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적의(敵意)
쟁쟁한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모이는 용봉지회는 현 무림맹의 위세를 보여 주는 훌륭한 예였다.
하지만 검성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촉망받는 후기지수라 해도 검성에겐 간신히 걸음마를 떼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을 테니까.
“잠시 가 보시겠습니까? 검성께서 참관하신다면 저들도 크게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옆에서 관지부가 넌지시 권했다.
검성에게 무림맹의 위세를 보여 줄 좋은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말이다.
“아니, 참관 같은 건 필요 없네.”
그러나 검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설픈 후기지수들의 비무를 지켜볼 생각 같은 건 없다.
다만 궁금한 것은 자신이 이 땅을 떠나 있던 몇 년 사이, 쓸 만한 후기지수를 길러낸 문파가 있는가 하는 정도였다.
그것이야말로 각 문파의 현 상태를 무엇보다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저 지나치면서 한번 볼 정도면 되네.”
그저 스치는 정도면 된다.
검성의 안목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옥석을 가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관지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검성이 관심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스러웠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뿌듯한 자부심을 감추지 못하며 관지부는 검성을 안내했다.
***
챙, 채앵.
비무대에서는 날카로운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남해검문의 파진한이 몰리는 형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챙.
파진한의 공격이 남궁비연의 검에 막혔다.
파진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신중해야 했어.’
여자라고 쉽게 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가 쾌검과 현란한 초식 위주의 검을 펼치리라 예상한 것이 실수였다.
남궁비연의 섬세하고 빠른 검격 속에는 예상외로 무거운 기세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과연 남궁세가다.’
도도한 장강의 흐름처럼 밀려 들어오는 검로, 그리고 십 수 년간 쌓아 온 남궁비연의 내력은 과연 남궁세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했다.
하지만 남해검문의 검 역시 그에 못지않다고 파진한은 자부했다.
그러니 성급했던 자신의 판단이, 그로 인해 초래된 지금의 열세가 더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휘리릭.
“웃.”
타아앙.
파진한은 급하게 몸을 틀며 남궁비연의 검을 쳐 냈다.
그의 쾌검은 공세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지금처럼 수세에 급급해서는 본래의 실력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남궁비연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점점 더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고, 파진한의 검은 점차 그 날카로운 빛을 잃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파진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패배는 불 보듯 뻔하다.
‘이렇게 되면…….’
그가 노련한 무인이었다면 끝까지 버티며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다.
남궁비연은 젊고 경험이 부족하며 승기를 잡은 것에 살짝 흥분하고 있다.
참고 기다리며 시간을 끌면 반드시 반격의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젊고 경험이 부족한 파진한은 먼저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이 상황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악수(惡手)였다.
“하아!”
파진한의 검이 남궁비연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자신의 목숨마저 도외시한 듯 무모한 공격이었다.
‘이건?’
남궁비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쉬릭.
그녀의 검이 파진한의 무모한 공격을 걷어 내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파진한의 몸이 휘청하는 듯하더니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무리하게 남궁비연을 공격하려다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남궁비연은 그것이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던 파진한의 눈빛은 마지막 순간까지 전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즉시 발을 굴렀다.
휘리릭.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팽이처럼 회전했다.
화사한 옷자락이 꽃처럼 허공에 피어나고, 그녀의 빈 자리를 파진한의 검이 헛되이 꿰뚫었다.
휙.
‘큭.’
파진한은 이를 악물었다.
바닥에 몸을 던져가며 시도한 자신의 한 수가 무위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탁.
남궁비연이 가볍게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칼 끝이 파진한의 눈 앞에 멈춰섰다.
“계속할까요?”
남궁비연이 말했다.
발갛게 홍조를 띄운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파진한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졌…….”
“푸하하. 저게 뭐야?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고도 지다니.”
누군가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파진한의 말을 끊었다.
파진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남궁비연도, 그리고 운현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그는 바로 제갈세가의 후기지수, 제갈룡이었다.
“그야말로 꼴불견이로군. 남해검문의 검식은 뇌려타곤이 특징인가 보지?”
뇌려타곤은 나귀가 땅바닥을 뒹굴듯이 다급하게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모습을 말한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부끄러워하는 그 동작으로 파진한의 마지막 한 수를 폄하한 것이다.
‘유치하군.’
운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은 악의와 시기심이었다. 파진한과 남궁비연 두 사람의 열띤 비무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 간 것을, 제갈룡은 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장된 비아냥은 쉽게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남해검문에 적대적인 청년들이 웃기 시작했고, 그 웃음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큭큭, 크하하.”
“호호호.”
한번 분위기가 형성되면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어느새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속에 파진한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로서는 억울한 매도였지만 패배한 자신에게는 변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쯧.’
운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제갈룡의 행태나 그에게 동조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운현은 대단히 불쾌했다.
그간 가지고 있었던, 용봉지회에 참가한 후기지수들에 대한 기대와 호감마저 단번에 식어 버릴 정도였다.
“자, 잠깐만요.”
당황해 하는 것은 파진한을 상대한 남궁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파진한이 조롱받는 지금의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만들 하세요! 그건 뇌려타곤 같은 것이 아니었…….”
당황한 남궁비연이 검을 거두고 무엇이라 말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우우욱.
순간 운현은 느꼈다.
안개처럼 흐릿한, 그러나 분명한 적의를 품은 기세가 뒤쪽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이건!’
기척도 없었다. 전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운현 외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웅.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상황을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어느새 운현의 마음속에서 한 자루의 검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좀 더 가까이 가시지요.”
관지부가 넌지시 말했지만 검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선 알아보기도 힘들 텐데…….’
용봉지회 참가자들과 검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관지부는 애가 달았다.
사실 그는 내심 검성이 용봉지회 참가자들과 인사라도 나누길 바랐다.
하지만 검성은 묵묵부답,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더 이상 가까이 가지 않는다.
이래서야 인사는커녕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터이다.
‘이건 뭐 본 것도 아니고, 안 본 것도 아니고.’
관지부는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검성 역시 실망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으음.’
깊은 눈으로 후기지수들을 응시하며 검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아차리지도 못하는가?’
젊음을 뽐내듯 화려하게 차려입었으나 정작 열정과 패기는 없다.
서툴더라도 그 누구보다 순수해야 할 모습은 보이지 않고 세파에 물든 탁한 눈빛들만 가득할 뿐이다.
예전 그들의 사부와 사형 들이 그러했듯이.
‘기대가 지나쳤나보군.’
은밀한, 그러나 분명한 적의를 보냈다.
뛰어난 자라면 오한을 느낄 것이고 고수라면 즉시 무기를 들 것이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아니, 심지어 알아차리지도 못 한다.
검성은 씁쓸한 표정으로 기운을 거둬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휙.
검성의 깊은 눈이 번뜩 빛났다.
‘저건!’
그 순간 검성은 보았다.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든 먼 거리였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검성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자신을 향해 날아온 한 줄기 기세였다.
후웅.
마치 한 자루의 칼날 같은 날카로운 기세.
자신을 향해 서슴없이 칼을 겨누는 그 기세를 인지한 순간 검성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폭풍같은 기세가 검성에게서 터져나왔다.
화아아아악.
“커헉.”
관지부가 풀썩 주저앉고 호위 무사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끄으윽.”
악다문 호위 무사들의 잇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무복이 펄럭이고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것은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폭력과도 같은 기세였다.
그리고 그 기세의 중심에 서 있는 검성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운현의 마음속에 한 자루 검이 떠오른 것과 누군가의 존재를 느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 이게 무슨…….’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마음에 검이 떠올랐다.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모습조차 제대로 분별하기 힘든 먼 거리였지만 운현은 알 수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다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의미를 잃고 사라져가는 것을.
‘헉.’
그의 존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단번에 색이 바래고, 오직 그의 시선만이 운현을 사로잡아 버렸다.
상당히 먼 거리도, 이곳이 무림맹이라는 것조차 의미를 잃었다.
이 세상에 오직 그 한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존재는 운현의 시야를 가득 채워버렸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자신이 그를 보는 것처럼 그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우우웅.
마음속의 검이 더욱 강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쥐라는 듯한 그 소리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슥.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뻗은 운현의 손이 마음의 검을 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과과곽.
폭풍과도 같은 기세가 주위를 휩쓸었다.
“꺄악.”
“크으윽.”
비명과 신음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후기지수들을 덮친 엄청난 기운은 바로 적의였다.
그것은 한 두 사람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후기지수들은 그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그 폭력적인 흐름 속에서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으랴?
그것은 후기지수들로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공포였다.
“크으윽.”
후기지수들은 반사적으로 내력을 끌어올려 그 살기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이미 후기지수들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개중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이들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비웃지 못했다.
매화검 영호준조차 지금 이것이 누군가의 적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도, 도대체 이런 기세가…….’
영호준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존재를 확인했다.
훅.
바로 그 순간, 사방에 휘몰아치던 적의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