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하아!”
끼기기긱.
검과 도가 맞부딪히며 귀에 거슬리는 파열음이 비무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귀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하!”
카앙.
검과 도가 다시 거리를 벌리고, 비무대 위에 선 두 사람은 다시 상대를 향해 각기 검과 도를 겨눈다.
“이 비무는 저 흑도회 출신의 청년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하군요.”
소궁주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반전시킬 만한 여지는 아직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상대방 역시 필사적이고, 아직 흐름이 완전히 넘어갔다고 하기는 힘드니까요.”
운현은 비무대 위에 선 두 청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나 운현이 ‘아직 여지는 남아 있다’고 말한 청년은 이미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벌써 포기하는 건가? 아직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데…….’
운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상황은 신입 금의위들의 비무에서도 자주 본 적이 있다.
저들의 차이는 운현이 보기에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작은 벽 앞에서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있었다.
물론 벽이란 누구나 절망스러운 것이지만, 그 앞에서 쉽게 포기하는 것도, 그 작은 차이를 넘었다 하여 거만한 것도 운현이 보기엔 만족스럽지 못했다.
‘으음.’
벌써 검 끝이 흔들리고 있는 저 청년에게 운현은 정말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었다.
용봉지회 같은 것이야 아무려면 어떠냐고 생각했던 것이 겨우 며칠 전이건만, 운현은 어느새 비무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다.
“학사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누구죠?”
정신없이 비무를 바라보고 있는 운현의 귀에 소궁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약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소궁주를 돌아보았다.
“어찌 제가 그런 걸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궁주는 웃었다.
“지나친 겸손이시군요. 학사님의 안목이 남다르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요.”
모를 리가 없었다.
빙혼이 운현에 대해 여전히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의도를 가지고 무공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소궁주는 빙혼의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운현의 안목이 남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소궁주의 말에 운현은 슬쩍 머리를 긁었다.
“음, 제가 보기에는…….”
운현은 비무대를 둘러싼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당파와 화산파, 그리고 제갈세가의 청년이 성취가 뛰어난 듯하더군요.”
“그런가요?”
“네.”
운현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중지추라 하였으니 뛰어난 자는 어디서든 눈에 띄는 법이다.
운현은 그들의 걸음걸이나 눈빛, 그리고 첫날 비무에서 보았던 것들만으로도 그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아가씨 역시, 크흠,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요.”
짐짓 헛기침을 한 것은 모용미를 향한 자신의 호감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다.
바로 그때였다.
운현의 목소리가 들렸을 리도 없을 텐데 모용미가 운현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슥.
시선이 마주치자 모용미가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보낸다.
운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지만 왠지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돌아보던 운현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저 청년 또한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운현의 시선을 좇아간 소궁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첫날 비무에서 패하지 않았던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뜻을 세운 자는 어제와 오늘이 다른 법입니다. 옛말에도 이르기를 선비가 뜻을 세우면 사흘 만에 눈을 씻고 다시 보아야 할 정도로 달라진다고 했으니까요.”
말하는 운현의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소궁주는 다시 한 번 그 청년, 파진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과연 운현의 말처럼 파진한의 눈빛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첫날에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패배와 조롱 이후에 그늘이 드리우긴 했지만 말이다.
“아, 물론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야…….”
문득 운현이 말을 이었다.
소궁주는 운현이 빙혼과 빙설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빙혼도 운현의 시선을 의식한 듯, 날카롭게 운현을 노려보았다.
운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소궁주를 향해 미소 지었다.
“대강, 이 정도입니다.”
“빙혼을 높게 평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소궁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쩐지 학사님께서는 다른 이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군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곳에서 그녀의 일행은 어디까지나 외인이다.
호기심으로, 혹은 적대감으로 쳐다보는 시선은 많았어도 정당하게 평가받는 일은 없었다.
“네? 그게 무슨…….”
“오오!”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는데 주위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운현은 급히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크으윽.”
한 사람은 자신의 목을 상대의 도에 내어 준 채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득의의 미소를 지은 채였다.
승자는 우세를 점하던 흑도회 청년이었다. 결국 반전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짝짝짝.
언제나 그랬듯이 둘러선 사람들 중 일부에게서만 박수소리가 흘러나왔다.
승패를 결정지은 두 사람이 비무대를 내려가고, 순서에 따라 또 다른 청년이 올라섰다.
“호오.”
소궁주가 비무대에 올라선 청년을 보더니 운현에게 말했다.
“마침 학사님께서 언급하신 그 청년의 순서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대 위에 선 청년은 바로 남해검문의 파진한이었다.
그리고 또 한 청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사람은…….’
운현은 파진한의 상대가 될 그 청년을 기억하고 있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있는 대부분의 참가자들과 달리 자리에 앉아 여유로운 미소를 피워 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
그는 첫날 파진한에게 ‘새로운 형식의 뇌려타곤’이라고 말했던 제갈룡이었다.
“이건 공교롭다고 하는 건가요? 아니면 간교하다고 해야 하나요?”
소궁주가 조소하며 말했다.
그녀는 이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계획이 있다. 중요한 일에는 더더욱 그렇다.
소궁주는 이 ‘계획’에 제갈세가의 입김이 스며들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남해검문을 짓누르고자 하는 제갈세가의 노골적이고도 분명한 입김이.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지요.”
운현이 비무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운명?’
조금은 난데없는 운현의 말에 소궁주가 의아해 하는 사이, 비무대 위에서는 두 청년이 서로 예를 표하고 있었다.
“남해검문의 파진한이오. 공자의 검을 기대하겠소.”
파진한이 먼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제갈세가의 제갈룡이라오. 어쩌면 그 기대에 응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소.”
제갈가의 공자, 제갈룡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귀하의 뇌려타곤에 필적할 만한 수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말이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파진한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제갈가의 검이 그대의 혀만큼 날카롭기를 빌겠다.”
이번에는 제갈룡의 눈매가 꿈틀 경련했다.
제갈세가는 신묘한 진법과 계략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허나 가문의 검법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심지어 검가(劍家)로 인정받는 남궁세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 온 그들이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는 달랐다.
‘제갈세가는 정사대전을 틈타 세 치 혀만으로 무림의 사대세가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제갈세가가 가장 치욕스럽게 여기는 말이었다.
스르릉.
제갈룡은 천천히 검을 빼어 들었다.
“그럼 나는 자네가 나귀만큼이라도 현명하기를 바라야겠군. 내 검을 피하려면 말이야.”
날카로운 칼날이 햇빛에 번득였다. 파진한 역시 검을 뽑았다.
“곧 보게 되겠지.”
파진한의 눈동자에는 분노도, 치욕도, 흔들림조차도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상대를 향한 나지막하면서도 확고한 적의뿐.
칼날만큼이나 날카로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중에서 얽혀들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
날카로운 쇳소리가 비무대에서 연이어 터져 나왔다.
챙, 채챙, 챙.
제갈룡의 검은 집요하고 날카롭게 파진한을 공격했다.
그러나 파진한은 물 흐르듯 담담하게 그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이전에 보여 주었던, 성급하게까지 느껴졌던 쾌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쉬익, 카앙.
내력이 담긴 제갈룡의 검이 파진한을 강타했다.
그러나 파진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카가각.
제갈룡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검이 파진한의 검에 가로막힌 것이다.
탓.
서로 내력을 겨루는 대신 제갈룡은 즉시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연이어 이어지던 공방은 잠시간의 정적을 맞이했다.
“어떤가?”
제갈룡이 한 손을 허리 뒤로 돌리며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간 몰래 수련했던 성과가 있는 것 같나?”
그건 연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파진한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제갈룡의 호흡이, 그 자신감이 허세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파진한은 그 말에 휘둘리지 않았다.
“애처롭군.”
파진한은 말했다.
“그렇게 상대를 모욕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나? 그리도 불안한가?”
제갈룡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흥, 싸움에 진 개 주제에 그래도 짖을 줄은 아는군. 하지만 어차피 결과는.”
탓.
제갈룡의 발이 땅을 박차며 날카로운 칼날이 파진한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변하지 않는다!”
카아앙.
파진한과 제갈룡의 검이 다시 격돌을 시작했다.
“흥미롭군요.”
비무를 보던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일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흐름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은 쉽게 승부를 말할 수 없겠군요.”
내심 운현은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제갈세가의 검은 대단했다. 제갈룡이 그토록 오만하게 구는 것이 이해가 갈 정도로.
소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저는 남해검문의 청년이 더욱 인상적이네요. 첫날, 그는 수세에 몰리자 금방 자신의 흐름을 잃고 말았지요.”
아름다운 소궁주가 운현을 보며 웃었다.
“뜻을 세운 사람은 다시 보아야 한다는 학사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군요.”
운현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파진한과 제갈룡의 비무가 이처럼 길게 이어지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갈룡이 사뭇 오만하지만 실력만큼은 다른 후기지수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무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의 비무에 빠져들고 있었다.
“헌데.”
문득 소궁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남해검문의 검이 무거워진 것 같군요.”
그녀의 지적에 운현은 찔끔했다.
“크흠.”
헛기침을 하는 운현의 귀에 소궁주의 말이 이어졌다.
“혹시 처음부터 자신의 실력을 숨겼던 걸까요? 겨우 사흘 만에 저런 변화는…….”
“충분합니다.”
어쩐지 힘이 들어간 운현의 목소리에 소궁주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운현은 비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말했다.
“사흘이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