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와룡헌(1)
“제갈 공자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누군가 묻자 제갈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기세를 뿜어낼 사람이 당금 무림에 과연 누가 있겠소? 문제는 그중에 누구냐 하는 것일 테지.”
단언하듯 말하는 그의 말에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신승이실지도…….”
누군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림맹에서 환우오천존 중 한명이라면 당연히 신승 불영 대사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아니, 그건 아니오.”
그러나 제갈룡은 그 추측을 단호히 부인했다.
“어제 그분이 신승이셨다면 매화검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 않겠소?”
그의 말이 그럴 듯했기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갈 공자께서는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해 뭔가 짚이는 바라도 있소?”
“글쎄요……?”
제갈룡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시간을 끌었다.
애매한 그의 대답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을 무렵, 문이 열리고 매화검 영호준이 들어섰다.
“대협!”
매화검 영호준을 발견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화산파의 사마건을 중심으로 한 정파 쪽 참가자들뿐이었다.
“어떤가? 용봉지회가 그렇게 즐거운 것만은 아니지?”
매화검 영호준의 말에 작은 웃음들이 참가자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오늘 저녁은 즐거울 테니 걱정 말게. 비공식이지만 연회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어제 비무대에서 못한 소개는 연회에서 할 테니 다들 멋있게 차리고 나오라고.”
연회라는 말에 참가자들 사이에서 가벼운 흥분과 긴장이 흘렀다.
어제의 난데없는 비무와 오늘의 지루한 강의로 실감하지 못했던 용봉지회가 드디어 시작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리라.
매화검 영호준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참가자들을 돌아보다가, 문득 북해빙궁의 일행에서 그 시선을 멈췄다.
“아, 그리고 멀리서 오신 북해빙궁의 손님들께서는…….”
매화검 영호준의 말과 함께 참가자들의 시선이 북해빙궁 일행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군. 소저께서는 방명이 어찌 되시오?”
방명이란 곧 꽃다운 이름을 뜻한다.
한 송이 얼음 꽃 같은 북해의 소궁주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단어인지라, 모든 후기지수들의 시선이 단번에 소궁주에게 몰려들었다.
“후후.”
찻잔을 들고 있던 북해의 소궁주가 가볍게 웃었다.
붉은 입술에 번져가는 그 매력적인 미소가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소궁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을 왜 알고자 하시는지요?”
달싹이는 붉은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영호준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반드시 알아야 하는 건 아니오만, 계속 북해에서 오신 손님이라 부르기도 불편해서 말이오.”
넉살 좋은 영호준의 반응에 아름다운 소궁주가 빙긋 웃었다.
“저는 북해빙궁의 소궁주입니다. 그렇게 불러 주시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영호준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리따운 미녀를 그런 딱딱한 호칭으로 부르는 건 너무 각박하지 않소? 혹시 이름이 없는 건 아니오?”
장난기 가득한 그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소궁주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만나면 반드시 생사를 결할 일생의 대적, 혹은 평생을 같이 할 반려자.”
낭랑하고 매혹적인, 그러나 서늘한 기운이 가득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입을 다문 그 정적 사이로 찻잔을 든 소궁주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북해에서 자신의 진실 된 이름을 알려 주는 상대는 오직 그 둘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특별히 내력이 실린 것도, 무시무시한 기세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담긴 위압감에 모두가 한순간 말을 잊은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 위에 서 있는 이들.
그들 특유의 분위기가 북해빙궁의 소궁주에겐 있었다.
“하하, 그렇소?”
매화검 영호준의 웃음소리가 주위를 일깨웠다.
“나라면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마음에 들지만, 아쉽게도 출가한 몸이라 당장은 쉽지 않겠구려.”
화산파 도사의 농담이라기엔 조금 지나친 감이 있었지만 소궁주는 그저 가느다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말하지 않겠다는 건 적어도 생사대적이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 되겠군. 그렇지 않소?”
소궁주의 눈동자에 살짝 이채가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만족하오. 자, 그럼 북해의 소궁주님 일행은.”
영호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신승을 만나 뵐 준비를 하시기 바라오.”
쿵.
지금까지와는 다른 충격이 주위를 덮쳤다.
후기지수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랐고 소궁주 역시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에 매화검 영호준은 사뭇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축하하오.”
그 짧은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제야 다른 참가자들도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소궁주도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락.
“저희의 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궁주는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단아한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운현은 그때서야 소궁주가 신승을 만나기 위해 요청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허락한 것도 아니니 예는 필요 없소.”
매화검 영호준은 손을 내저었다.
신승 불영 대사를 만나는 것은 거대 문파들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북해빙궁 일행이 신승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저의 일행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소궁주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통찰력이었다.
“그렇소.”
매화검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소궁주와 함께 무림맹에 들어선 이들 전부라고, 신승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오. 그러니 그쪽 분들도.”
영호준의 시선이 빙혼, 빙설, 그리고 운현을 차례로 향했다.
하지만 운현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해에선 이름을 특정한 사람에게만 알려준다고?’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평소엔 서로 어떻게 부르지? 예를 들어 공적인 직함이 없거나……’
가족은 어떻게 될까? 이름을 지어 준 부모는 예외로 치는 걸까? 실수로 이름을 알려 주면 어떻게 되나?
한창 생각에 빠져있던 운현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매화검 영호준은 물론 소궁주, 그리고 다른 참가자들의 시선이 모두 운현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매화검 영호준은 씨익 웃었다.
“준비하시기 바라오. 신승을 뵙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오.”
자주 있는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다.
오늘날의 무림맹을 있게 한 사람이자 하늘 아래 최고수라는 환우오천존의 한 명, 바로 그 신승 불영 대사를 만나는 것이다.
소궁주의 일행이라는 덕분에 그런 엄청난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니 참으로 대단한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답한 사람은 운현이 아니라 소궁주였다.
“그러면 저희는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처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으니까요.”
이미 일어나 있던 소궁주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빙혼과 시녀 빙설이 그녀를 뒤따르고, 운현도 엉겁결에 그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웅성웅성.
그들이 떠난 후에도 소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파격에 대한 놀라움은 지나가고, 새외 문파에 불과한 북해빙궁이 과분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신승은 무림맹을 세운, 사실상 무림맹의 맹주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는 수 년째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억측도 무성했지만 무림맹과 소림은 불영 대사를 신승으로 추대하며 무림맹의 핵심임을 분명히 했다.
그 이후, 신승 불영의 이름은 무림맹을 대표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맹주도 아니고 모습조차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승의 이름은 무림맹의 위세와 함께 높아져만 갔다.
그러니 지금 후기지수들의 불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저기, 영호준……, 대협.”
머뭇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뭔가?”
영호준은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사제, 화산파의 사마건이었다.
“그러면 어제 그분이 혹시 신승이셨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매화검 영호준은 쓰게 웃었다. 같은 화산파이자 사제라지만 사마건의 물음은 너무나도 어리석다.
“하지만 다들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 말해 주지. 어차피 북해빙궁 일행이 다녀오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니.”
영호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분은 검성이시다.”
참가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검의 하늘, 검성 이검학. 자네들은 운이 좋아.”
매화검 영호준이 싱글거리며 말했지만 후기지수들 중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성 이검학.
강호 무림에서 홀로 무림맹에 비견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
사람으로서 감히 검의 하늘이라 일컬음 받는 이, 그가 바로 검성 이검학이었기 때문이다.
***
짹짹, 포로롱.
방문자들에 놀란 와룡헌의 새들이 날갯짓을 했다.
늘 적막하던 평소에 비하면 오늘의 방문은 새들이 놀랄 만한 파격이라 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관지부는 목소리를 낮추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이곳 와룡헌이 무림맹 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신승께서는 손님과 함께 계십니다. 부디 언행을 각별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숙인 관지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당부했다.
“손님이시라면 어떤 분이신지요?”
소궁주가 물었다.
북해빙궁 일행을 청해 놓고 다른 손님과 있다는 건 의외의 일이다.
예상치 않았던 방문일 수도 있겠으나, 북해의 일행을 기다리게 하지 않고 함께 만나게 하는 것은 이것이 의도된 것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관지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승의 일을 허락 없이 발설하는 것은 그에게 허락된 일이 아닐뿐더러, 그가 공경을 표하는 대상은 신승이지 북해 일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궁주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후우.”
그녀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신승과 함께 있는 손님이라면 결코 예사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 옳다.
사박.
소궁주는 걸음을 옮겨 와룡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뒤를 빙설과 빙혼이 뒤따르고 마지막으로 운현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현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지만, 관지부는 여전히 허리를 펴지 않은 채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포로롱.
방문자들에 놀란 새들이 날갯짓을 하며 나뭇가지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와룡헌은 운현의 생각보다 허름했다.
몇 그루의 볼품없는 나무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몇 마리의 작은 새들, 그리고 꽃보다 잡초가 더 많이 보이는 정원.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대단한 곳인 것 같더니 이거 영…….’
관지부는 와룡헌에 지극한 경의를 보였다.
게다가 신승 불영 대사라면 환우오천존 중의 한 사람인, 고수 중의 고수가 아닌가?
비록 북해빙궁의 일행으로 묻어오기는 했지만 운현은 와룡헌으로 들어서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 와룡헌의 첫인상이 운현의 기대에 영 미치지를 못한다.
‘물론 건물보다야 사람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게 허름한 것 같은데?’
자금성의 금지(禁地)는 누구나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난다.
일단 건물이 크고 웅장하며, 거대한 황금빛 이중 지붕에는 작은 조각상들로 등급을 표시한다.
호랑이 같은 금의위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것은 물론이요, 자그마한 것 하나라도 절대 소홀히 다루어지는 법이 없다.
그런데 현재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무림맹의, 사실상 맹주인 신승 불영 대사의 거처가 이처럼 허름하다는 것이 운현에게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박사박.
이리저리 둘러보는 운현에 비해, 소궁주는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일행의 눈앞에 와룡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헐헐, 어서들 오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