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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72화 (72/530)

072화. 아는 것은 오직 검 하나뿐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민망함을 털어 버렸다.

“더 이상 제게 여쭈실 것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이름이 뭐냐?”

신승의 물음에 운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빨리도 묻는군.’

그러나 그것은 그저 내심뿐, 운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운현이라 합니다.”

“지금 딱히 할 일이 없다면 무림맹에 들어오는 것은 어떠냐?”

그건 갑작스럽고 난데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저는…….”

“안다. 또 그놈의 문사 타령이겠지.”

신승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운현의 말을 막았다.

“얼마 후면 무림맹에서 서기직을 맡을 문사들을 뽑을 것이다. 무림인은 아니라지만 보아하니 너도 무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으니 이 기회에 무림맹에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운현은 망설였다.

초점이 어긋나기는 했지만 신승의 지적은 옳았다.

이 자리에 있게 된 것도 결국 무공에 대한 자신의 어쩔 수 없는 관심 때문이 아닌가?

게다가 처음 자금성을 나올 때는 모용세가에서 일을 맡아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어찌 보면 무림맹이야말로 운현이 원하던 곳인지도 모른다.

“서기직이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창룡전의 기억이 생생한 운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회가 좋다고 함부로 뛰어들면 안 된다.

언제나 심사숙고, 재차 확인하고 앞을 내다볼 줄 알아야 낭패를 면한다.

“그야 시험의 결과에 따라 정해지겠지.”

“네? 시험요?”

운현의 반문에 이번에는 신승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럼 내가 네놈을 천거라도 할 줄 알았더냐? 네 스스로 문사라 했으니 직접 실력을 발휘해 보려무나.”

신승의 말에 운현은 조금 실망이 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시험을 본다는 것은 그 과정과 결과가 공정하다는 뜻이며 서기 자리가 결코 만만치 않은, 즉 다른 사람들이 목표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그 시험이 언제 있지요?”

“글쎄? 아마도 용봉지회가 끝나는 대로 곧 있겠지. 한구석에 숨어서 몰래 하는 일이 아니니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이대로 항주에 간들 숙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그러나 천하의 무림맹이라면 아무리 서기직이라 해도 체면은 살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인 데다가, 시험이라면 이미 질리도록 익숙해 있지 않은가?

조금 생각해 보던 운현은 신승 불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검성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잠깐 기다리게.”

운현이 어정쩡하게 서 있자 검성이 신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걸 내주게.”

“쯧, 내 이럴 줄 알았지. 대뜸 가져다 맡길 때는 언제고……. 에이, 귀찮은 녀석 같으니.”

투덜거리던 신승은 운현을 쳐다보더니 턱으로 와룡헌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 들어가면 구석에 긴 목함이 하나 있을 게다. 가지고 오너라.”

난데없는 심부름이었지만 이곳에 발을 들이고 나서부터 갑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운현은 신승의 말에 따라 순순히 발길을 옮겼다.

“잘못 만지면 부서질지도 모르니 조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운현의 뒤통수에 한마디를 던지고 신승은 검성을 돌아보았다.

“그걸 저놈에게 맡길 셈인가?”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괜찮을까? 짐이 만만치 않을 터인데…….”

“자네가 맡기려는 것도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라고 보네만.”

검성의 말에 신승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혀만 찼다.

달칵.

잠시 후, 운현이 나무로 만든 긴 함 하나를 들고 나와 탁자 위에 놓았다.

오래된 탓에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부서져 있기까지 했지만, 언뜻 보이는 문양들은 이 목함이 본래 귀한 물건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검성은 잠시 회한에 잠긴 듯 말없이 목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이게 무엇입니까?”

운현이 물어보았지만 검성은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신승을 바라보자 직접 열어 보라는 듯 턱을 움직인다.

‘으음.’

운현은 어쩐지 미심쩍은 심정으로 천천히 목함을 열었다.

끼이익.

먼지를 뒤집어쓴 목함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밝은 햇빛 아래 안에 있던 것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천으로 둘둘 말아 둔, 마치 막대기처럼 긴 물건이 운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비록 낡고 오래된 천에 가려 있긴 했지만 분명히 그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사락.

운현은 조심스럽게 검을 싼 천을 풀어 내렸다. 그러자 운현의 짐작대로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나타냈다.

‘호오.’

운현은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그것은 한눈에 보아도 매우 훌륭한 검이었다.

칼집과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과 전체적인 모습이, 검에 대해 잘 모르는 운현이 보기에도 상당한 대가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훌륭하군요.”

운현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뽑아 보게.”

검성이 말했다. 검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알지 못할 회한 같은 것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스릉.

운현이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자, 거의 소리도 없이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칭.

“웃!”

한순간 숨이 멎는 듯한 느낌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모습을 드러낸 칼날은 더없이 날카로운 기운을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저 쥐고 있을 뿐인데도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예기가 느껴진다.

“대단한 검이군요.”

운현이 탄식하듯 말했다.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이제껏 보아 오던 것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비록 운현이 검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칼날 전체에 아련하게 붉은빛이 도는 이 검이 결코 예사 검이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검의 이름은 낙일(落日)일세.”

검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많은 것과 바꾼 검이지.”

그 목소리에 운현이 문득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걸 제게…….”

“오늘 내가 자네를 만난 증표일세. 내가 자네의 대답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운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이 검은 누가 봐도 대단한 명검이다.

이런 명검을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 맡긴단 말인가?

한동안 갈등하며 낙일검(落日劍)을 바라보던 운현은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달칵.

검을 칼집에 갈무리한 운현은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검을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이 검은 받을 수 없습니다.”

“줄 때 그냥 잠자코 받아.”

신승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줄 아느냐?”

그러나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명분도 없이 분에 넘치는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현은 고개를 숙여 탁자 위에 놓인 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무 날카로워서 자칫 사람을 상하게 할 것 같군요. 저는 그저 목검으로도 족합니다.”

운현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하고 탐나지만 자신의 분수를 넘는 검이다.

자신은 목검으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지금 이 검을 넙죽 받으면, 이제까지 무림인이 아니라고 한 말들이 전부 거짓이 되는 것 아닌가?

“목검이라…….”

검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운현이 그렇게 말하자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허나 내가 이 검을 자네에게 주었다는 것 또한 변함없는 사실일세.”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검성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 검은 잠시 더 이곳에 맡겨 두도록 하지.”

그 정도라면 운현도 만족할 만했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검성은 강렬한 눈빛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마음속에서 검을 지우게.”

검성의 눈동자는 은은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열기가 운현의 마음에 단번에 불을 붙였다.

“그리하지 못한다면 나를 실망시키게 될 걸세.”

“알겠습니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답했다.

검성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타오르던 그의 눈빛도 어느새 담담하게 변해 있었다.

사락.

운현은 검성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주려 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성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운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운현 역시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와룡헌을 나섰다.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 인상깊은 무인, 검성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숙소에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

손님들이 떠난 와룡헌에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빈 찻잔을 바라보며 신승 불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까 그건 너무 심한 요구 아니었나? 자네도 그리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아네만.”

신승의 말은 검성이 운현에게 던진 마지막 말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망하게 될 거라는 말일세.”

검성의 대답에 신승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검성은 운현을 자신의 아래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문득 검성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공을 배웠지만 제자는 아니며, 검을 배우지 않았으나 아는 것은 오직 검뿐이라는 말뜻을 알겠나?”

“스승을 통하여 배운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검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뜻일세.”

신승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불가에서는 일컬어 돈오(頓悟)라 하지.”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신승이 말을 이었다.

“분명 진기의 움직임을 느꼈거늘 심법을 모른다라? 물고기를 얻었으니 그물을 버렸다는 뜻인가? 선문답이 저리도 자연스러우니 어찌 보면 나보다 더 승려 같은 놈이로군.”

말하던 신승이 고개를 들어 검성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자네가 그 검을 주다니 의외로군. 그 아이를 끌어들이는 걸 반대하는 줄 알았는데……, 헐헐.”

“반대하네.”

검성은 말했다.

“허나 강호 무림이 어디 원하는 대로 되는 곳이던가?”

씁쓸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그 목소리에 신승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탁자에 놓인 낙일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검성이 다시 말했다.

“불영 자네는 왜 그를 끌어들이려 하나?”

“보통 놈이 아니니까.”

신승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런 재미있는 놈을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둘 순 없는 일 아니겠나?”

신승은 빈 찻잔을 아쉬운 듯 매만졌다.

“자네도 알겠지만 처음 무림맹을 세울 때 나는 소림이 나를 내칠 것이라 생각했네. 아니, 그렇게 기대했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신승이 말했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 아무리 중생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하나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이해 집단을 구성하고 그 한가운데 틀어 앉은 것은 승려로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일세. 그러기에 나는 소림이 나를 내침으로써 소림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랐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지. 이제는 신승이니 뭐니 하는 꼴사나운 호칭까지 뒤집어쓰지 않았나? 헐헐.”

씁쓸함이 감도는 그 웃음소리를 검성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까 저놈이 자신은 무림인이 아니라던 모습이 기억나나? 클클클, 자신은 무림인이 아니라니, 그야말로 무림맹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아닌가? 그 때 놈의 눈빛은 정말이지…….”

신승은 운현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세속의 더러움 같은 건 전혀 없는, 그 솔직하고도 곧은 눈빛을.

“그런 놈이 있다면 이 답답한 곳도 조금은 재미있어지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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