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자유비무
‘아, 저 사람들은.’
운현이 발견한 이들은 며칠 전 서호 삼담인월에서 만난 용봉지회 참가자 일행이었다.
그때 운현을 유심히 바라보던 단아한 인상의 아가씨 역시 그 중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째 자리가…….’
운현이 확연히 알 정도로 참가자들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서호에서 운현이 보았던 이들이 속한 청년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눈빛이 사나운 청년들이 또 다른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운현이 보기에도 확연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현과 북해빙궁 일행이 속한, 나머지 참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탓인지 전각 안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정파와 사파로군요.”
“네?”
문득 들려온 소궁주의 목소리에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찻잔을 들어올리던 소궁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과거 정사대전 당시 정파를 자처하던 문파들과, 그들로부터 사파로 매도당하던 신진 문파들 말예요.”
운현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무림맹일텐데?’
정사대전 정도는 운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호 무림의 세력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비무 이야기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기지수라면 문파를 떠나 마땅히 서로를 존중하는 것 아니었나?’
운현이 알고 있는 고수들 간의 비무는, 그 치열한 대립 속에서도 언제나 서로에 대한 깊은 인정과 존중을 담고 있었다.
운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옆에서 들린 소궁주의 낮은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혹시 소궁주도 같은 마음인가 싶었지만 그 생각은 곧 깨어져 버렸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비칠 거라면 차라리 검을 뽑는 게 낫겠어요.”
찻잔을 입에 대는 소궁주를 보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북해의 상식은 조금 극단적이다.
“그건…….”
운현이 무언가 설명하려던 때였다.
저벅.
누군가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모두가 눈을 들어 발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바로 매화검 영호준이었다.
“대협!”
덜컹.
한 무리의 참가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매화검 영호준에게 예를 표했다.
정파의 후기지수들이자 운현이 서호에서 보았던 이들이 속한 무리였다.
반면 사파의 후기지수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매화검 영호준은 가볍게 답례를 한 후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반갑습니다. 나는 매화검 영호준입니다.”
매화검 영호준은 후기지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용봉지회가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은 무림맹 소속입니다.”
낭랑한 영호준의 목소리는 전각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므로 무림맹 소속으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기 바랍니다. 만일 무림맹의 이름을 실추시킨다면, 그 누구라도 반드시 문책할 것이며 그들의 문파 역시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살벌한 경고였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문책은 말 그대로 강호 무림 전체의 뜻과 같다.
그 누구라도, 설령 정파나 사파의 거대 문파라도 그 문책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매화검 영호준의 경고에 참가자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자, 여기까지가 용봉지회 책임자로서 공식적인 발언이고…….”
냉랭하던 매화검 영호준의 표정에 웃음이 번져 갔다.
조금 전까지 팽팽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날아갈 것 같은 멋진 미소였다.
“항주까지 왔는데 눈치 볼 것이 무엇이 있겠나? 다들 마음껏 즐기도록. 어차피 돌아가면 놀지도 못할 테니까 말이야.”
참가자들 사이로 웃음이 번져 갔다.
방금까지 팽팽하던 긴장 때문일까? 사람들은 웃으며 단번에 긴장을 풀었다.
“아, 그리고 검을 뽑는 건 반드시 비무대 위에서만 하게. 밖에서 검을 뽑으면 문제가 심각해지거든.”
매화검 영호준은 너스레를 떨었다.
다들 웃었지만 영호준의 말을 농담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것은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진실일 테니까.
“그리고 비무대를 내려오는 순간 모든 걸 잊어야 한다는 것도 명심하도록.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인기가 없어.”
다시 웃음소리가 번져 나갔다.
웃지 않는 사람은 북해빙궁의 일행과 운현 그리고 모용미 정도뿐, 어느새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매화검 영호준의 분위기에 이끌려 가고 있었다.
‘역시 독특하군.’
운현은 여전히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행동은 대단히 가벼워 보이지만 그의 분위기와 목소리는 모두의 눈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럼 우선 서로 자기소개를 해야 할 텐데…….”
무언가 생각하던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잠깐 몸이라도 풀어 볼까?”
갑작스런 말에 후기지수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자기소개를 한다더니 몸을 푼다는 건 무슨 뜻일까?
“자유 비무다.”
웃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으니까. 안 그런가?”
매화검 영호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전각 안에 떠돌던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매화검 영호준은 후기지수들을 비무대로 데리고 나갔다.
생각보다 커다란 비무대였는데, 이미 예정이 되어 있었던 듯 햇볕을 피할 그늘과 자리가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용봉지회의 참가자들 누구도 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비무에 대한 긴장감이 그들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자, 다들 그리 긴장할 것 없어. 이런 비무야 그저 간단한 인사 같은 것 아닌가?”
매화검 영호준이 느긋하게 말했다.
후기지수들에게 비무는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문파의 후기지수를 상대하는 것이라면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단 각자의 자존심도 걸려있는데다, 만일 여기서 실수라도 하면 평판은 곤두박질치고 말 테니까.
“걱정들 말게. 혹여 불상사라도 생길 것 같으면 내가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줄 테니까. 남자를 위해 몸을 던지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야.”
넉살 좋은 영호준의 말에 살짝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자, 그럼 누가 먼저 인사를 하겠나? 앞으로 강호 무림을 이끌어 나갈 후기지수들에게 말이야.”
영호준의 말에 그들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이다.
앞으로 문파의 중요 인물들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제가…….”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화산파의 사마건과 남궁세가의 남궁상혁이었다.
“남궁세가의 공자께 먼저 기회를 드리도록 하지.”
매화검의 말에 남궁상혁이 비무대에 올라섰다.
“남궁세가의 남궁상혁이오.”
그는 후기지수들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 중 한 청년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어느 분께서 저의 인사를 받아 주시겠소?”
그건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시선을 받은 청년이 피식 웃었다.
그는 사파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제법 영향력이 있는 청년이었다.
“내가 받지.”
저벅.
그는 비무대로 올라갔다.
“흑도회 담우천이다. 한 수 배우지.”
슥.
남궁상혁은 말없이 검을 들었다.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
관지부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 신승께 기별을 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달칵.
“신승이라……. 괴승이 그 사이 신승이 되어버렸군.”
검성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변해버린 친우의 호칭.
벗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검성은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괘념치 말게. 보나마나 아직 자고 있을 테니.”
차를 음미하던 검성이 말했다.
“좋은 차군.”
“감사합니다.”
관지부는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내심은 그리 편치 않았다.
‘아무리 검성이시라지만…….’
검성이 괴승이라 말했던 이는 바로 신승 불영 대사다.
사람들은 신승을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으로 꼽지만 사실 영향력으로는 아무도 신승을 넘을 수 없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기적처럼 무림맹을 세우고 마침내 정사대전을 끝낸 사람.
스스로 맹주로 군림하지 않았으나 온 무림이 ‘신승(神僧)’이라는 명호를 바칠 수 밖에 없었던 인물.
그가 바로 신승 불영 대사였기 때문이다.
그런 신승을 함부로 부르고 있으니 무림맹에 속한 관지부로서는 듣기 좋을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문득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승께서 손님을 와룡헌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알았네.”
관지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와룡헌은 무림맹 안에 있는 신승의 거처다.
특별히 출입에 제한을 가한 적은 없지만 무림맹의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금지(禁地)였다.
달칵.
검성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밖으로 나서자 네 명의 무사들이 뒤를 따랐다.
탁.
“이들은 뭔가?”
검성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호위를 맡을 무사들입니다. 검성께 어울리지 않음을 아오나 귀한 손님이시니 부디 저희의 예를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허허.”
검성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걸렸다.
천하에 감히 누가 검성의 호위를 자처할까?
저들은 호위가 아니라 감시가 분명했다. 괴승이 신승이 되어야 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쯧쯧, 자네도 참 힘들게 사는군.’
검성은 불영의 상황에 연민을 금할 수 없었다.
허명(虛名)을 그리도 싫어하던 불영이다.
맹주의 자리를 사양하고 굳이 무림맹을 협의체로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신승으로 추대되고 아직까지 이 무림맹에 남아있는 의미는 너무나 분명했다.
불영은 갇혀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선의와 책임감이 스스로의 굴레가 되어서 말이다.
“……가지.”
검성이 말했다.
관지부가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하고 곧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무림맹 깊은 곳에 자리한 신승 불영 대사의 거처, 와룡헌을 향해서.
***
“하아!”
비무대 위에서는 두 사람의 격돌이 한창이었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쉴 새 없이 귀를 찌르고 커다란 기합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타하!”
날카로운 검이 상대를 노리고 날았다. 하지만 쳐다보는 운현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뭐야.’
그건 수준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신입 금의위라도 열정과 진심이 담겨 있다면 운현은 기꺼이 찬사를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비무는 달랐다.
‘아까부터 제대로 승부가 나질 않잖아.’
용봉지회 참가자들의 비무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매화검이 간단한 자기소개라고 해서 그런가?’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자존심이 걸려 있는 비무다.
다른 후기지수들 앞에서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성취를 전부 드러낼 수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비무는 단지 여흥에 불과할 뿐, 진짜는 용봉지회의 마지막에 있는 정식 비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매한 상황의 결과로 인해 대부분의 비무는 별다른 승패 없이 끝나곤 했다.
덕분에 초식은 화려하지만 실제 긴장감은 떨어지는, 재미없는 비무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쯧.’
운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