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와룡헌(3)
“그래, 네가 원하는 그 증거라는 게 어떤 것이더냐?”
신승의 눈빛은 어느새 크게 바뀌어 있었다.
주름진 눈살 사이로 보이는 신승의 눈동자는 감히 마주하지 못할 정도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감히 소궁주의 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시선에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소궁주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옥구슬 구르듯 낭랑한 목소리 역시 여전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북해의 율법, 곧 북해의 계율뿐입니다.”
“흘.”
신승은 웃음을 흘렸다.
“북해의 계율이라…… 뜻을 가진 자, 그 힘을 보이라는 그것 말이냐? 헐헐헐.”
어이가 없다는 듯 신승은 웃었다.
“용봉지회 따위를 보고 무얼 얻겠다는 것이냐? 고작 그것으로 네가 말한 북해의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냐?”
신승의 웃음소리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지만 소궁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의 용봉지회가 곧 미래의 무림맹입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고작 용봉지회라지만, 그들이 곧 미래의 무림맹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과거를 겪은 이들 역시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북해는, 상대의 목숨을 끊기 위해 눈보라 속에서 견디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탁자 위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위해 북해빙궁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미래의 무림맹이 될 용봉지회는 어떤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까?
그녀에게 무림맹은, 그리고 용봉지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을까?
그것이 지금 신승을 침묵하게 하는 이유였다.
달칵.
와룡헌 뒤쪽에서 들린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신승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빨리 가져오지 않고 뭘 그리 꾸물대는 거냐? 끌끌, 하여간 요즘 젊은 놈들은…….”
“그게, 저는 여기 처음이라서…….”
운현이 변명처럼 그렇게 말하며 다기를 양 손에 들고 걸어왔다.
신승은 소궁주에게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놈이 겉보기엔 훤칠하더니 영 믿음직하지 못하구나. 저래 가지고서야 험한 북해 같은 곳에 떨어지면 어찌 살꼬? 안 그러냐? 헐헐헐.”
짐짓 너스레를 떠는 신승의 모습에 소궁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어째서지?’
신승의 분위기가 변했다.
조금 전까지 보여 주던 신승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다시금 농을 넌지는 늙은 승려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소궁주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어쩌면 그저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분위기를 바꾼 것으로 보기에는 신승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
방금 그가 보여 주었던 그 강렬한 눈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마치 그를 번뇌케 하던 근심이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떠냐? 집 뒤에 있는 밭이 아주 탐스럽지?”
다기를 내려놓는 운현에게 신승이 자랑하듯 말했다.
운현의 옷자락에 물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물까지 길어 온 듯했다.
“항주에선 이곳이 최고 명당일 게다. 깨끗한 샘까지 솟아 나오니 더할 나위가 없지. 헐헐헐.”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신승의 모습에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은 깨끗하긴 했습니다만…….”
탐스럽다던 밭은 제대로 가꾼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잡초가 가득했던 데다가, 거름 냄새까지 지독했다.
게다가 다기는 어디 있는지 찾기도 힘들었고,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여서 물을 길어오고 설거지까지 해야 했다.
그 악전고투의 결과로 그마나 깔끔한 다기를 가져올 수 있었으니, 운현의 반응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달그락.
찻잔과 뜨거운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운현은 자신의 자리, 소궁주 뒤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그냥 가려고? 가져왔으면 차도 좀 따라야지.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신승의 말에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차 정도야 따를 수도 있다.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 역시 예법을 배운 선비로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억울한 것도 사실이다. 왜 하필 자신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도 손님인데.’
운현은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거절은 하지 못했다.
몸에 배인 예법과 늘 읽었던 선현의 말씀을 따라 운현은 찻주전자를 들었다.
또르륵.
찻잔이 차오르고 은은한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신승은 그제야 만족한 듯 두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나도 주게.”
검성이 말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운현은 그의 잔에도 차를 채웠다.
또르르르.
‘이 분은 누구지? 기세가 대단하던데?’
집 뒤에 있던 터라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한 운현은 상대가 검성이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다만 워낙 대단한 기세를 뿜어냈던 무인이라 막연히 고수라 짐작할 뿐이었다.
잠시 후, 차를 홀짝거리고 있던 신승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결국 나더러 해결하라는 얘기로구만. 은근슬쩍 협박까지 해 가면서 말이야.”
“설마 그럴 리가 있나요.”
소궁주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신승의 하소연 같은 중얼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에이구, 이놈이나 저놈이나……. 기껏 허름한 집 한 채 받았다고 해 달라는 일이 많기도 하지. 그래도 중이 절을 떠났으니 어쩔 수가 있나?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투덜거리던 신승이 문득 소궁주를 향해 말했다.
“주마.”
소궁주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씀은…….”
“그래. 그놈의 새로운 증거인지 대답인지, 주겠다는 말이다.”
빙혼과 시녀 빙설의 안색 역시 굳었다.
영문을 모르는 운현도 긴장된 표정으로 분위기를 살폈다.
운현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신승의 말이 무언가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나 이놈이 움직일 수는 없다. 그랬다간 너무 번거로워져. 게다가 너희도 새로운 세대 운운하면서 그런 걸 원하지는 않을 테지.”
소궁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승이나 검성이 움직인다면 그 후폭풍이 너무나 크다.
게다가 검성도 신승도 과거의 사람, 소궁주가 원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그럼 두 분을 대신하여 저희에게 답을 해 주실 분은 누구시지요?”
소궁주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신승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재촉하지 마라. 용봉지회가 끝나는 날 알려 줄 테니까. 장담하건대 아마 실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끝나는 날 알려준다는 말에 소궁주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신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말해 둘 것이 있다.”
주름진 눈으로 신승이 웃으며 소궁주에게 말했다.
“너희가 원하는 증거를 줄 것인지는 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네가 그를 인정해도 그가 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소궁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신승의 말은 북해빙궁이, 그리고 소궁주가 과연 그의 답을 들을 자격이 있겠는가라는 도발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너라면 반드시 무슨 수를 내겠지만 말이다. 클클클.”
신승의 웃음소리는 소궁주의 심기를 강하게 자극했다.
그러나 소궁주의 표정이 변한 것은 잠시였다.
소궁주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신승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친절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도 빈손으로 북해에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군요.”
“감사는 무슨…….”
신승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문득 운현에게 말했다.
“거기 자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어깨 좀 주물러 보게.”
“네?”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있던 운현은 당황했다.
하지만 신승은 분명 운현 자신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뭐하고 섰어? 빨리 와서 좀 주무르라니까. 에고, 늙으니 온 삭신이 다 쑤시는구만. 비가 오려나…….”
거짓이 아니라는 듯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던 신승이 운현을 향해 재촉했다.
“뭐해? 빨리 안 오고?”
“어…….”
운현은 주저했다. 하지만 소궁주도, 빙혼도 아무런 말이 없다.
결국 운현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신승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신승의 등 뒤에 서서 엉거주춤 손을 뻗었다.
‘이, 이래도 되나?’
상대는 신승 불영 대사다.
환우오천존이자 무림맹의 맹주나 다름없는 그의 어깨를, 그것도 등 뒤에서 이렇게 함부로 만져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냐? 주무르라니까?”
신승의 호통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꾹, 꾹.
“더 세게.”
적지 않은 힘이 들어간 듯한데도 신승 불영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더 이상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직접 만져 본 신승의 어깨가 생각보다 훨씬 빈약했기 때문이다.
‘신승은 소림 권법의 대가라고 하던데, 이렇게 가느다란 팔로 어떻게 권법을 하는 거지?’
운현은 신승 불영의 어깨를 주무르며 생각했다.
신승은 정사대전 전부터 이미 괴승이라 불리며 소림 권법의 극한에 오른 사람이다.
그런 그가 여느 늙은 승려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역시 고수는 다 내공의 고수라는 말이 맞는 건가 보군.’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힐끔 검성, 운현으로서는 아직 정체를 모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검성은 찻잔을 쥔 채 여전히 미동조차 없다.
“저희도 한 가지 양해를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문득 소궁주의 청아한 음성이 운현의 상념을 일깨웠다.
“북해에서 검을 마주한다는 것은 곧 생사를 거는 일입니다. 혹여…….”
그러나 소궁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해라.”
신승은 눈까지 지긋이 감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능력만 된다면야 못 할 게 어디 있나? 그게 북해의 계율인지 뭔지 아냐?”
그건 대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말이자 남은 문제는 이제 전적으로 북해빙궁의 능력에 달렸다는 도발이기도 했다.
사락.
소궁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름다운 그녀가 천천히 허리를 굽혀 신승 불영과 검성 이검학에게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신승은 운현에게 어깨를 맡긴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쥐고 있던 검성 이검학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역시 말은 없었다.
사박.
소궁주는 몸을 돌렸다.
빙혼과 빙설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신승의 어깨를 주무르던 운현도 슬그머니 손을 뗐다.
“어디 가려고?”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신승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하다가 중간에 끊으면 어쩌라고? 건드려 놓고 그냥 가는 게 사내가 할 짓이냐?”
뭔가 항의할 말이 많았지만 운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궁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북해빙궁의 일행으로서 왔으니 같이 나가야 함이 옳지 않은가?
그러나 소궁주는 매정하게도 운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사박.
그녀는 고개를 돌리곤 아무 말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
운현은 당혹스러웠다.
소궁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운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 차갑게 느껴진 탓이다.
사박, 사박.
조용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소궁주 일행은 와룡헌을 떠났다.
그리고 작은 탁자 앞에는 신승 불영과 검성 이검학, 그리고 얼굴을 찌푸린 운현만이 남게 되었다.
***
와룡헌을 빠져나오는 소궁주의 발걸음은 우아하고 가벼웠다.
전각을 돌아 나와 이제는 와룡헌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사박.
소궁주는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와룡헌쪽을 바라보며 소궁주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빙혼.”
그 목소리에 빙혼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설영대(雪影隊)의 준비는 끝났나요?”
“네.”
빙혼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소궁주는 와룡헌 쪽을 바라보며 또박 또박 말을 이었다.
“용봉지회 마지막 날에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시키세요. 만일 그날 신승의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궁주가 말했다.
“이번 용봉지회의 참가자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존명.”
빙혼은 지체 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와룡헌 쪽을 바라보는 소궁주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반드시 우리에게 대답해야 할 거야.’
새빨간 입술이 달싹이며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용봉지회는 피로 물들게 될 테니까.”
사락.
소궁주는 몸을 돌렸다.
무림맹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발걸음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