
“허, 그런 뜻이 아니라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소리를 흘리는 매화검 영호준에게 남궁상혁이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자가 암수라도 쓰지 않는 한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암수를 쓴 자가 증거를 남겨 두었을 리 없습니다.”
암수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증거는 없다. 왜냐하면 증거가 남지 않도록 암수를 썼기 때문이다.
남궁상혁의 말은 전형적인 음모론이었다.
매화검 영호준은 더 이상 이런 말장난을 하고 싶지 않았다.
“증거를 가져오게. 아니면…….”
“저는 정식으로 재비무를 요청합니다.”
갑작스러운 남궁상혁의 말에 매화검 영호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남궁상혁은 무림맹에서 주최한 용봉지회의 참가자다.
그가 정식으로 요청한 것은 아무리 매화검 영호준이라 해도 함부로 묵살할 수 없다.
매화검 영호준은 처음부터 남궁상혁이 이 상황을 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요청인가?”
“그렇습니다.”
남궁상혁이 당당하게 말했다.
만일 남궁상혁이 비무의 당사자였다면 그의 항의는 패배자의 억지나 변명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남궁상혁은 엄연히 제삼자다.
그 사실이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후우.”
매화검 영호준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패배한 제갈룡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파진한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아, 착각은 하지 말도록. 나는 무림맹에 전달하겠다는 것이지 자네의 말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매화검이 주위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한번 형성된 분위기를 뒤집지는 못했다.
파진한의 승리에 의혹이 덧씌워진 것이다.
남궁상혁은 득의한 표정으로 말했다.
“용봉지회의 비무는 그 승패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파의 어른들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실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매화검 영호준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남궁상혁의 요청은 일단 무림맹에 보고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것은 사실여부를 떠나 정치적 문제가 된다.
제갈세가가 남해검문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정치적 문제 말이다.
물론 증거가 없으니 재비무는 없겠지만 ‘공평’해야 한다며 이번 비무 역시 무효로 처리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 매화검이 실소한 것도 당연했다.
사뭇 무인의 기상을 가진 양 말하는 남궁상혁이야말로 지극히 정치적이고 계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해검문 파진한 공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의혹을 해소하고 떳떳이…….”
남궁상혁의 뻔뻔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바로 그때였다.
“불가하오!”
분노한 한 줄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남궁상혁의 말을 끊어버리고 터져 나온 목소리의 주인공, 그는 바로 문사 차림의 운현이었다.
“이는 부조리하며 또한 불합리하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운현의 눈동자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한줌의 주저함조차 없었다.
본래 문사는 유약하다.
그러나 부조리하며 불합리하다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고집불통인 자들이 바로 문사들이다.
자신들이 배운 성현의 말씀을 진리라 믿는 만큼, 이치에 맞지 않다 여긴 것들에 대해 그냥 물러서는 경우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죽어 간 충신들 대부분이 문사들이라는 것만 봐도 명백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도 세파에 물들지 않은 문사들이나 가능한 모습이기도 했지만, 운현이 머물던 창룡전이야말로 자금성의 외딴섬이자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곳이 아니었던가?
“이 비무는 모든 사람이 직접 본 바이며 그 결과 또한 명명백백하오! 그런데 어찌 헛된 말 몇 마디로 무인의 명예를 빼앗으려 든단 말이오!”
운현은 참을 수가 없었다.
파진한은 비무대를 내려오지 못한 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가 모욕감을 떨치기 위해 검을 휘두른 그 날들을, 그 짧은 시간에 놀라운 성취를 보이기 위해 흘려야 했을 피땀을, 그리하여 거머쥔 이 뜻깊은 승리를 어찌 말 몇 마디로 도둑질해 간단 말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운현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면 그것은 묵묵히 충성과 절개를 지키고도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어야 했던, 의형 일충현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스스로를 감히 무인이라 칭할 수 있단 말이오!”
운현의 일갈은 통렬했다.
그러나 그 통렬한 지적이 마음을 울린 사람은 많지 않았다.
“네놈은 누구냐!”
남궁상혁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운현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답했다.
“나는 운현이오!”
“운현? 허!”
남궁상혁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곧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문사 따위가 무얼 안다고 나서는 것이냐!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그 일개 문사조차 무인의 자부심과 명예를 알거늘!”
운현은 손을 들어 남궁상혁을 똑바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찌 당신은 검을 들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
“뭐라고!”
남궁상혁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명문세가의 귀한 자제로 자라난 그가 언제 이런 모욕을 당해 보았던가?
그것도 다른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가득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으드득.
남궁상혁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자신의 검으로 향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춰라.”
지켜보던 매화검 영호준이 말했다. 그러나 화가 치밀 대로 치민 남궁상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허나 대협! 이자는…….”
“내가 분명 멈추라고 했는데.”
매화검 영호준은 남궁상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듣지 못했나?”
영호준의 눈동자는 더없이 서늘했다.
화를 내던 남궁상혁은 갑자기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 안색이 굳었다.
“그리고.”
영호준이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이라 하셨소? 그러면 운 학사님의 지금 그 발언은.”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영호준의 말이 뒤를 이었다.
“북해빙궁의 공식적인 뜻이라 보아도 좋소?”
운현은 아차 싶었다.
자신은 용봉지회의 정식 참가자가 아니다.
초청을 받은 적도 없고 다만 북해빙궁의 일행으로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운현은 이 자리에서 독자적인 발언권이 없다고 해도 좋았다.
이치와 사리를 따지는 문사에게 이것은 대단히 치명적인 지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