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새벽에 만난 사람들(2)
방금 모용 소저라 불린 그녀는 서호에서 보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단아한 모습과 총명한 눈빛이 기억에 남은 바로 그 아가씨였다.
‘설마 모용세가의…….’
운현의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모용미가 운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북해의 분들과 함께 계시던 분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모용세가의 모용미라고 합니다.”
‘역시.’
운현은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운현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모용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두 분께서 새벽부터 어쩐 일이신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파진한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부족한 검에 대해 학사님께 가르침을 받을까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운현을 비꼬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파진한 스스로를 자조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리따운 아가씨 앞에서 젊은 청년이 내뱉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어조다.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남해의 검은 가르침을 사양하지 않으니까요.”
파진한은 운현을 보며 말했다.
운현이 받아들이려 했던 것을 그도 분명 알아차린 것이다.
“어쨌거나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말을 마친 파진한은 모용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무대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사님께서는 북해빙궁 일행과 함께 계시던 분이지요?”
문득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네, 그렇습니다.”
모용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호에서도 한 번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 기억이 맞는지요?”
모용미로서는 운현의 모습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서호다.
용봉지회 참가자들은 운현을 북해빙궁의 일행으로 기억하겠지만, 모용미의 인상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서호에서 유유자적 앉아 있던 운현의 모습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운현은 젊은 여인과 이렇게 가까이 서서 대화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게다가 모용미처럼 아름다운 아가씨 앞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바로 그 때문에 북해빙궁 일행의 마차를 타고 오면서도 내내 거북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궁주나 시녀 빙설 모두 말이 없는 편이었다는 것이다.
“저는 운 학사님의 말씀에 동의해요.”
“네?”
갑작스러운 모용미의 말에 운현은 반문했다.
“파 공자의 검이 빠른 것에만 얽매여 있다는 말씀 말이에요.”
운현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컸었던 듯하다. 아니면 그녀의 청력이 매우 뛰어나거나.
“아, 그건…….”
“실례되지 않는다면 학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쾌검이란 어떤 것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운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차피 파진한에게 하려던 말이긴 하지만 그걸 남에게 말하기는 조금 난처하다.
어찌 들으면 파진한의 험담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저는 그저 글이나 읽는 문사일 뿐입니다.”
“하지만 파 공자에겐 해 주려고 하셨죠?”
모용미는 생긋 웃었다.
운현은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문사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운현이 말했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파 공자의 검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그저 제 물음에 답을 해 주시는 것뿐인걸요.”
모용미의 말에 운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입니다만, 빠른가 느린가 하는 것은 검로에 있어서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모용미가 흥미로운 시선을 운현에게 던졌다.
“그저 정확한 때, 정확한 위치에 검이 가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요. 그것을 하기 위한 방편 중의 하나를 일컬어 쾌검, 혹은 중검이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그 정확한 때와 위치는 어떻게 결정하죠?”
운현의 대답이 흥미를 끌었는지 모용미는 그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바로 그것이 설명하기가 좀 곤란한 것인데…….”
운현이 머리를 살짝 긁었다.
“그게 아마 그 검법의 검류(檢流), 그러니까 검의 흐름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바로 검법의 뜻이니 검의(劍意)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모용미가 미소를 머금었다.
“막연한 말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군요. 그러니까 검의, 곧 검의 극의를 깨닫지 못하면 그 검법이 추구하는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운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모용미의 말을 듣고 보니 마치 자신이 그 ‘검의’를 깨달은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파진한 자신조차 모르는 남해검법의 극의를 말이다.
운현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기, 제가 무슨 극의 같은 것을 깨달았다는 뜻은 아니고…….”
“후훗.”
모용미는 운현의 모습에 살짝 웃음을 흘렸다.
“저도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모용미의 웃는 모습을 보며 운현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모용세가에서 듣던 그녀는 성격이 강하고 기가 센 여장부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모용미의 모습은 쾌활하고 아름다운 또래 아가씨에 다름이 없다.
‘그러고 보니 상아를 많이 닮았군. 어쩐지 어디선가 본 듯하다 했더니.’
모용세가에서 만났던, 옆에 앉아서 재잘거리던 어린 상아를 떠올리는 운현에게 문득 모용미가 말했다.
“하지만 학사님의 말씀은 누군가의 말과 매우 비슷하군요. 표현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모용미로서는 그냥 한 말이지만 운현은 순간 뜨끔했다.
‘윽. 그러고 보니…….’
모용세가는 바로 자신이 서찰을 보낸 곳이다.
모용미가 그 서찰을 읽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한 일이 있는지라 내심 뜨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 공자의 말을 너무 마음에 두시진 마세요.”
“네?”
갑작스러운 말에 운현이 고개를 들자 모용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학사님께서는 어제 연회에 나오지 않으셔서 모르시겠지만, 파진한 공자는 꽤나 큰 모욕을 받았답니다.”
“모욕이라면…….”
모용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파진한이 사라진 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모용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유치한 짓이지요. 하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도 없을 거예요.”
모용미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러나 굳어진 그녀의 표정에서 작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무림맹 소속이고, 용봉지회에도 참석할 정도인데…….”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위 정파 쪽과 사파 쪽의 신경전은 첫날부터 본 바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설마 모욕을 줄 정도일까 의구심이 든 것이다.
“후후.”
모용미는 가볍게 웃었다.
용봉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과연 스스로를 ‘같은 무림맹 소속’이라고 생각할까?
“남해검문은 해남도에 있어요. 멀고 외진 곳이죠. 그리고 그들의 검법은 이곳의 유력한 문파들과는 사뭇 그 궤를 달리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모용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남해검문은 정사대전 당시 중립을 지켰어요. 유력 문파들이 남해검문을 기피하고 무시하는 이유로는 충분하겠지요.”
운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립이었다고 남해검문을 무시한다고요?”
“네.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즉, 무림맹 내의 파벌은 소위 정파와 사파만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파 공자가 첫날 보여 준 모습은 그들에게 아주 좋은 비웃음거리였어요. 아무리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말하던 모용미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군요.”
화려한 무림맹 전각을 바라보는 모용미의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어이없는 이유로 따돌림받는 것은 비단 남해검문의 파진한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용미 또한 파진한과 그리 다르지 않은 처지다.
그나마 지혜롭게 처신하여 다른 아가씨들의 견제가 적고, 아름다운 외모 덕에 청년들도 호의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언제라도 모용미가 남들보다 두드러지는 순간 그녀는 아마 파진한과 비슷한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모용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자, 그럼…….”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짐짓 밝은 웃음을 지은 모용미가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 검법에 대한 학사님의 고견을 들어 볼까요?”
“네?”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말에 운현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설마 파진한 공자만 봐 주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하, 하지만…….”
운현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모용미는 운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벌써 비무대 위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운현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아니, 그건 아니야. 그 서찰을 봤다 해도 보낸 사람이 나라는 걸 알 리가 없을 텐데?’
운현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무렵, 비무대 위에 선 모용미는 살짝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한 말은 반은 장난 삼아 한 것이었다.
본래 수련 장면을 가문 외의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금기다.
그러나 지금 모용미가 펼치려는 검법은 매우 기초적인, 비슷한 검법을 당장이라도 무수히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연회에서 본, 소위 거대 문파들의 모습에 실망을 느낀 사람은 파진한만이 아니다.
그녀 역시 그 답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 새벽부터 이 비무대를 찾은 것이다.
그러니 운현이 있다 하여 검을 펼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후후.’
당황하는 운현의 모습을 보며 모용미는 미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눈앞의 이 문사가 보여 주는 순수한 모습이야말로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가문의 외당 당주라는 짐을 벗은 채 거리낌 없이 자신의 내심을 드러낸 이유 말이다.
“후우우.”
그러나 이제 검을 마주할 때다.
모용미는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았다.
스릉.
작은 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이 반짝였다.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된 눈빛으로 모용미를 지켜보았다.
사박.
시작은 가벼웠다. 모용미는 가볍게 걸음을 내디디며 검을 떨쳐 냈다.
피리릭.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모용미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운현이 쳐다보는 것도 잊은 듯, 모용미의 발은 복잡하게 바닥을 쓸어 가기 시작했다.
파바박, 쉬리릭.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이 허공에 현란한 궤적을 그렸다.
그것은 날카롭고 예리한, 그러나 치명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검무(劍舞)였다.
비무대 위를 가득 채운 그 검무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몸을 돌린 모용미의 발이 땅을 박찼다.
탓.
‘아!’
지켜보던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모용미의 유려한 몸이 그녀의 검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는 선녀 같아서 운현은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타하!”
파바박.
허공에 날아오른 모용미의 검이 날카로운 빛을 사방으로 떨쳐냈다.
그리고 모용미는 땅으로 내려앉았다.
파라라락.
연분홍 옷자락이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나풀거리고, 그녀의 작은 비단신이 가볍게 비무대를 디뎠다.
사박.
마치 꽃잎이 내려앉듯, 무게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모용미가 비무대에 내려섰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녀의 검무가 끝이 났다.
“후우.”
모용미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스릉.
살짝 상기된 그녀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위를 잊을 정도로 몰두했던 모용미는 그제야 운현의 존재를 떠올렸다.
“어떠셨나요?”
짐짓 미소를 지으며 모용미가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현은 입까지 벌린 채 모용미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