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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69화 (69/530)

069화. 와룡헌(2)

누구랄 것도 없이 일행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모두의 눈동자에 작은 떨림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와룡헌의 주인 신승 불영 대사 때문이 아니었다.

신승 맞은 편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한 사람.

마치 자신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있는 그가, 단지 기세만으로 용봉지회를 순식간에 엉망으로 휘저어 놓은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락.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무림맹의 신승 불영 대사님을 뵈옵니다.”

가장 먼저 행동을 취한 사람은 북해빙궁의 소궁주였다.

그녀는 단아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히며 신승에게 예를 표했다.

“허, 거 참 똘똘하게 생긴 아이로고…….”

소궁주의 인사에 신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빙제의 일곱 번째 자식이 매우 영특하고 아름다워서 앞날을 기대해 볼 만하다더니, 네가 그 일곱째냐?”

“일곱째는 맞사오나 현재는 삼궁주의 위(位)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궁주의 대답에 신승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헐헐, 과연. 삼궁주까지 올라갔다는 건 그저 아름다운 꽃만은 아니라는 뜻이로군. 아마 가시도 만만치 않을 테고 말이야.”

신승은 소궁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긴 북해제일지라는 제 어미를 닮았으면 그럴 만도 할 테지. 거기 서 있지 말고 어서 이리 와서 앉거라.”

소궁주는 감사의 예를 표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신승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빙혼과 빙설, 운현은 소궁주 뒤에 조금 떨어져서 섰다.

탁자가 작아서 더 이상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아직도 빙궁에선 ‘정남론’이니, ‘남린파’니 하며 다투고 있는 게냐?”

소궁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신승이 다짜고짜 말했다.

대뜸 빙궁의 내분을 언급하는 민감한 발언이었지만 소궁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빙궁이 이곳과 이웃하고 있는 이상 관심은 불가피한 것이겠지요.”

‘정남론’이란 북해빙궁이 남쪽의 무림을 힘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며, ‘남린파’는 반대로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이다.

정사대전 이후 끊이지 않고 제기되어 온 이 논란은, 소궁주의 말대로 이곳과 이웃하고 있는 이상 결코 끝나지 않을 문제일 것이다.

“먼저 이런 자리를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소궁주는 감사의 말을 꺼냈다.

본격적인 주제로 들어가자는 뜻이지만 신승은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아직 차도 내오지 않았군. 역시 늙으면 어쩔 수가 없다니까. 거기 서 있는 자네, 이리 좀 와 보게.”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불영의 주름진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럼 누가 또 있다고 그러는 게야? 이리 좀 와 보라니까?”

북해빙궁의 일행 자격으로 와룡헌에 들어왔다지만, 운현은 이곳에 있는 누구와도 관련이 없다.

그렇다 보니 얌전히 귀를 기울이며 소궁주 뒤에 서 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신승이 말을 거니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신승은 자신을 향해 손짓을 계속하고, 그 바람에 북해빙궁 일행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니 운현으로서는 주섬주섬 가까이 다가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저, 왜 그러시는지…….”

상대는 다름아닌 신승 불영 대사다.

사실상 무림맹의 맹주이자 환우오천존 중의 한 사람.

비록 그 초라한 외모는 조금 기대에 어긋났지만 과연 눈빛부터가 평범하지 않았다.

만일 신승 옆에 그 사람, 자신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그가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운현의 주목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운현의 행동이 사뭇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저 뒤쪽으로 가 보면 다기(茶器)들이 있을 거네. 가서 좀 챙겨 오게.”

“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운현의 말에 대뜸 신승의 눈살이 일그러진다.

“왜, 싫은가?”

“아니, 그게 아니라…….”

“허어, 힘없는 늙은이의 말이라고 무시하는 거 보게.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참으로 말세로다, 말세야. 허어.”

말세까지 들먹이는 신승에게 운현은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예를 배운 자로서 노인을 무시한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운현은 신승의 눈치를 살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다기라고 하셨지요? 저쪽에 있습니까?”

“그래. 뒤편으로 돌아가면 있을 걸세.”

신승이 가리킨 곳은 와룡헌 뒤쪽이었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신승이 자연스럽게 말을 잇는다.

“올 때 물 끓여 오는 것도 잊지 말게. 그러고 보니 물도 길어 놓은 것이 다 떨어졌던가? 아니, 조금 남아 있던가?”

말하자면 물까지 길어 오라는 뜻이다.

운현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신승은 어느새 소궁주 쪽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운현은 할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소궁주에게 신승은 문득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왜? 네 정랑에게 심부름을 시키니 기분이 편치 않으냐?”

정랑은 곧 사모하는 남성을 말한다.

소궁주는 즉시 운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단호히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운 학사님께는 잠시 도움을 받고 있을 뿐, 특별한 연관은 없습니다.”

“흐음, 그래?”

신승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소궁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소궁주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신승의 시선을 마주했다.

“……뭐, 아니면 말고.”

신승은 실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소궁주는 오히려 신승을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다름 아닌 신승 불영이다.

그가 운현을 지목하여 심부름을 시키고 이 자리를 뜨게 한 것이 과연 우연한 일일까?

잠시 신승을 바라보던 소궁주는 화제를 바꿨다.

“실례지만 이분은 누구신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나한테 여쭈어 보지 말고 네가 직접 물어보려무나.”

사뭇 빈정대는 말투였지만 소궁주는 신승의 제안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사락.

자리에서 일어난 소궁주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소녀는 북해빙궁의 소궁주입니다.”

아름다운 소궁주가 눈을 빛내며 그에게 물었다.

“대인의 존성대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뭇 고풍스러운 표현은 아마도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리라.

그러나 신승이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는 것은 그를 신승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높이 여긴다는 의미다.

어쩌면 신승에 대한 무례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이검학일세.”

낮고 둔중하게 흘러나온 그 목소리에 경악을 감추지 못한 사람은 빙혼이었다.

“검성 이검학!”

빙혼의 목소리와 함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소궁주는 물론 늘 무표정하던 시녀 빙설의 안색까지 변했다.

검성 이검학.

그 이름 앞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북해의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특별했다.

“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옥구슬 구르는 듯 낭랑한 소궁주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소궁주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결코 부드럽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팽팽한 긴장과 함께 차갑고 날카로운 미소가 소궁주의 붉은 입술에 피어나고 있었다.

“음.”

검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궁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검성이 인사를 받았다는 것은 그와 대화할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다.

소궁주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붉은 입술에 걸렸던 차가운 미소는 희미해졌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더욱 빛을 내고 있었다.

“대인의 높은 이름은 북해에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 당연히 알고 있겠지.”

대답한 사람은 신승이었다. 그는 넉살 좋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녀석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을 테니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느냐? 헐헐헐.”

빙혼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신승이 말한 것은 북해빙궁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과거의 상처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피를 불러왔던 정사대전이 무림맹의 등장으로 일단락되었을 때, 사람들은 상처를 치유할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무림맹 체제라는 새로운 토대를 놓는 일은 쉽지 않았고, 정사대전이 끝난 후에도 무림맹과 반무림맹으로 나누어져 피를 흘리는 일들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때, 북해빙궁에서는 정남론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며 북해의 핵심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북해의 위협은 곧 현실로 닥쳐올 것 같았고, 정사대전에 지친 무림은 그에 맞설 힘이 없었다.

외부의 위협을 내부의 단결로 이용할 조직력마저, 아직 무림맹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북해빙궁을 저지한 사람이 바로 검성 이검학이었다.

당시 괴승이라 불리던 신승의 부탁을 받은 그는 홀로 북해빙궁을 찾아가 내로라하는 북해의 고수들을 여지없이 무릎 꿇렸다.

차갑게 빛나는 그의 검 한월 앞에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그가 보여 준 압도적인 무위에 정남론자들의 주장은 힘을 잃었고, 북해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고 여긴 북해 빙제는 북해빙궁의 모든 힘을 동원해 검성 이검학을 죽이려 했다.

연이은 생사의 비무를 치러 온 검성 이검학으로서는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한 여인이 분노한 빙제와 피에 젖은 검성 사이에 나타났다.

그녀는 마치 기적처럼 단 몇 마디의 말로 두 사람의 싸움을 멈췄고, 검성을 죽이려던 빙제는 오히려 그에게 한 자루의 검을 선물함으로써 검성의 무위를 인정했다.

검성은 빙제의 인정을 받아들임으로써 북해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고, 이로써 북해빙궁과 무림맹 사이에 불안한 평화가 성립된 것이다.

빙제와 검성을 중재한 여인은 이 일로 인해 ‘북해제일지’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후에 북해 빙제의 다섯 번째 비(妃)가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앉아 있는 소궁주의 어머니가 바로 북해제일지로 알려진 그녀였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신승과 검성은 물론, 소궁주에게도 결코 옛 이야기라 치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궁주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소궁주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직접 겪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결코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이기도 하지.”

신승은 툭 던지듯 그렇게 말하곤 검성 이검학을 바라보았다.

“저놈도 지금은 철이 들었다지만, 젊은 시절엔 꽤나 혈기가 넘쳤다니까? 흘흘흘.”

신승의 말은 듣기에 따라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소궁주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말씀대로입니다.”

소궁주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 일을 겪은 분들이 살아 계시는 한 북해빙궁은 결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을 테지요. 하지만.”

아름다운 눈동자로 검성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궁주가 말했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증거를 원합니다.”

쏴아아.

한 줄기 바람이 세 사람을 스쳐 지났다.

늘 너스레를 떨던 신승도 지금 이 순간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북해가 새로운 증거를 원한다는 것은 그사이 북해가 새로운 힘을 키웠다는 의미다.

그리고 증거를 원하는 ‘새로운 세대’에는 소궁주 역시 포함될 터였다.

“북해가 그럴 힘이 있다고?”

신승의 물음은 노골적이고 그만큼 무례했다. 그러나 소궁주는 화내지 않았다.

“곧 알게 되시겠지요.”

소궁주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신승은 눈살을 찌푸린 채 소궁주를 쳐다보았지만 소궁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시선은 여전히 검성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신승의 입에서 긴 탄식이 새어 나왔다.

“허어. 증거라, 증거……. 평화가 피 흘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에 대체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이냐?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란 정말이지 끝이 없구나.”

그 탄식에 소궁주가 나지막이 답했다.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어쩌면 북해의 운명이 달린 일일지도 모르니까요.”

신승의 말처럼 피 흘리는 것보다는 평화가 훨씬 낫다.

하지만 북해의 운명은 단지 그런 논리만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심처럼, 때로는 피 흘림을 통해서라도 얻어야 할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문제.

바로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그녀가, 빙제의 총애를 받는 제삼 궁주이자 북해제일지의 딸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갈 ‘새로운 증거’ 혹은 ‘새로운 대답’에 의해 북해의 미래는, 그리고 강호 무림의 미래 역시 크게 바뀌게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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