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무림맹의 방문자
북해빙궁의 마차가 무림맹으로 향한 것은 항주에 도착한 지 닷새째 되는 날의 아침이었다.
그동안 운현은 잔잔한 서호의 풍경과 여유로운 항주의 정취를 만끽했다.
첫날 발견한 공터에서 새벽마다 수련을 하는 것과, 그 후에 안개가 깔리는 서호 변을 느긋이 산책하는 것도 운현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사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운현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끽하는 여유라고 할 수 있었다.
따각, 따각.
북해빙궁 일행이 향하는 무림맹은 서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차가 객잔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림맹의 화려한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규모와 웅장함에 감탄이라도 할 법했지만 마차 안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북해빙궁 일행이야 평소에도 과묵한 편이었고, 화려한 건물이라면 자금성에서 질리도록 본 운현 역시 별다른 감흥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이라…….’
운현은 담 너머로 보이는 무림맹의 전각들을 바라보며 살짝 흥분이 되는 것을 느꼈다.
웅장한 건물 같은 건 관심이 없다. 그러나 저 안에서 만나게 될 고수들이라면 다르다.
‘저 안에 진짜 고수들이 있단 말이지?’
운현은 내심 흥분이 되었다.
금의위의 비무라면 질릴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소위 진짜 고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이야기꾼들의 말로는 길가다가 어깨만 부딪혀도 고수더라는데…….’
강호 무림에선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했었다.
알고 보면 그들이 숨은 고수라고 말이다.
그러나 밖에 나와 보니 고수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다.
힘들게 찾아간 모용세가에서조차도 그저 자질이 뛰어난 청년을 발견하는 것에 그쳤을 뿐이었다.
그러니 운현에게는 저 높다란 담 너머에 있을 고수들, 그리고 그들이 보여 줄 비무에 대한 기대가 사뭇 컸다.
슥.
운현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자신의 짐을 확인했다.
비무를 기록하기 위한 준비는 완벽했다. 붓과 먹도 새로 장만했고 종이도 특별히 좋은 것으로 마련했다.
‘좋아.’
운현은 무림맹을 바라보며 기대에 부풀었다.
따각.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던 무림맹의 담장도 잠시 후 끝이 났다.
달칵.
“어서 오십시오. 무림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온화한 인상의 중년인이 일행을 맞이했다.
미리 전갈이 있었던 듯,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중년인은 부드러운 미소로 북해빙궁 일행에게 예를 표했다.
“저는 관지부라 합니다. 미약하나마 맹에 오시는 귀빈 여러분을 맞이하는 책무를 맡고 있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궁주는 가볍게 예를 표하며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는 북해빙궁의 소궁주입니다. 용봉지회에 초청을 받고 이렇게 무림맹을 방문하였습니다.”
“무림맹의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자신을 관지부라 소개한 중년인은 웃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문득 운현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입니다만 이분은…….”
관지부의 질문은 당연했다. 독특한 북해의 일행 중에 익숙한 문사 차림의 서생이 끼어 있으니 이상할 법도 하다.
“저희가 도움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함께 동행하려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소궁주의 태연한 대답에 관지부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럼 이리 오시죠.”
일행은 무림맹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무림맹의 커다란 정문과, 좌우에 늘어선 무사들의 강렬한 눈빛은 사뭇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문은 무림맹의 정문입니다. 평소에는 닫혀 있습니다만, 오늘 북해빙궁 여러분을 환영하는 뜻에서 열게 되었습니다.”
관지부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지만 감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맹 정문이 크고 웅장하다지만 어찌 자금성에 비하랴?
게다가 금의위의 눈빛에 단련된 운현이 무사들의 시선에 겁먹을 리가 없다.
운현을 포함한 북해빙궁 일행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머쓱하게 된 관지부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쯧, 촌것들이 과분한 대접을 받으면서 감격할 줄도 모르는군.’
정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최고의 예우다.
북해빙궁 같은 새외 문파에게 이런 과분한 대접을 해 주었는데도 감사는커녕 놀라지도 않으니, 무림맹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관지부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매화검 영호준 대협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하셨나 했더니…….’
정문을 열어 북해빙궁을 맞이하자는 것은 바로 매화검 영호준의 제안이었다.
이번 용봉지회의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영호준은 북해빙궁을 최대한 융숭하게 대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을 통해 다른 새외 문파들에 무림맹의 관대함을 보여 주자는 의도였다.
어찌 보면 이치에 맞는 말 같기도 했지만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하여간 매화검 대협은…….’
관지부는 힐끔 북해의 소궁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런 엄청난 미녀라면 누구라도 환심을 사고 싶지 않으랴?
‘쯧쯧.’
아무리 그래도 설마 미녀의 환심을 사려고 무림맹의 정문을 열라고 했을까마는, 평소 매화검 영호준의 행동을 아는 관지부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영호준이라면 왠지 납득이 갈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입니다.”
관지부는 일행을 숙소로 안내했다.
무림맹이 특별히 정문까지 열어 맞이했다지만 사실 새외의 문파야 그저 호기심의 대상일 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진 거대 문파와는 다르다.
무림맹 숙소 내에서도 조금 외곽으로 안내하는 관지부의 얼굴엔 의례적인 미소가 의무처럼 머물러 있었다.
***
그그긍.
활짝 열렸던 무림맹의 정문이 소리를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좌우로 비켜섰던 무사들도 다시 문 앞을 지켜서고, 육중한 정문은 천천히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정문 앞은 여느 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일상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응?”
정문을 지키던 무사는 눈앞에 나타난 한 사람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흰 수염을 기른 풍채 좋은 노인이 정문 가까이 서 있었다.
마치 노학사 같은 고고한 느낌이었지만, 건장한 체격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체 언제…….’
문제는 그가 이렇게 가까이 오도록 무사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아마도 무림맹 정문을 닫는 과정에서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일까?
무사는 곧 의문을 접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멈…….”
저벅.
멈추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노인은 스스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무림맹의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흠. 여긴 아직도 여전하군.”
그건 그다지 좋은 느낌의 말은 아니었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용건이오?”
감정이 살짝 실린 듯 무사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무림맹 정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무시당한 무사가 막 무어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후욱.
갑자기 엄청난 기세가 노인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으윽.”
온몸을 짓누르는 엄청난 기세에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 이게 무슨…….”
무릎이 꺾인 무사는 짜내듯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노인의 시선이 여전히 무림맹 정문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기세를 뿜어낸 대상은 무사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되는…….’
그런데도 그 엄청난 기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옆에서 휘말렸을 뿐인데도 말이다.
“큭.”
무사의 입에서 다시금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림맹을 지키는 무사로서 당연히 검을 빼어 들어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검을 뽑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검을 빼어 들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막연한 공포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다른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맹의 정문을 지키는 정예 무사들이 하나같이 꼼짝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이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훅.
무사들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내가 미처 자네들을 생각 못 했군. 미안하네.”
노인은 무사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괜찮나?”
그러나 무사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전 마주했던 그 공포스러운 경험을 어찌 잊으랴?
무사들은 경악스런 표정으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노인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노년의 학사나 도인 같은 초탈함마저 풍겨나고 있었다.
“이, 이곳은 무림맹이오. 요, 용무를…….”
무사가 용기를 쥐어짜며 말했다.
노인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나도 알고 있네.”
“헉.”
그저 살짝 눈매를 구겼을 뿐인데도 무사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시, 신분을 밝히시오.”
무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언제 맹수로 돌변할지 모르는 짐승을 눈앞에 둔 연약한 초식동물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허허, 거 참…….”
그러나 무사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먼저 기세를 뿜어낸 사람은 바로 자신이니 말이다.
“그래, 이렇게 얘기하는 게 자네들이 알아듣기 쉽겠군.”
노인은 무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에 전하게. 검성이 친우 괴승을 보러 왔다고 말일세.”
아무렇지도 않은 듯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듣는 무사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번져 가고 있었다.
***
용봉지회는 본래 무림맹 소속 후기지수들의 유대와 소속감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후기지수들의 불꽃 튀는 비무에 관심을 가지지만 사실 용봉지회의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용봉지회는, 비무장이 아니라 무림맹의 한 전각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달칵.
찻잔과 함께 용정차의 은은한 향이 전각 내에 떠돌았다.
사뭇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이곳에 모인 후기지수들은 이 자리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 용봉지회가 시작된다.
짐짓 태연한 척 찻잔을 드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과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흐음.’
운현은 전각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로 사람들이 많지 않군. 무림맹의 문파들이 다 참석하는 것이 아니었나?’
운현은 전각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커다란 전각은 반도 차 있지 않았다.
사실 그들과 동행한 시비나 수행원 들까지 합하면 훨씬 많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 뿐이었다.
오히려 운현처럼 동행한 것이 특별한 경우였다.
하지만 북해빙궁 일행이 다른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대할 때 실수하지 않으려면 운현도 올 수밖에 없었다.
‘숫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보다 운현을 실망하게 한 것은 이들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강호 무림의 쟁쟁한 후기지수들을 기대하던 운현은 내심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어쩌면 지금은 다들 기세를 갈무리하고 있을 뿐이지도 모른다.
운현은 전각 안의 후기지수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차분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곧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