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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77화 (77/530)

077화. 닷새 전

용봉지회의 마지막 비무가 시작되기 닷새 전, 운현은 무림맹을 나섰다.

출입 검사는 철저했지만 운현의 신분에 대해 무어라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해가 지고 등불이 불을 밝히는 항주 거리를 지나며 운현은 보아두었던 상점에서 목검 한 자루를 구했다.

천으로 둘둘 말아 쥔 목검을 들고 운현은 서호를 향해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서호의 풍광을 음미하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훌륭한 관리가 백성을 위해 쌓았다는 제방을 살펴보기도 했다.

해가 지고 서호의 등불이 아름답게 반짝일 때, 운현은 자신이 수련하던 공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적당히 큰 나무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또 다른 사람이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알아차린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천을 풀고 가져온 목검을 손에 쥐었다.

저벅.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사뭇 인상적인 그는 신중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청년은 입을 열었다.

“나는 남해검문의 파진한이오.”

파진한은 사뭇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게 서찰을 보낸 이는 모습을 드러내시오.”

그가 노려보는 방향은 정확히 운현이 있는 곳이었다.

‘역시.’

운현은 그가 자신의 기척을 감지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운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반쯤 눈을 감으며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웅.

그의 부름에 응하여 마음의 검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락.

운현은 어둠 속에서 목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마음속 한 자루 검이 운현의 손에 들린 목검과 하나가 되었을 때.

후욱.

날카로운 기세가 파진한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헉!’

어둠 속을 경계하던 파진한은 화들짝 놀랐다.

검을 뺄 여유조차 없었다.

마치 시퍼런 칼날이 눈앞으로 짓쳐드는 것 같은 강렬한 위기감이 온몸을 내달렸다.

‘설마.’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며칠 전 일이 스쳐 지나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각 파의 후기지수들을 단번에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압도적인 살기.

파진한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 검성이십니까?”

잠시 후, 어둠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다.”

목소리는 젊었다.

짐짓 묵직하게 꾸몄지만 본래의 음성을 숨기려 한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검성이 아니다.”

“그, 그럼 누구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파진한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설마 우리 남해검문에 원한을 가진 자인가?’

강호 무림은 은혜와 원한으로 어지러이 얽혀 있는 곳이다.

용봉지회에 참석하는 남해검문의 후기지수를 향해 원한을 풀려는 사람이 없으리라곤 장담하지 못한다.

만일 그렇다면 서찰 한 통에 이끌려 이곳까지 나온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 수 없다.

파진한이 스스로의 경솔함을 자책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너의 검은.”

어둠 속에서 상대가 말했다.

“남해의 검이 아니다.”

후우웅.

그 말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파진한을 향한 날카로운 기세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 기세는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파진한의 안색이 단번에 파랗게 변했다.

으득.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으며 파진한이 물었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말하는 것만으로도 파진한은 필사적이었다.

그저 기세만으로 자신을 압도하는 상대의 정체에 대해서는 감히 의문을 가질 여지조차 없었다.

“허면.”

어둠 속의 그가 말했다.

“어찌하여 네 검에는 대해(大海)의 기상이 없느냐?”

쿵.

그 순간, 파진한은 무엇인가 머리를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해의 기상.’

남해검문의 검법은 쾌검이다.

해남도의 거친 파도를 정면으로 헤치며 살아가는 강인한 이들의 검법.

그래서 남해의 검법은 그 모습이 마치 몰아치는 파도와 같고, 그 기세가 거센 폭풍우 같다.

이것이 바로 파진한의 부친이, 그리고 그의 조부가 항상 말해 오던 남해검문의 정수이자 극의다.

‘아.’

파진한은 그제야 상대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숨어 있으나, 그의 의도는 이미 명백했다.

털썩.

파진한은 무릎을 꿇었다.

“부디 이 어리석은 자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상대는 파진한의 적이 아니다.

가문의 원수도, 원한을 가진 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해검문의 극의를 이처럼 정확하게 알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쿵.

파진한은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흙이 그의 머리를 더럽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정녕 가르침을 원하느냐?”

“네, 그렇습니다.”

파진한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대는 자신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정체도 여전히 모르는 채다.

그러나 그는 남해검문에 분명한 호의를 가진 자다.

어쩌면 파진한이 모르는 은혜를 갚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호 무림은 원한만큼 은혜도 무수히 얽혀 있는 곳이니까.

“내일.”

사뭇 묵직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너에게 또 다른 서찰이 갈 것이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니, 나머지는 너에게 달렸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멀어지려는 것이 느껴졌다.

“대인!”

파진한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그 행동을 끝맺지 못했다.

후욱.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살기가 파진한의 목에 가 닿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시퍼런 칼날이 당장이라도 목을 찌를 것 같은 기세였다.

“인사는 필요 없다. 은혜라 여기지도 마라.”

사뭇 냉정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다만 검의 길[劍道]을 가는 자로서 한마디 조언을 던진 것뿐이다.”

‘검의 길?’

파진한의 눈에 다시 의혹이 번져 갔다.

검을 드는 이는 무수하다. 인정받을 만한 성취를 이룬 사람도 많다.

그러나 현재 강호 무림에서 진정한 검의 길을 걷는다고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바로 검성 이검학.

“정녕 검성이 아니십니까?”

파진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다.”

잠시 후, 다시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천외비처(天外秘處)에서 온 자다.”

그 명호를 알리는 데 거리낌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서찰에 적혀 있는, 내일 아침이면 파진한이 받아 볼 서명이니까.

저벅.

그 대답을 끝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

그러나 파진한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을 누르던 기세는 이미 사라졌지만 풀려버린 다리가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

파진한에게서 충분히 멀어진 후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뒤를 살펴보았지만 그가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후, 그래도 막무가내로 덤비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운현은 한 손에 든 목검을 들어보며 중얼거렸다.

제일 걱정했던 것은 자신이 기세를 뿜어냈을 때 파진한의 반응이었다.

어쩌면 무턱대고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히 파진한은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세로 압박하는 것도 생각보다 잘된 것 같고.’

보이지 않는 기세를 뿜어내 상대를 압도하는 것은 바로 검성이 했던 방식이다.

문제는 운현도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사람 같은 기세는 무리지만.’

운현은 생각했다.

그때 검성의 기세에 마음의 검이 반응했다면, 마음의 검 역시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운현은 서호를 찾아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시험해 보았다.

처음엔 서호에서 노니는 새들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날아가는 물새들에게 ‘마음의 검’을 시험한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운현의 예상대로였다.

자신도 보이지 않는 기세를 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잘될 줄은 몰랐지만.’

파진한은 새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도 무공을 익힌 무인.

자신이 파진한을 향해 마음을 검을 세울 때,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잘 마무리되었다.

‘오히려 무인이라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인지도 모르지.’

파진한이 갑자기 무릎을 꿇은 것은 예상외였다.

덕분에 그를 설득시키려고 준비했던 말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자신을 검성이라고 부른 것은 조금 의외였다.

“이제 할 일은 다했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고…….”

운현은 한숨을 섞어 그렇게 말했다.

생기는 것도 없는데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지만, 어차피 자기만족이니 남을 탓할 일이 아니다.

“결과는 이제 파 공자가 할 나름이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서찰에 적어 보냈다.

내일이면 파진한이 받아 볼 것이고, 그 내용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렸다.

“이제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겠군. 너무 번거로워.”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허점도 많은 계획이다.

만일 파진한이 달려들었다면 결국 운현은 정체를 드러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목검도 들고 있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잘 풀렸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사락.

들고 있던 목검을 다시 천으로 감싸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마음에 걸리던 일을 무사히 끝내고 나니 홀가분했다.

하지만 운현이 예상치 못하던 일도 있었다.

서찰을 받은 파진한이 바로 그 공터, 운현이 애용하던 그곳에서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서찰에 자극받아 열심히 수련하는 파진한을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때마침 무림맹 비무대도 사람이 많아져서, 결국 운현은 한동안 다른 곳을 찾아 헤매야 했다.

***

“하아!”

제갈룡의 검이 파진한을 노리고 빛을 뿜었다.

그러나 그 공격은 너무나 쉽게 파진한의 검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카앙.

“크윽.”

격돌 후에 신음 소리를 흘린 사람은 바로 제갈룡이었다.

팽팽해 보이던 두 사람의 비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세를 점한 사람은 바로 남해검문의 파진한이었다.

으득.

뒤로 물러나 제갈룡이 이를 갈았다.

마치 눈빛만으로도 파진한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지만 파진한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그가 경험했던 그 섬뜩한 기세에 비하면, 제갈룡의 것은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못했으니까.

“하아!”

쉬익.

제갈룡이 다시 검을 흩뿌렸다. 하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보며 운현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했군.’

운현은 속으로 파진한을 칭찬했다.

‘사흘 만에 저 정도라니. 하긴 본래 실력이 다른 이들보다 부족한 것도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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