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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63화 (63/530)
  • 063화. 사람의 우열은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화려하긴 한데…….’

    운현은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며 다른 일행을 돌아보았다.

    소궁주는 여전히 비무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빛은 냉랭했다.

    빙혼의 경우엔 조금 노골적이어서 무시하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묵직한 검로나 도도한 흐름 같은 건 전혀 없군. 저 정도라면 차라리…….’

    모용세가에서 만났던 모용진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초식은 좀 뒤쳐져도 그에게는 기개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왜 무공이 다들 비슷해 보이지?”

    “그럴 수밖에요.”

    옆에 있던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

    운현이 돌아보자 소궁주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모든 무인은 단 하나의 목표, 곧 강함을 추구하기 마련이에요. 그 과정에서 최선의 것을 택하다 보면 자연히 비슷한 결과에 이르게 되지요.”

    소궁주는 거침없이 말했다.

    “결국 누가 더 강한 무공을 익히고, 누가 더 많은 내공을 쌓느냐의 문제일 뿐이에요.”

    “어, 하지만 정파와 사파는 무공에 대한 접근 자체가…….”

    “맞아요.”

    소궁주는 운현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저들은 엄밀한 의미에선 사파가 아니니까요.”

    “사파가 아니라고요?”

    “네. 정사대전 당시 녹림과 손을 잡았었거든요. 단지 그 이유로 매도당한 것뿐이지요. 공식적으로 무림맹은 더 이상 정파나 사파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희미하게 웃으며 소궁주가 말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만요.”

    이곳의 문화에는 서툰 소궁주지만 무림 정세와 무림맹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해박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총명한 그녀가 사전 조사나 준비 없이 이곳 무림맹을 찾아오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리고 운현은 그제야 무림맹의 ‘사파’가 조금 다른 의미임을 알아차렸다.

    “그렇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공의 강함만으로 무인의 우열이 정해진다는 건 동의하기 힘들군요.”

    “네?”

    소궁주가 반문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운현은 변명하듯 말했다.

    “아, 그러니까 무공이 강한 것은 그저 하나의 기준일 뿐…….”

    “물론이에요.”

    소궁주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무공뿐 아니라 권력과 재산, 그리고 가문과 지식도 고려해야겠지요. 무공만으로 우열을 정할 수는 없어요.”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후훗.”

    난데없는 소궁주의 웃음에 운현이 놀란 눈이 되었다.

    소궁주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소궁주는 고개를 돌려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그리 간단히 사람의 우열을 정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모두가 남들보다 한 치라도 더 앞서고자 애쓰는 것이 현실이에요.”

    그녀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소궁주의 입가에선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운현도 고개를 돌려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하아!”

    비무대에서 기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무를 하는 이들도, 그리고 그 비무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소궁주의 말처럼, 한 치라도 더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열망이 그들의 눈에서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성급히 판단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금의위의 비무는 달랐다.

    그들 역시 진지하게 비무에 임했지만 비무가 끝나면 함께 고생하는 동료로 돌아간다.

    교두 일충현부터도 사심 없이 운현의 수련을 도왔으며 누군가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려 하지도 않았다.

    그토록 대단한 무공을 가졌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므로 운현은 ‘한 치라도 더 앞서려고 애쓴다’는 소궁주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탐탁지 않았다.

    ‘무인에게 무공의 의미가 고작 그 정도인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운현은 일단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학문하는 자에게 근거 없는 속단이나 잘못된 예단은 더없이 위험한 함정이니까 말이다.

    “좋아. 거기까지.”

    매화검 영호준의 목소리에 비무가 멈췄다.

    청년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무기를 거뒀다.

    어차피 이곳에서 승부를 낼 생각은 없었던 데다가 정식 비무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식적인 예를 교환한 뒤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다음은 누가 할 텐가?”

    “제가 하겠습니다.”

    한 청년이 거침없이 비무대로 올라섰다.

    몇 차례의 비무가 지나면서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남해검문의 파진한입니다.”

    청년, 파진한이 예를 표했다.

    매화검 영호준은 후기지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누가 먼 곳에서 오신 분의 예를 받을 텐가?”

    “제가 할까요?”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탁.

    한 명의 아가씨가 가벼운 걸음으로 비무대에 올라섰다.

    “남궁세가의 남궁비연입니다.”

    그녀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명문 무가의 아가씨답게 예의 바르고 우아한 인사였지만 파진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비무는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설마 자신이 상대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젊은 아가씨가 상대라면 이기건 지건 좋은 평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마 여자라고 피하지는 않으시겠죠?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비무예요.”

    남궁비연은 파진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결의를 확인하듯 검을 뽑았다.

    스릉.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쭉 뻗은 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을 보자 남해검문의 파진한 역시 진지한 눈빛이 되었다.

    “좋습니다. 기꺼이 상대해 드리지요.”

    치잉.

    남해검문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은 검을 뽑자마자 허공에 한번 내리그었다.

    휘릭.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남궁비연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의 양보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예요.”

    팟.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남궁비연이 도약했다.

    마치 춤추듯 부드러운 자세였지만 그녀의 검 끝에 서리는 기세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파진한은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카앙.

    검과 검이 격돌하기 시작했다.

    “호오.”

    비무대를 바라보던 운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앞서의 비무들에 비하면 남궁비연과 파진한은 비무에 임하는 기백부터가 달랐다.

    남궁비연의 검술은 유려하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서려 있었다.

    파진한 역시 기백과 열정으로 남궁비연의 검에 맞서 가고 있었다.

    “하앗!”

    채앵, 챙.

    검과 검이 충돌하고 검로와 검로가 얽혔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현란한 초식과 미숙하지만 진지한 검격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공방을 이어 갔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파열음 속에서 운현은 두 사람의 비무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이거 제법…… 괜찮은데?’

    운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비무란 이래야 한다.

    눈길을 끄는 현란한 초식이나 기발한 검로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비무가 보는 이들의 가슴마저 뜨겁게 하는 것은 바로 한 자루 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부딪혀 가기 때문이다.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혹은 명문 정파건 사파건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 이래야 무인들의 비무지.’

    운현이 바라던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 앞서의 비무들이, 비록 화려하고 현란하지만 지극히 가식적이고 계산적이었던 비무들이 운현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

    운현은 정신없이 비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때때로 안타까운 탄성을 속으로 삭였다.

    ‘방금 거기서 조금만 더 여유를 가졌다면…….’

    두 사람의 비무는 기백이 넘쳤지만 가끔은 미숙하고 성급했다.

    지켜보던 운현이 때로는 아쉬워하고 혹은 눈을 빛내며 그들의 검로를 분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카앙.

    남궁비연의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검이 격돌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듣던 대로 남궁세가의 검술은 대단하군. 여자라서 그런지 섬세한 면도 있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운현은 남해검문의 파진한을 쳐다보았다.

    ‘반면 저 청년은 검식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하군. 빠르고 날카롭긴 하지만 그것에 매몰되어 검식 본래의 깊이와 진중함을 잃었어. 저런 의도를 가진 검로가 아니었을 텐데 왜 저렇게…….’

    운현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아쉽군. 저 정도의 검이라면 충분히 남궁세가의 검과 승부를 겨뤄 볼 만했을 텐데.’

    누군가 그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곧 웃었을 것이다.

    남궁세가는 검왕가다.

    그런 남궁세가의 검이 어찌 변방의 무가인 남해검문과 동격에 놓일 것인가?

    그러나 운현의 보기에는 남해검문의 쾌검식 또한 절대 뒤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파진한의 성취가, 정확히는 검로에 대한 이해가 남궁비연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절대적인 격차가 아니다.

    ‘아마 앞으로 십여 합 안에 끝날 듯한데……, 아깝군.’

    남해검문의 파진한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반면 남궁비연의 검은 더욱 진중해져 가고 있다.

    본래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무너지는 법.

    운현의 예상대로 비무는 곧 일방적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

    저벅, 저벅.

    검성을 호위한 네 명의 무사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건장한 체격과 비범한 눈빛, 그리고 범상치 않은 기백은 그들이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뛰어난 무사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여느 사람이라면 압박으로 느꼈을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검성에겐 호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훈련을 잘 받은 아이들이군.’

    검성은 불쾌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강한 상대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호감을 갖는 사람이 바로 검성이다.

    강자와 비무하기 위해서라면 천 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스스로 ‘검에 미친 자’라 칭하기를 주저 않는 사람.

    마음만 먹으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만 검성은 권력보다 검에 미친 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바로 그런 검성이기에 살벌한 무사들의 기세에 오히려 마음이 누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저벅, 저벅.

    검성과 네 명의 호위무사, 그리고 관지부가 막 커다란 전각 하나를 지났을 때였다.

    ‘응?’

    앞서 걷던 관지부는 문득 발자국 소리가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검성이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관지부는 정중하게 검성에게 물었다.

    하지만 검성은 대답이 없었다.

    “무슨 불편하신 일이라도…….”

    “비무가 있나?”

    “네?”

    검성의 난데없는 질문을 관지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검성이 주시하는 방향을 쳐다본 관지부는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저들은…….”

    전각 저편, 비무대에 젊은 청년 남녀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 용봉지회의 참가자들이군요.”

    “용봉지회?”

    검성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네. 쟁쟁한 문파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대회지요.”

    관지부의 설명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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