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사문도 없고 스승도 없이
소궁주가 떠난 후, 침묵을 깬 사람은 검성 이검학이었다.
달칵.
검성 이검학은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그녀를 많이 닮았군.”
“미망은 번뇌를 낳는 법일세.”
신승 불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잊도록 하게.”
하지만 검성은 고개를 들어 소궁주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빙제만은 아니라네.”
씁쓸한 목소리였다.
회한이 가득한 그 말에 사정을 모르는 운현으로서도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운현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신승의 차분한 음성이 운현의 귀에 울려 왔다.
“그만 됐으니 여기 앉거라.”
“아, 네.”
운현은 탁자에 앉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검성도, 신승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문파더냐?”
“네?”
신승의 말에 운현이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이놈아, 의뭉은 그만 떨고 어서 말하거라. 네놈도 눈이 있다면 상대는 알아볼 것 아니냐? 아니면, 어제 이놈과 한판 벌인 일이 다 거짓이라고 말할 참이냐?”
운현은 그제야 검성이 자신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뿐 아니라 신승의 눈매도 심상치가 않다.
‘역시 어제 그 일 때문에…….’
운현은 자신이 제대로 걸렸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무림맹, 강호 무림의 정점이자 중심이다.
그런데 자신이 신승의 손님을 상대로 검을 세우고 그의 기세에 맞선 것이다.
물론 운현도 할 말이 많다.
운현으로선 갑자기 당한 것인 데다 자신의 탓만도 아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자신은 강호 무림과 무관한 사람 아닌가?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운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하오나 저는 무림인이 아닙니다.”
꿈틀.
운현의 대답에 검성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에게는 운현이 끝까지 자신을 숨기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흘, 그놈 당연한 대답을 아주 힘들게도 하는구나.”
신승이 넉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무림인이 아니다. 그저 땡중일 뿐이지. 어쩌다 보니 이런 상황에 놓이긴 했다만 나는 그냥 중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 역시 무림인이 아니지.”
검성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검의 도(道) 하나뿐. 사파도 정파도, 그리고 무림맹도 나와는 관계가 없다.”
“쯧쯧, 네놈의 칼에 얽힌 업보가 얼만데 그런 말을 하는 게야? 세상 천지에 대고 물어봐라. 너 말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는지.”
신승이 입을 비죽이며 딴지를 걸었다.
어쩐지 운현 자신의 말이 무시당하는 분위기라,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두 분의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저는 본디 서생으로서 잠시 학사의 직무를 맡았던 것이 전부입니다. 어제의 일은 어디까지나…….”
“손 좀 내놔 봐라.”
신승이 대뜸 말했다.
“네?”
운현이 반문했지만 신승은 손까지 내민 채 눈살을 찌푸리며 재촉했다.
운현은 할 수 없이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신승의 손이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며 순식간에 운현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 올렸다.
탁.
‘오.’
운현은 조금 놀랐지만 손을 빼거나 하지는 않았다.
신승의 손이 순간적으로 보여 준 그 신기한 움직임이 흥미를 자극하기도 했지만, 그의 손길에 적의가 없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그러나 정작 운현의 손목을 거머쥔 신승은 운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거 참, 이렇게 쉽게 손목을 내어 주는 걸 보면 정말인 듯도 하고…….”
신승에게 한 손을 내어 준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내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손이 봉쇄당하는데다가 진기의 흐름마저 들킬 수 있으니, 상대가 신승이 아니더라도 무림인이라면 기피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도 운현이 자신을 숨기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리고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분명히 피했을 것이다.
“됐다.”
신승은 잡았던 운현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 고운 처자의 손목도 아닌데 뭐가 좋다고 붙잡고 있겠냐?”
“검을 익혔나?”
문득 검성이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검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뒤이은 운현의 대답마저 예상하지는 못했다.
“사실은 검 외에는 안다고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검밖에는 모른다고?”
신승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이놈아, 나도 아는 건 백보신권과 금강지뿐이다. 하지만 내가 금강부동보와 달마심법을 알듯, 너도 신법과 심법 정도는 배웠을 것 아니냐?”
신승이 이름을 날린 것은 소림 절예에 모두 능통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 모두를 익히긴 했으나 방금 그가 말했듯 신승은 하나의 권법과 하나의 지법으로 유명했다.
많은 무학을 익히고 난해한 초식을 펼치는 대신 하나의 권법을 극의까지 이룩한 사람.
그가 바로 신승 불영이며 스스로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법과 신법은 익혀야 한다.
그것이 없이는 상대를 제압할 수도, 이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현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신법도, 심법도 모릅니다. 아, 물론 기본자세만이라면 십팔반무예도 조금 알긴 하지만 그건 그냥…….”
“허어, 심법을 몰라?”
신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지만 운현도 물러서지 않았다.
“말씀드렸듯이 제가 아는 것은 검 하나뿐입니다.”
단호한 그 대답에 신승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가 무어라 말 하려는데 옆에서 검성이 물었다.
“자네가 익힌 검법의 이름을 말해 줄 수 있겠나?”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수련검’이라 하는 말이 어떤 반응을 불러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저 잠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을 뿐이다.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호수련검이라 합니다.”
신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검성을 돌아보았다.
혹시 아는 검법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검성은 대답 대신 강렬한 시선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서 보여 줄 수 있겠나?”
그 눈빛이 너무나 진지해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신승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이놈이 진짜!”
신승이 인상을 썼다.
“검법을 보여 달라니, 그나마 남은 이 초라한 집 한 칸마저 거덜 내려고 그래?”
검성이 검법을 보여 달라는 건 곧 비무를 하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신승으로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앞뒤 사정은 생각도 않고 다짜고짜 그러니 남들이 널더러 검에 미쳤다고 그러는 거 아니냐? 사람이 나이를 먹었으면 생각도 좀 하고…….”
“저는 괜찮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운현의 말에 신승이 멍한 표정이 되었다.
“……뭐라고?”
신승의 반문에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운현으로선 솔직한 대답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특별히 검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검성도 운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운현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었지만 특별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이분들 정도의 고수라면…….’
원래는 목검이라도 들고 백호수련검을 펼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일충현 교두가 그러했듯이, 이들이라면 보이지 않는 검의 움직임 또한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은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신승 불영과 검성 이검학으로서는 운현의 대답만큼 황당한 것도 없었다.
“우하하하.”
검성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와룡헌에 울려 퍼졌다.
항상 침묵을 지키고 낮은 음성으로 말하던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와룡헌이 떠나갈 듯 호쾌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
푸드득.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고, 운현과 신승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검성은 쉽게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자네 말이 옳네.”
검성이 유쾌한 표정으로 크게 말했다. 그는 눈을 빛내며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 따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을. 허허허허.”
검성은 더없이 기쁜 듯 웃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네의 검을 보고 싶네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 아쉽군. 허나.”
그 순간, 검성의 눈동자가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을 운현은 똑똑히 보았다.
“자네의 대답은 잊지 않겠네.”
“아, 네…….”
운현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지만 검성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쉽게 와 닿지 않았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오해를 확인하거나 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쯧, 검에 미친놈은 이놈 하나뿐인 줄 알았더니만. 자기 집 아니라고……, 에잉.”
신승은 검성과 운현을 번갈아 쳐다보며 혀를 찼다.
이대로는 오해가 굳어질 것 같아 운현이 얼른 말했다.
“저기, 말씀드렸듯이 저는…….”
“알았다.”
신승이 단호하게 말했다.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모르시는 거 같은데.’
피식 웃으며 신승이 말을 이었다.
“네가 무림인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았으니 더 이상 애쓸 것 없다. 네놈이 문사라 불리길 원한다면 그리해 주마. 아니, 운 학사라 불린다 했던가?”
아직 오해는 남은 것 같지만 어쨌든 운현 자신의 뜻은 이룬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서 더 이상 뭐라고 한다 한들, 신승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신승은 은근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네게 검을 가르친 분은 누구냐?”
운현은 대답했다. 사실 그대로.
“무공을 가르쳐 주신 분은 계시지만 검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신승의 눈살이 또 찌푸려졌다.
“그건 또 무슨 얘기냐?”
운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제대로 설명하자면 자금성의 일이며, 황태자 전하께 보고서를 올리는 창룡전의 일, 그리고 금군교두 일충현과 백호수련검에 대한 것을 다 말해야 한다.
무공을 익혔지만 그저 학문의 일환이었고, 검법을 수련했지만 단지 학자적 호기심뿐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자신의 말조차 제대로 듣지 않으려 하는 이들에게 말이다.
결국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충현이라는 분께 무공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아닙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파 왔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얹어 반지의 감촉을 확인했다.
자신은 일충현의 제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운현에게 스승이었고 때로는 형님이었다.
뜨거운 눈물로 맺은 의형이자, 운현이 아는 한 가장 강직하고 따뜻했던 사람.
그리고 무인의 가장 소중한 신념을 전해 주었던 그를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저 있었던 일을 말해 주는 것만으로 일충현이라는 이름이 운현에게 가지는 의미를 그들이 알 수 있을까?
“사문(師門)도 없고 스승도 없이, 아는 것은 그저 검뿐이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신승의 목소리에 운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문사입니다.”
“오냐, 알았다. 누가 네놈이 문사 아니라더냐? 그렇게 차려입고 있는 것만 봐도 안다.”
신승은 핀잔처럼 그렇게 말하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식어 버린 찻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다시 운현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게냐? 맘에 든 여자라도 쫓아다니고 있는 게냐?”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을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결국은 실직해서 놀고 있다는 것이 자신의 현재 상황이 아닌가?
“……항주의 풍광이 이름 높아 잠시 들렀던 길입니다. 북해빙궁 일행과는 우연히 만난 사이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려는 얼굴을 애써 굳히며 운현은 대답했다.
실직이 죄도 아니고 부정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일도 없이 놀고 있다는 것이로구나.”
단박에 핵심을 찌르는 신승의 한마디에 운현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