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66화 (66/530)

066화. 품 안에 들어온 용

“내가 왜?”

불영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강호 무림을 쥐락펴락하는 무림맹 한복판을 차지하고 앉았는데 내가 왜 여길 버리겠나? 나 같은 땡중은 이런 곳에서 호의호식하는 게 제일 좋아, 흘흘.”

무림맹 한복판을 차지하고 앉았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신승이라는 이름이야말로 무림맹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영의 말은 마치 남의 말을 하듯 어딘가 허망했다. 그의 거처 역시 호의호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탁.

“그런다고 소림이 자네를 포기할 것 같은가?”

강렬한 눈빛으로 검성이 말했다.

“그런 세상은 이미 지나갔네. 자네가 살아 있는 이상 소림은 절대로 자네를 포기할 수 없어. 그러니 자네의 기다림은 결코 보답받지 못할 걸세.”

그것은 친우를 향한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불영은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였다.

“사서 고생을 하고 싶으면 자네나 하게. 나는 이렇게 살다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신승 불영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죽을 테니까.”

후루룩.

차 마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검성 이검학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쪼르륵.

불영이 다시 찻잔을 채우는 사이, 검성은 식어 버린 찻잔을 한 손으로 쥔 채 고개를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꽃보다는 잡초가 더 많은 정원을 바라보며 검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잡초를 기르는 건가, 꽃을 기르는 건가?”

“쯧쯧. 멍청하기는.”

불영이 혀를 찼다.

“세상에 누가 잡초를 기르겠나? 허나 꽃보다 잡초가 더 많이 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니, 잡초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뿐이지. 그러니 자네도 마음을 비우고…….”

“잡초가 무성한 것이 순리라면.”

검성의 담담한 목소리가 불영의 말을 끊었다.

“그중에서 꽃을 찾아 나서는 것이야말로 도(道)가 아니겠나?”

그 말에 불영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자네가 나랑 말싸움을 하자는 건가? 설법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중들이란 걸 잊었나 보구만.”

검성은 피식 웃었다.

친우와, 특히 불영과 말싸움을 할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한때 괴승이라고까지 불렸던 불영을 말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잡초를 기르건 꽃을 기르건 상관 않네만, 품 안에 들어온 용은 놓치지 말게.”

쏴아아.

바람이 와룡헌을 스치며 정원의 풀과 꽃들을 흔들고 지나갔다.

난데없는 말을 던진 검성은 더 이상 말이 없고 불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검성을 쳐다보았다.

“용이라…….”

두 손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불영이 말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놀라게 했구만? 쯧쯧, 사람이 그 나이 먹도록 자기 성질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불영은 검성이 용봉지회에서 일으킨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꾸짖듯 말하는 불영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검성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내게 검을 세우더군.”

검을 세웠다는 것은 실제 칼을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실 그대로 말한 것이기도 했다.

그 순간 검성 이검학이 느낀 것은 자신을 향해 칼날을 빛내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이었으니 말이다.

“검을 세웠다고?”

신승 불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흠, 이번 용봉지회에 그런 야수 같은 아이가 있었던가?”

길들지 않은 야수라면 그럴 수도 있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무조건 이빨을 세우는, 맹수 같은 성정을 가진 이가 무인 중에는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검성 이검학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세.”

탁.

찻잔을 내려놓으며 검성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살기는 없었네. 적의도 없었고. 기운이 정순하고 올곧은 것으로 보아 오히려 어떤 현기 같은 것이 느껴지더군.”

“현기?”

현기라면 곧 현묘한 기운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나 도가의 심법이 가지는 특성과 대단히 가깝다.

“그렇다면…….”

“승려는 아니었으니 딴생각은 말게. 물론 도인도 아니었고. 어째서인지 문사의 차림을 하고 있었네만…….”

말을 마친 검성이 빈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내게 겨눈 것은 분명 검이었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를 검성이 아니다.

그때 일을 돌이켜보는 듯 검성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서.”

불영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이제부터 그 아이와 한바탕 드잡이 질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직은 아닐세.”

검성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리 먼 일은 아닐 테지. 나는 그가 앞으로 보여 줄 모습을 매우 기대하고 있다네. 그는…….”

찻잔을 쥐며 검성이 말했다.

“내 한월(寒月)을 울게 한 사람이니까.”

한월은 검성의 애검이다.

그 한월을 울게 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검성 이검학에게도, 그리고 신승 불영에게도.

“흘.”

잠시 후, 불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놈이 귀찮은 일을 가지고 온 것 같군그래.”

사뭇 기쁜 어조로 불영이 말했다. 그러나 뒤이어 진중한 검성의 목소리가 바로 흘러나왔다.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게.”

검성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러나 불영은 오히려 발끈했다.

“아니, 그럼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이렇게 남의 호기심을 자극해 놓고? 자네 혹시 내가 속 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겐가?”

쏘아붙이는 불영에게 검성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네가 그를 만나면 그의 앞날이 순탄할 것 같은가?”

검성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영도 잘 알고 있었다.

“끄응.”

불영은 얼굴을 구겼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를 견제하느라 신경전이 팽팽한 무림맹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승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거대 문파들이 그에게 접근할 것이고, 그를 이용하려는 암투와 음모 속에서 그의 일상은 단번에 일그러지고 말 것이다.

불영이 얼굴을 구기고 있는 동안 검성은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그러다 문득 그제야 생각난 듯 검성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북해빙궁에도 괜찮은 아이가 한 명 있더군. 그와 함께 있는 걸 보니 일행인 듯한데, 어쩌면…….”

검성은 말을 멈췄다. 갑자기 불영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해빙궁? 아까 자네가 말한 그 용이 북해빙궁과 함께 있었단 말인가?”

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그동안 북해빙궁도 무시 못 할 정도가 되었더군.”

“헐헐헐.”

불영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부처님께서도 이 늙은 중이 속 타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신 게로군. 헐헐헐.”

난데없이 함박웃음을 짓는 불영을 보며 검성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린가?”

“이것도 다 인연일세, 인연. 그 아이가 이곳에 온 것도, 자네가 그 아이를 알아본 것도 다 인연인 게야, 아미타불…… 헐헐.”

불영은 난데없이 불호마저 외며 기뻐하고 있었다.

검성 이검학의 찌푸린 눈매는 펴지질 않고 신승 불영 대사의 웃음소리는 쉽게 멈출 줄 몰랐다.

***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운현은 조용히 숙소의 문을 열었다.

후욱.

싸늘한 새벽 공기가 밀려들어 코끝을 간질였지만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한 그에게는 그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반가웠다.

“후우우.”

운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뱉었다. 마치 지난밤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들을 멀리 쫓아 버리기라도 하듯.

슥.

운현은 고개를 들어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두운 새벽하늘을 바라보자 밤사이 혼란했던 가슴도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벌써 새벽인가. 결국 이렇게 밤을 새웠군.’

운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맹에서의 첫날이건만 운현은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특별히 밤을 새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어제 만난 그의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잠이 달아나 버렸다.

“고수라…….”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제 만난 그는 운현이 자금성을 나와 처음으로 만난 진짜 고수였다.

그리고 그가 운현에게 보인 기세는, 확실히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일종의 적의(敵意) 같은 것이었다.

‘아마 내가 검을 세웠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그 이상한 느낌이 먼저였는데?’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 주었던 그 강렬한 존재감은 아직도 운현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음…….”

그 눈빛을 떠올리며 운현은 신음을 흘렸다.

그 강렬한 눈빛은 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잊고 싶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라면 어떤 검로를 보일지 감히 상상도 안 되는군.”

자금성을 나온 이후, 운현은 무인들을 만날 때마다 눈을 빛내며 그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중에는 운현의 흥미를 끄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빙혼이라거나 혹은 매화검 영호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한눈에 구분이 갔고 자연히 운현의 관심을 끌었다.

‘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행 중에서도 시녀로 보이는 빙설은 항상 말이 없고 무표정하며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운현은 빙설이 유독 눈에 밟혔다.

‘혹시 내 취향이 그런 여자였나?’

어쩌면 자신도 모르던 취향을 발견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진 않다.

여성적인 매력을 말하자면 북해의 소궁주에 비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잡생각은 그만하고.’

사박.

운현은 고개를 저으며 숙소를 나섰다.

‘그나저나 벌써 새벽인데 꽤 조용하군.’

사방은 조용했다.

용봉지회 참가자들은 물론이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무림맹이라기에 다들 무공 수련에 열심일 줄 알았더니…….’

무인이 새벽부터 수련을 시작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무림맹은, 적어도 숙소 주변은 사뭇 조용하기만 했다.

‘다들 피곤한 걸까? 아니면 설마 방 안에서 수련을 하나?’

선비라면 대부분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책을 열어 하루를 시작한다.

자금성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물며 무인이라면, 더구나 무림맹이라면 벌써 수련을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런데 정작 수련하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운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새벽의 정적 속에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혹시 내가 수련할 만한 곳이 있을까?’

지금 운현이 밖으로 나온 이유는 새벽 산책을 즐기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어제 그 고수의 눈빛 탓일까?

운현은 밤새도록 가슴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목검을 구해 들고 나가서 수련을 하고 싶었다.

새벽이 밝자 그 열망이 더더욱 커져서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림맹 밖으로 나갈 수야 없겠지만…….’

이곳은 무림맹이다.

들어올 때의 그 삼엄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림맹이니까, 어쩌면 적당한 연무장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운현의 생각이었다.

사박, 사박.

새벽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운현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적당한 연무장’조차 쉽사리 찾을 수 없음을 운현이 깨닫는 것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우.’

어제 그 비무대를 바라보며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맹은 넓었지만 운현이 갈 수 있는 곳은 대단히 한정되어 있었다.

뭔가 있을 듯한 길목이면 어김없이 무사들이 지키고 서서 통행을 막았다.

결국 운현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