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진짜 고수
“후우.”
기세를 거둔 검성은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지.”
저벅.
검성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주저앉은 관지부는 감히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관지부만이 아니었다.
호위하던 무사들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거, 검성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인다더니…….’
관지부는 오싹 오한을 느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검성과 검을 나눈 사람은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때문에 검성에 대한 소문들이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관지부 역시 그런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검성에게서 기세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 관지부는 말 그대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흐어어어.”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관지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검성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제는 그 뒷모습조차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관지부는 벌떡 일어서며 다급하게 말했다.
무림맹의 위세를 자랑하고 싶은 생각 같은 건 더 이상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 검성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와룡헌으로 안내하느냐가 관지부의 최대 과제였다.
탁탁탁.
어느새 꽤 앞서 걷고 있는 검성을 향해 관지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덕분에 왜 검성이 그런 기세를 뿜어냈는지,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의문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앞서 걸어가는 검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물러 있는 것 역시, 관지부는 보지 못했다.
***
“크윽.”
용봉지회의 참가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중 일부는 내상마저 입은 듯 얼굴색이 좋지 않았고, 몇몇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갑작스레 폭풍에 휘말렸다가 한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그런 경험이었다.
그때였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갑자기 매화검 영호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선언은 그렇잖아도 당황한 후기지수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아직 비무를 하지 못한 몇 사람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매화검 영호준은 이미 자리를 뜨고 있었다.
타닥.
항상 느긋하던 매화검 영호준은 가벼운 경공까지 사용해 급히 비무장을 떠났다.
몇 사람은 영호준이 사라진 방향이 방금 전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오던 쪽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 혼란에 빠져 있었다.
웅성웅성.
용봉지회 참가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나름대로 사태를 유추해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제대로 설명해 줄 사람은 그들 중엔 없었다.
‘방금 그건.’
모용미는 매화검 영호준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분명 누군가의 기세였어.’
비록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모용미는 분명히 보았다.
기세가 사라지는 순간, 먼 곳에서 몇 사람이 자리를 뜨고 있는 것을.
그리고 매화검 영호준이 그쪽으로 사라진 것은 그녀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 기세를 뿜어낼 만한 사람이라면…….’
모용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무리 감정적으로는 믿어지지 않더라도 가능한 논리적 추론이 하나뿐이라면 대답은 분명하다.
‘환우오천존 중의 한 명.’
모용미가 환우오천존을 직접 만나 본 것은 아니다.
조금 전 그 기세가 과연 환우오천존의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천하에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들뿐일 것이다.
‘만일 환우오천존이라면 대체 누가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우리에게 그런 기세를 뿜어낸 것일까?’
모용미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리고 있는 후기지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만일 환우오천존이라면 후기지수들에게 그런 적의를 발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면 우리 중 특정한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모용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명문 세가와 문파의 후기지수라지만 어찌 감히 환우오천존에 비할까?
어린아이를 진지하게 상대하는 어른이 없듯이 환우오천존이 후기지수에게 적의를 보낸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매화검 영호준이 그나마 가장 근접한 인물이겠지만 그조차 환우오천존에겐 어림도 없다.
“후우.”
모용미는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진실은 아직 그녀가 확인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었다.
***
“그가, 누구였지요?”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굳은 안색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두려운 인물이군요.”
딱딱하게 굳은 빙혼의 나지막한 대답이 이어졌다.
어떤 일에도 대답을 주저하지 않는 그가 이번만큼은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언제나 차가운 시선을 담고 있는 눈동자에도 지금만큼은 두려움이 엿보였고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슥.
소궁주는 고개를 돌려 시녀 빙설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검성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 늘 그렇듯이 아무런 말이 없다.
살짝 입술을 깨물고 눈살을 찌푸리던 소궁주는 그제야 운현이 경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학사님, 괜찮으신가요?”
“네?”
운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려 소궁주를 바라보았다.
소궁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놀라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이젠 괜찮습니다.”
“아……, 네.”
아름다운 소궁주가 웃음을 머금었지만 운현의 대답은 어딘가 무성의했다.
운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검성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소궁주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훗.’
글만 읽던 학사가 방금과 같은 일을 겪는다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이 정도라면 제법 의연히 대처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궁주는 운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검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운현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것은 지금 그의 관심이 전혀 다른 것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갑자기 나타난 검성의 존재가 가져온 커다란 혼란이었다.
‘그는 누구지?’
거리를 너머 그의 시선을 마주했을 때 느낀 그 엄청난 전율.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 오는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존재감.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뿜어냈던 그 폭풍 같은 기세.
그것은 이제껏 운현이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슥.
운현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땀이 진득한 텅 빈 손은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음의 검이 이토록 강렬하게,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난 것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엄청난 기세를 결코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빙혼을 보았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그것은 매화검 영호준을, 운현이 보기에 상당한 실력자이자 아마도 신진 고수 중 하나일 것이 확실한 그를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용봉지회의 다른 참가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누가 실력이 괜찮을 것 같고, 누가 더 성취가 깊어 보인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처럼 밑도 끝도 없이 온몸이 긴장되기는 처음이었다.
꾹.
운현은 텅 빈 손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처음 겪는 일이다. 하지만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짜 고수구나…….’
그가 바로 고수다.
이야기에서나 듣던, 그리고 운현이 그토록 만나보기 원했던 바로 그 고수 말이다.
운현이 굳은 얼굴로 검성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소궁주 역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 일렁이고 있었다.
주변은 여전히 어수선했고 참가자들은 쉬이 비무대를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각자 자신들의 생각에 잠긴 채, 용봉지회 첫째 날의 공식 일정은 끝이 났다.
***
와룡헌은 작고 평범했다.
무림맹의 커다란 전각들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그 모습은 마치 갑자기 다른 장소에 떨어진 듯한 착각마저 일으킬 정도였다.
오래된 문과 아담한 정원, 그리고 무림맹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지붕.
뒤편에 자그마한 채소밭까지 있는 이곳이 바로 무림맹의 정점이자 시작인 신승 불영 대사의 거처, 와룡헌이었다.
쏴아아.
지나는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고 정원 탁자 위에서는 찻잔이 따뜻한 온기를 피워 올렸다.
찻잔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은 이곳 와룡헌의 주인, 신승 불영과 그의 손님인 검성 이검학이었다.
단단한 체격을 가진 검성에 비해, 신승 불영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늙은 승려의 모습 그대로였다.
후루룩.
신승 불영이 찻잔을 들더니 소리를 내며 차를 마셨다.
반면 검성 이검학은 반쯤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다.
후룩, 후루룩.
불영은 소리를 내며 차를 들이키기도 하고, 가끔씩 입을 오물거리며 찻잎을 씹어 넘기기도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불영의 찻잔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자 그는 검성을 흘낏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차가 입에 안 맞냐?”
슥.
검성은 눈을 떴다. 그리고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겐가?”
“흠, 차가 식으면 향이 다 날아가는데…….”
주름 가득한 불영은 엉뚱한 소리를 하며 검성의 찻잔을 향해 주름진 손을 뻗었다.
탁.
그의 손끝이 검성의 찻잔에 닿으려는 순간, 검성의 듬직한 손이 찻잔을 잡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네. 아직도 부족한가?”
자신을 쳐다보는 검성의 강렬한 눈빛에 불영은 슬그머니 손을 거뒀다.
“그냥 식었나 보려고 한 것뿐이네. 차 한잔 가지고 너무하는군.”
검성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언뜻 들으면 단순히 투덜대는 것 같지만 신승 불영의 말은 언제나 애매모호하고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말속에서 진의를 파악하는 건 언제나 듣는 사람들의 몫이다.
검성이 눈살을 찌푸리는 동안 불영은 입을 비죽였다.
“됐네. 그깟 차, 다시 우려내면 되지.”
불영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한 손으로 찻주전자를 잡고는 자신의 찻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소매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붙들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늙은 승려다.
쪼르륵.
찻잔이 차오르자 불영은 조심스럽게 찻주전자를 내려놓고는 두 손으로 잔을 잡았다.
“허어, 좋다.”
불영은 눈까지 지긋이 감고 만족스러운 듯 차를 마셨다.
후루룩.
“그러는 자네는 또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닌 겐가?”
차를 마시던 불영이 문득 검성에게 물었다.
“천산일세.”
검성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고수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네만 만나지 못했네. 천기를 보니 고수가 출현한 건 맞는 것 같은데 한동안 천산을 돌아다녀 봐도 만날 길이 없더군.”
“흘흘, 천기는 무슨…….”
불영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결국 소문만 듣고 갔다가 헛고생한 것 아닌가? 천기니 뭐니 괜한 하늘 탓 말게.”
노골적인 비아냥이었지만 검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군.”
진지한 표정으로 검성이 말했지만 불영은 입을 비죽이고는 다시 차를 홀짝거렸다.
검성은 불영을 묵묵히 쳐다보더니 문득 말했다.
“차라리 이곳을 나가는 것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