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비무의 시작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그건 짓궂은 말이었다.
운현이 놀라고 있는 것은 모용미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니오!”
그제야 운현이 정신을 차린 듯 손을 내저었다.
“아주 좋은 검법이었소. 어, 그러니까 화려한 기예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그러니까 아주 훌륭한 검법이었소.”
말하면서도 운현은 자꾸 말이 꼬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좀 더 멋진 표현이나 단어가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말이 나오질 않는다.
“감사합니다.”
운현의 서툰 말에도 불구하고 모용미는 감사를 표했다.
바로 그때,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든 것은 당황해 하는 운현의 모습이 오히려 좋아 보였기 때문이리라.
“혹시 파 공자에게 하셨던 것처럼 제게도 뭔가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모용미의 검법은 운현에겐 익숙했다. 모용세가에서 제자들의 수련을 이미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용미의 성취가 대단한 것도 아니니 운현이 보기에 몇 마디 못해 줄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검을 수련하는 모용미의 모습이 운현의 눈길을 빼앗아 버렸다는 데 있었다.
‘여인들의 검로가 아름답다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서 직접 본 모용미의 수련은 금의위나 모용세가 제자들의 것들과는 아주 달랐다.
사실 운현이 늘 보던 수련이라고 해야 웃통을 벗어젖힌 금의위들의 힘차고 박력 있는 모습이 전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본 모용미의 수련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검법이나 검로가 아니라, 움직이는 모용미의 자태가 그만 운현의 시선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는 여인의 모습이 이토록 여성적이고 매혹적일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학사님?”
운현이 대답을 못하고 있자 모용미가 가볍게 재촉하듯 말을 건넨다.
그러나 운현은 아직도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니 저 그게…….”
사실 검법이 아니라 모용미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듣기에 따라 모욕이나 희롱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결국 운현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러자 난처해진 사람은 바로 모용미였다.
운현이 곤란해 하자 자신의 장난이 심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닙니다. 처음 본 검법에 평을 해 달라 한 제가 잘못이지요.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그런 게 아니고…….”
처음 보아서 그런 게 아니다. 하지만 운현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저희가 만난 건 서호가 처음이지요?”
갑작스러운 모용미의 말에 운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용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그 전에 어디선가 뵌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서호의 삼담인월에서 운현을 주목한 것도, 그의 유유자적한 분위기와 함께 어디서 본 듯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번 만난 사람을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서 모용미는 더욱 이상했다.
자신이 마차 안에서, 길옆으로 지나치는 운현을 잠깐 보았을 뿐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모용미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시선을 받은 운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고 있음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저기…….”
운현의 말에 모용미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자신이 외간 남자의 얼굴을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다니, 모용미는 당황했다.
게다가 ‘예전에 어디서 만난 것 같다’라니, 이거야말로 추파를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그럼 저는 이만…….”
고개를 숙여 운현의 시선을 피한 모용미는 얼른 몸을 돌렸다.
사박, 사박.
‘나도 참…….’
모용미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자책했다.
소위 후기지수들이 벌이는 유치한 행태에 마음이 답답하여 기분이라도 바꿔 보려고 이 새벽에 굳이 발걸음 한 곳이 비무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오히려 편안한 운현에 친근함을 느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검법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 주고 평을 부탁한 것은 확실히 정도가 지나쳤다.
‘게다가 저분이 그 서찰과 무슨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니…….’
그녀가 이상하게 여긴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운현의 어투였다.
비록 표현은 달랐지만, 운현이 파진한의 검에 대해 논할 때 한 말은 확실히 창룡검주의 서찰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후우.”
모용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초조했었나 봐.’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추측이다.
아마도 답답함과 초조함에 신경이 예민해진 까닭이리라.
‘괜찮아.’
사실 그다지 괜찮지는 않았다.
이대로라면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로서 용봉지회에 참석한 의미가 없다.
‘용봉지회는 아직 시작일 뿐이야.’
아직 기대를 접기엔 이르다고 생각하며 모용미는 숙소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어깨 위로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쬐고 있었다.
***
모용미가 비무대를 떠나자 드디어 운현은 혼자가 되었다.
“후우.”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날이 밝아 버렸네.”
결국 홀로 수련할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운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음, 하지만.’
그래도 억울하거나 손해 봤다는 느낌은 없었다.
모용미의 수련을 보았기 때문이다.
‘화용월태(花容月態)라 하여, 미녀의 용모가 꽃과 같고 그 자태가 고요히 지나는 달과 같다는 말은 들었지만.’
운현의 눈앞에는 모용미의 수련 모습이 생생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여인 또한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군.’
운현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파진한이라는 청년은 아예 밤을 샌 것 같던데, 대체 무슨 모욕을 받았기에…….’
사실 자신을 대한 그의 태도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용봉지회 참가자들 중 드물게 운현의 마음에 들었던 비무를 한 사람이다.
게다가 밤새도록 검을 휘둘러야만 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을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파진한의 처지에 동정이 간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참가자들, 소위 후기지수라 하는 자들에 대한 반감이 솟았다.
‘자신들도 부족한 주제에 감히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다니!’
운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이야기를 전해 주던 모용미의 어두운 얼굴이 생각나자 운현은 더더욱 그랬다.
‘으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운현에게 용봉지회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가 아직 정체를 모르고 있는 검성, 진짜 고수인 그를 만났으니 그렇잖아도 실망스럽던 후기지수들에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대로 파진한이 무시를 당하고 모용미의 고운 얼굴에 그늘이 질 것을 생각하니 대단히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파 공자는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테고…….’
아까 파진한의 기세로 볼 때 운현의 말을 듣기는커녕 또 다른 모욕으로 느끼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달칵.
어느새 숙소로 돌아온 운현은 작은 탁자에 앉아 곰곰 생각에 빠졌다.
‘만일 창룡검주의 이름으로 서찰을 보낸다면……. 아니, 아니야.’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해 놓고 같은 내용의 서찰을 쓴다면 아무리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해도 금방 알아볼 것이다.
게다가 그런 출처 불명의 서찰을 진지하게 대해 줄지나 의문이다.
‘결국 본인이 납득하도록 할 수밖에 없는데…….’
아예 비무를 신청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운현이 이긴다면 적어도 그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아예 귀를 닫을 수도 있지.’
조롱을 받으며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파진한이다.
문사인 운현에게도 진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운현은 곰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날이 밝아 이미 아침 식사 때가 되었지만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위한 용봉지회는 큰 변화 없이 계속 이어졌다.
낮에는 ‘강호 무림에서 명망이 높은’ 누군가의 강연을 듣고, 저녁에는 연회를 열었다.
운현으로서는 뭐하는 건가 싶은 일정이었지만, 후기지수들에게는 무림맹으로부터 대접받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들이 위치를 재확인하는 뿌듯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사이, 후기지수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끈 사람은 바로 북해빙궁의 소궁주였다.
그녀 자신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두문불출하고 있던 신승을 만났다는 것으로 인해 후기지수들은 누구나 소궁주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그러나 소궁주는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핑계로 연회는 물론 공식적인 일정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화산파의 매화검 영호준이 직접 찾아가 권했으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고 했다.
덕분에 여유가 생긴 사람은 운현이었다.
마지막 날 비무 때만 오면 된다는 소궁주의 말을 전해 들은 운현은 아예 무림맹 바깥에 머물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새벽 비무대에 나타난 모용미가 운현이 없음을 보고 아쉬워했다는 것도, 운현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용봉지회는 마지막 비무를 향해 하루하루 흘러가고 있었다.
용봉지회의 마지막 날 아침,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비무대에 모여 있었다.
이날만큼은 북해빙궁의 일행도, 그리고 운현도 자리를 지켰다.
“많이들 기다렸나?”
비무대 위에 올라선 매화검 영호준이 각파의 후기지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여러분이 기다렸던 비무가 시작된다. 다들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기량을 뽐내 보도록. 운이 좋으면 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지도 모르니까. 아, 물론 미남의 마음도 말이야.”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몇몇 청년들은 북해의 소궁주를 향해 의미 있는 시선을 던지기도 했지만 소궁주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비무다. 그러니 너무 승패에 집착하지 말도록. 하지만 이 비무의 결과가 공식적인 기록으로 무림맹에 남는 것도 사실이지.”
그 말에 후기지수들의 눈동자에 긴장이 번지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공식 기록으로 남는다는 말은 이 비무의 결과가 자신들의 평가에, 그리고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들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도록. 이건 예전에 용봉으로 뽑혔던 선배로서 하는 말이니까. 하하하.”
그건 후기지수들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 주는 말이었다.
무림맹을 꿈꾸는 젊은 후기지수들의 눈빛이 강렬하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매화검 영호준은 비무대에서 내려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운현의 귓가에 소궁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조금 특이하군요.”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소궁주는 매화검 영호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무림맹 소속을 강조하고 있지만, 참가자들 간에 자존심을 건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어요.”
“경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요.”
운현이 말했다. 소궁주는 가볍게 웃었다.
“그야 그렇지요.”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몇몇 청년들의 시선을 확인하며 운현은 소궁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저는 그가 어쩐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군요.”
‘다른 생각?’
운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쪽을 살피는 시선이 적지 않은지라, 그저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고.
소궁주 역시 깊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듯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곧, 용봉지회의 마지막 일정이자 가장 중요한 전체 비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