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남해의 검
‘그래도 여기는 괜찮군.’
운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봉지회 참가자들을 위한 것일까? 이 비무장으로 오는 길은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도 없고.’
평소에도 이러한지, 아니면 지금만 그런지는 몰라도 비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수련을 하고 싶은 운현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이었다.
저벅, 저벅.
운현은 거침없이 비무대로 올라갔다.
밑에서 바라만 보던 비무대에 올라서니 새삼 어제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별 흥미를 끌지 못했던 비무들에서부터 운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남궁비연과 파진한의 비무, 그리고 그 엄청난 기세의 고수까지.
“후우우.”
운현은 눈을 살짝 감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와 함께 운현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머릿속에 가득하던 생각들도, 밤새 가슴 두근거리게 했던 고수의 눈빛도 사라지고 어느새 한 자루 검만이 운현의 마음속에 뚜렷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운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응?’
막 수련을 시작하려던 운현은 눈을 떴다.
저편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 친구는…….’
그는 운현이 이미 아는 사람이었다.
‘어제 그 청년이군. 파진한, 남해검문이라 했던가?’
비무대로 향하던 파진한은 운현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운현은 파진한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제야 운현을 알아 본 파진한도 천천히 비무대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비무대에서 내려선 운현이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파진한 역시 조금은 딱딱하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남해검문의 파진한입니다. 북해빙궁 분들과 함께 계시던……, 학사님이시군요.”
그가 운현을 ‘학사’라 부른 것은 소궁주가 그리 부르는 것을 들은 때문이리라.
북해빙궁의 매력적인 소궁주에게는, 남자든 여자든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저는 운현이라 합니다. 아직 이른 새벽인데 여기 나오신 건…….”
운현은 자신의 추측이 틀렸기를 바라며 파진한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운현의 기대를 저버렸다.
“네. 잠시 수련을 할까 해서 나왔습니다.”
“아, 네…….”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운현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실망의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늘 새벽 수련은 물 건너갔다는 사실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
“하아!”
탁.
남해검문의 파진한은 강하게 검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검을 거둬들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
기본 동작을 마친 파진한은 힐끔 비무대 옆에 서 있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수련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도 운현은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본래 타인의 수련을 보는 것은 무림에서 엄히 금지된 일이다.
하지만 방금 파진한이 한 동작은 외부에도 잘 알려진 것이고, 상대가 무인도 아닌 문사인지라 파진한 역시 별말을 하지 않았다.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먼저 왔는데 수련도 못하고 밀려난 것이 억울한 데다, 관심이 있던 파진한의 수련이나 한번 보자는 마음으로 비무대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음…….’
파진한은 잠시 고민했다.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이미 날도 꽤 밝았다.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문사에게 무어라 하느니 그냥 수련을 이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휘릭, 탁.
파진한은 검을 공중에 한번 털어 내고는 검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비무대를 내려가려 몸을 돌리던 파진한은, 문득 들려온 운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실례입니다만…….”
파진한의 눈살이 반사적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묻는 파진한의 표정은 딱딱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이 자리에서 모욕을 당한 다음이다.
운현 역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처참한 꼴을 본 사람이니 파진한의 얼굴이 굳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파진한은 눈살을 일그러뜨리며 운현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으음.’
운현은 말을 꺼낸 것을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방금 수련을 보고 있자니 어제 비무에서 보여 준 검로에 대해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낸 것인데 상대의 반응을 보니 심사가 그리 편치 않은 듯한 것이다.
“크흠.”
그러나 이미 말을 꺼낸 다음이다. 게다가 눈총까지 벌써 받았으니 궁금증이라도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검로가 상당히 독특한 것 같은데, 혹시 파도나 물결의 움직임 같은 것들과 상관이 있는 것 아닌가 해서…….”
꿈틀.
파진한의 눈썰미가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운현은 얼른 수습을 시도했다.
“아니 그저 그런 느낌이 들어서 물어본 것뿐이니 마음 쓰지 마시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남해의 검을 알아보시는 것을 보니 평범한 학사님은 아니시군요. 무슨 고견이라도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기탄없이 말하라지만 말투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운현은 한 손을 내저었다.
“무슨 고견이랄 게 있겠소. 그저…….”
고견은 아니지만 해 주고 싶은 말은 있었다.
아니, 사실 어제 비무에 대해서도 그리고 오늘 수련에 대해서도 운현은 할 말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분위기에서 말했다간 당장 결투 신청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저 뭐랄까, 검이 움직이는 것이 마치 거센 파도의 기세 같아서……, 그래서 그런 것뿐이오.”
그 말에 파진한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남해검문은 해남도의 명문 검파다. 그리고 남해검문의 검법은 운현의 말과 같이 거센 파도와 몰아치는 폭풍 같은 기운을 중요시한다.
파진한도 검법을 익히며 누누이 그런 기운을 담으라 하는 말을 들었으니, 지금 운현의 말은 어쩌면 칭찬이라 할 수 있었다.
저벅.
그러나 파진한은 내색하지 않았다.
파진한은 비무대를 내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각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후우.”
그가 사라지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 청년도 꽤나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군.”
어제 비무를 보며 나름 호감을 가진 상대였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말을 꺼냈는데 알고 보니 호감을 가진 건 운현 자신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리라.
그는 어제 이 자리에서 모욕을 당한데다가, 자신은 아무리 봐도 문사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래도…….”
쉭.
운현은 빈 손을 움직여 방금 그가 보여 주었던 검로 중 하나를 흉내 내어 보았다.
“이 부분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건 상당히 인상적인데? 여기서 살짝 여유를 가진다면 날카로움을 더 잘 살릴 수 있겠지만…….”
말해 줘도 받아들일 리는 없을 것이다. 운현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슥.
운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하늘은 밝아 있고 이제는 사방에서 조금씩 인기척도 나는 듯했다.
벌써 시간이 한참 흘러 버린 것이다.
운현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검로는 상당히 독특하고 느낌도 좋은데……, 아깝군.”
비무대를 떠나는 운현의 눈앞에는 방금 전 파진한이 보여 주었던, 그리고 어제 비무에서 보았던 검로가 가득 펼쳐지고 있었다.
“아까워…….”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용봉지회의 둘째 날은 첫날과는 달리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본래 용봉지회는 무림맹 소속 후기지수들 간의 유대와 소속감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비무 같은 것은 첫날의 일일 뿐, 일정 대부분은 무림맹을 소개하고 이름이 알려진 선배들을 만나는 자리들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무림맹 체제의 결속을 굳게 하고 서로의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다.
물론 각파 후기지수들의 서열을 정한다는 용봉지회의 또 다른 암묵적 목적 또한 분명히 존재했기에, 참가자 간의 날카로운 견제 역시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견제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것은 파진한처럼 낙오자로 취급되는 사람들과, 그리고 북해빙궁과 같이 모두에게 오직 견제의 대상만이 되는 경우, 그리고 운현과 같이 처음부터 아예 대상도 되지 않는 경우였다.
‘이건 정말 지루하군.’
운현은 지루함을 참을 수 없었다.
아까부터 이어지는 말이라고는 무림의 정세나 무림맹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말들 뿐이었다.
그 내용 또한 구체적인 것들은 없이 그저 두리뭉실한 공치사들뿐이라 운현이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서로에 대한 견제를 놓치지 않는 소위 후기지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한심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쯧. 이 사람들은 촉망받는 후기지수가 아니라, 후기지수가 될 것이라고 촉망받는 사람들이었나 보군.’
어제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었던 진짜 고수를 만나고 나서 분명히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고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이 사람들이 다 고수면 정말 지나가는 사람 중에 고수 아닌 사람이 없겠지.’
용봉지회는 삼 년마다 열린다.
그 참석자들이 전부 고수라면 그야말로 무림에는 발에 걸리는 사람마다 모두 고수일 것이다.
그러니 용봉지회는, 과거시험으로 비교하면 예비시험에 불과한 것이리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그러므로 무림맹은 각 문파들 간의 협의를 가장 중요시합니다. 중요한 결정은 항상 대의사청의 결의를 거치고, 그 결의에 따라 특별한 목적을 지닌 하위 조직이 구성됩니다. 그리고 일단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무림맹 차원에서 즉각적인 무력행사가 가능합니다. 이것은 과거 정사대전의 참혹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것으로서…….”
운현이 지루해 하는 것과 상관없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설명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것이 무림맹의 대강입니다. 혹시 질문 있습니까?”
질문은 없었다.
비록 참가자들이 각 문파에서 후기지수로 손꼽히는 사람들이라 해도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섣불리 나서지 않으니 결과적으로 질문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물론 운현에게도 질문을 하고 싶은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 잠시 쉬고 나서 다음 일정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중한 인사로 무림맹 수석 서기의 강연은 끝이 났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석 서기 역시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간단히 자신의 서책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고 뒤이어 찻잔을 받쳐 든 시녀들이 들어왔다.
웅성웅성.
차가 놓이기 시작하자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잡담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어제도 그랬듯이 무리는 여전히 나누어져 있었지만 대화의 주제만은 똑같았다.
“글쎄? 나도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소. 혹시 사마 공자께서는 모르시오?”
화산파의 사마건은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도 모르시는 걸 나라고 어찌 알겠소?”
“하지만 어제 매화검께서 뒤를 쫓아가지 않았소? 사마 공자께서는 매화검과 같은 사문이시니 무슨 말이라도…….”
“대사형은 그런 분이 아니시오. 이곳에 있는 동안은 모두가 무림맹 소속이라고 하신 말씀을 못 들었소?”
사마건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사람들은 그가 어제 매화검 영호준을 찾아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매화검에게 꾸중을, 방금 자신이 한 말과 똑같은 내용으로 들었다는 사실도.
“어제 그 분은.”
들으란 듯 울려 퍼진 누군가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환우오천존 중 한 분이실 거요.”
말을 꺼낸 사람은 번듯한 의복을 차려입은 제갈세가의 청년, 제갈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