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새벽에 만난 사람들(1)
신승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였다.
“그런 걸 두고 늙었다고 하는 걸세.”
갑자기 날아든 검성의 반격에 신승의 이마에 살짝 핏대가 올랐다.
“오, 그래? 그러고 보니 북해의 그 아이를 바라보는 자네 눈빛도 그리 만만치는 않던데? 그러고 보니 이십 년 전인가 다시 북해에 다녀온 적이 있었지? 혹시 그 때…….”
신승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검성을 바라보았지만 검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빙제와의 그날 이후,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보지 못했네.”
그 대답에 신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과연 북해제일지의 딸이라 할 만하더군. 이곳에서 우리 둘을 상대로 그런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란 쉽지 않지. 얼굴도 고운 데다 눈동자에서도 제법 총기가 엿보이고 말이야.”
말하던 신승은 힐끗 검성의 안색을 살폈다.
검성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번 일이 어찌 되든, 그 아이는 앞으로 북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걸세. 우리로선 오히려 잘된 일이지. 우리에게 증거를 요구했다는 건 그 아이 역시 피 흘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도 될 테니까.”
말하던 신승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젊은 것들이 너무 성급하게 사고를 치지 않을까 좀 걱정은 된다만…….”
신승이 슬그머니 말을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묵묵히 있던 검성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왜? 자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
신승이 입술을 비죽였다. 검성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네. 내가 졌으니 무슨 말인지나 이야기해 보게.”
검성이 항복하자 신승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으면 그냥 두고 보게. 자네 덕에 제법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으니 말일세. 헐헐헐.”
신승은 얼굴에 주름을 지으며 웃었다.
검성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 신승의 어깨 위로, 저녁 햇살이 가만히 내려앉고 있었다.
***
와룡헌을 방문한 다음 날, 운현은 새벽 일찍부터 비무대로 향했다.
‘지난밤 연회가 꽤 늦게 끝났다고 하니……’
지난밤에는 후기지수들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그러나 북해빙궁 일행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덕분에 운현 역시 가지 않았다.
듣기로 그 연회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오늘은 비무대에 사람이 없겠지.’
운현은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혹시 몰라 평소보다 더 일찍 나왔다.
만일 누군가가, 예를 들어 파진한이 나온다 해도 그 전에 끝내면 될 테니까.
기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던 운현은 문득 신승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무림맹 서기라…….”
이 기회에 천하의 명승지를 유람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사실 그것도 앞으로의 대책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당장 항주에 도착하면 받게 될 숙부의 눈치가 생생하고,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는 주머니 사정이 빤한데 어찌 마음 편히 유람이나 다닐 수 있을까?
“어차피 용봉지회도 이름만 그럴듯했지 별로 볼 것도 없는 것 같으니, 이대로 항주에 머무르면서 시험 준비나 할까?”
후기지수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리라 여겼던 용봉지회는 운현에게 실망만 안겨 주었다.
아직은 본격적인 비무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이지만, 어제 만난 고수들에는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저벅, 저벅.
운현은 생각에 빠진 채 걸음을 옮겼다.
고민이라지만 사실 이미 결론은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험이라면 그나마 좀 자신이 있는 것이기도 하고……’
무림맹 시험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사를 뽑는 것이라면 과거시험과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솟아오르는 자신감과 함께 비무대로 향하는 운현의 발걸음은 어느새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검을 지우라는 건 또 뭘까?’
운현은 문득 어제 와룡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대단한 고수가, 이름을 묻는 것마저 잊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가 무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하긴 했는데 도무지 짚이는 것이 없었다.
운현이 보고자 하는 것은 언젠가 백호수련검을 통해 보았던 세계, 그 경지에 다시 이르는 것이다.
검을 마음에 담거나 지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검은 검. 마음에 담는 것도, 지우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그 정도의 고수가 해 준 조언이니 시도할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오늘 한번 해 보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기다릴 것도 고민한 것도 없다.
직접 해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런 기대를 품은 채 운현은 비무대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운현의 기대는 산산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아!”
새벽 찬 기운을 뚫고 들려오는 우렁찬 기합 소리.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검술을 펼치고 있는 청년은 바로 남해검문의 파진한이었다.
‘이런.’
운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부터 나온 거야?’
보아하니 수련을 막 시작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얼마나 일찍 나온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후우.’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돌아갈까 했지만 어쩌면 곧 수련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휘리릭, 휘익.
운현이 온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듯, 파진한의 검은 현란한 궤적을 그려 내고 있었다.
새벽 찬기운을 가르며 파진한이 움직일 때마다 달아오른 그의 몸에서 열기가 뿜어 나온다.
“타하!”
후우욱.
새벽 찬 기운을 가르고 펼쳐지는 파진한의 초식은 운현의 눈에 익었다.
첫날 비무에서 펼쳤던 바로 그 초식들이었던 것이다.
‘음.’
운현은 문득 저런 걸 함부로 봐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구태여 피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공개적인 장소이니 내 잘못은 아니지.’
따지자면 이런 곳에서 수련하는 파진한의 잘못이다.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새벽 수련을 방해받게 된 것에 대한 반발도 없지는 않았고.
하지만 몰래 보았다는 의심만은 피하고 싶어서, 운현은 슬쩍 인기척을 내었다.
“크흠.”
탁.
운현의 헛기침에 파진한의 검이 멈췄다.
파진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시오.”
운현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 인사에 파진한은 난데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벌써 날이 밝고 있는가…….”
작게 흘러나온 그의 혼잣말에 운현은 그가 새벽에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설마 밤을 꼬박 새셨소?”
파진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검을 거두고 운현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안녕하십니까, 학사님. 또 나오셨군요.”
“아, 안녕하시오.”
운현이 얼결에 대답하는 사이, 파진한은 검을 고쳐 쥐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다시 수련을 시작하는 것이다.
탁, 쉬리릭.
파진한이 걸음을 내딛고 그의 검이 허공에 현란한 궤적을 수놓는다.
‘응?’
그 모습에서 운현은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
확실히 달랐다.
그래도 운현의 시선을 신경 쓰던 어제와 달리 파진한은 거침없이 검식을 펼쳐 내고 있었다.
언뜻 검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검 끝이 흔들리고 있음을 운현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곧 파진한의 마음이 어지럽다는 뜻이다. 애써 검에 집중해야만 할 정도로 말이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거나 자신이 보고 있음을 알렸으니 이제 거리낌 없이 파진한의 수련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슥.
운현은 아예 비무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눈은 자연스레 파진한의 검을 좇고, 머리는 그의 검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역시 너무 성급해.’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쾌검이라는 것을 너무 의식하는 바람에 오히려 쫓기는 느낌이군. 아직 어려서일까…….’
사실 운현도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파진한이 어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용봉지회 참가자들은 대부분 이십 세 전후의 젊은이들이다.
어려서부터 가문의 무공을 수련했다지만 연륜이나 경험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인성이란 실력과 무관한 경우가 많아서, 후기지수라 해도 또래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명문 무가의 자제이자 후기지수라는 자존심 탓에 미성숙한 경우가 더욱 많았다.
‘그러니 함부로 조언을 해 줄 수도 없고……’
한창 예민한 나이다.
근거 없는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때이니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운현으로서는 하고 싶은 말을 그저 마음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타합!”
휘리리릭.
파진한의 현란한 검로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새벽하늘이 점차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파진한의 수련을 지켜보던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빠르다는 것이 급하다는 뜻은 아닐 텐데…….”
탁.
파진한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파진한의 눈빛은 사뭇 심상치 않았다.
운현은 당황했다. 파진한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리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진한은 이미 수련을 마무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감정을 털어 내기 위해 검에 집중하던 때는 이미 지나고, 오히려 운현의 시선이 더욱 신경 쓰이고 있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목소리였다 해도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 그게…….”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파진한이 운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견(高見)이 있으시면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존심은 숨길 수가 없어서, 말하는 파진한의 목소리는 사뭇 도전적이었다.
운현 역시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운현은 파진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공자의 검로가 너무 빠른 것에만 얽매여 있다는 것이오. 풍랑이 오기 전에는 항상 고요한 순간이 있고, 큰물도 높이 오른 후에는 반드시 한순간 멈추기 마련 아니오?”
일단 입을 여니 하고 싶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알겠습니다.”
파진한의 목소리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운현은 그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열기를 보았다.
“허나 무인은 칼로 말하는 법입니다. 그 말씀을 직접 검으로, 제게 증명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것은 단순한 자존심이나 고집이 아니었다.
협박 같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무인은 칼로 말한다.
그러므로 파진한의 말은 운현이 검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자, 지극히 정당한 요구였다.
평생의 땀과 열정을 세치 혀로 희롱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말이다.
파진한의 시선을 맞받은 운현 역시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알겠.”
운현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던 때였다.
사박, 사박.
작은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모습을 나타냈다.
파진한도, 그리고 운현도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응? 저 아가씨는…….’
비무대로 다가오는 사람은 옅은 분홍빛 외투를 걸친 단아한 아가씨였다.
비무대에 있던 파진한은 검을 갈무리하고 벗어 두었던 웃옷을 걸쳤다.
“안녕하세요, 파 공자님.”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모용 소저.”
비무대를 내려오던 파진한이 그녀의 인사에 고개를 숙이며 답례를 했다.
‘모용 소저라고?’
운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