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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60화 (60/530)
  • 060화. 미녀에게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매화검 영호준의 말에 사마건이 발끈했다. 그러나 곧 움찔하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자신을 보는 매화검 영호준의 눈빛이 매우 살벌했기 때문이다.

    사마건은 이를 악물고 그대로 검을 거둬들였다.

    스릉.

    매화검 영호준의 표정이 그제야 부드럽게 풀어졌다.

    “좋아, 그래야지. 풍류를 즐기는 곳에서 검이라니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매화검 영호준은 하얀 옷의 미녀, 소궁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란을 피워 죄송하오, 소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소궁주는 여전히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매화검 영호준의 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혹시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오신 북해빙궁 분들이 아니시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북해빙궁?”

    “새외에서 왔다고?”

    북해빙궁이라는 말은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소궁주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소궁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매화검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러신가 보군요. 저는 화산의 영호준이라 합니다.”

    매화검 영호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림맹으로 오셨다면 저희가 편안히 모셨을 터인데, 무언가 착오가 있었나 보군요.”

    “착오 같은 건 없었습니다.”

    소궁주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금 작은 탄성이 새어 나오고, 소궁주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잠시 서호의 풍광을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무림맹은 나중에 정식으로 찾아뵙도록 하지요.”

    달칵.

    말을 마치 소궁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호의 아름다운 야경은 이제부터입니다만…….”

    매화검 영호준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소궁주를 쳐다보았다.

    “당신과 함께 서호의 아름다움을 볼 영광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이곳에는 멋진 이야기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의 말에 작은 탄식을 흘린 것은 소궁주가 아니라 용봉지회 일행의 아가씨들이었다.

    조금 전까지 기녀와 노닥거리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지금의 매화검은 풍류 귀공자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후후.”

    그 때문이었을까? 소궁주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미소는 곧 사라지고 그녀는 멈추었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박.

    간단한 인사는커녕 아무런 대꾸조차 없었다.

    그렇게 소궁주는 그대로 매화검 영호준을 지나쳐 갔다.

    사박, 사박.

    사람들의 시선 속에 소궁주와 시녀 빙설은 전각 밖으로 향했다.

    빙혼 역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매화검 영호준을 한 번 쏘아본 후 소궁주의 뒤를 따랐다.

    ‘윽.’

    순간 운현은 움찔했다.

    전각을 막 나서던 소궁주와 빙혼의 시선이 한 순간 운현 자신을 스쳐 지나간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사박.

    시선은 찰나간에 스쳐 지나갔다.

    북해의 소궁주 일행은 그대로 전각을 떠났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메웠다.

    “북해빙궁이라고?”

    “갑자기 북해에서 용봉지회에 관심을 보이다니, 웬일이지?”

    운현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이미 운현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저나 엄청나던데? 소궁주의 미모가 가히 경국지색이더군.”

    “흥, 그래도 너무 무례하네요. 감히 매화검께 저런 태도라니요.”

    새외에 대한 편견 탓일까? 아니면 특유의 시기심일까?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듣고 있던 운현은 입맛이 썼다.

    ‘물론 저들이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곤 할 수 없지만…….’

    북해빙궁 일행은 분명히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런 그들을 무리하게 압박하려 들고, 게다가 양해도 없이 상대의 신분을 밝혔다.

    결국 조용히 경치를 즐기려고 온 사람을 쫓아내 버린 셈이 아닌가?

    운현은 북해빙궁 일행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각 안의 사람들은 운현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조금 전 있었던 일들로 이야기꽃을 피워내리라.

    다분히 북해빙궁에 부정적인 어조로 말이다.

    덜컥.

    운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곳에서 서호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는 더 이상 힘들 것 같았다.

    ***

    “이런, 보기 좋게 거절당했군.”

    매화검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후기지수 아가씨들은 뺨에 홍조까지 어렸다.

    “저기,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와…….”

    한 아가씨가 용기를 내어 매화검 영호준에게 권했다.

    그러나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나도 예전에 선배들이 끼어들어 흥을 깨는 건 싫었거든.”

    아닌 게 아니라 청년들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영호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매화검 영호준은 그대로 전각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주제는 단연 매화검 영호준에 대한 것이었다.

    “정말 매력적이지 않아요? 과연 매화검이시네요.”

    “그래요. 분위기도 있고, 정말 당당하시네요. 역시 남자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죠.”

    옆에서 떠들어 대는 목소리들을 한 귀로 넘기며 모용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화산파의 대제자, 매화검 영호준이라…….’

    그에 대한 소문은 대개 가볍고 놀기 좋아한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본 모습은 그에 대한 세간의 평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역시 쉽게 판단할 만한 사람이 아냐.’

    모욕에 흔들리지 않음은 그의 수양과 심계가 깊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소문 탓에 간과하고 있지만 그는 매화검이라는 명호를 가진 자다.

    그 무공이 결코 낮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살짝 시선을 돌리며 모용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은 방금 전까지 한 문사가 앉아 있던 곳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지?’

    아는 사이인데 따로 앉아있던 것도 이상하고, 나가면서도 아는 척을 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북해빙궁의 무사, 빙혼의 반응이다.

    ‘어째서…….’

    그때 빙혼은 분명 검을 뽑으려했다.

    그런데 그 문사 청년의 외침에 빙혼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것이다.

    마치 눈앞의 사마건이 빼어 든 날카로운 검보다 그 문사 청년이 더욱 중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아니, 설마.’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과한 억측이다.

    ‘그나저나 북해빙궁이라니…….’

    형식상 무림맹은 매번 새외의 문파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물론 그들은 반응조차 없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와서 용봉지회에 참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모용미는 시선을 떨어뜨려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았다.

    찰랑.

    호박색 술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 용봉지회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모용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달빛이 부서지는 밤물결을 가르며 한 척의 배가 천천히 서호 변으로 향했다.

    삼담인월을 떠나 서호 변으로 향하는 이 배에는 북해빙궁의 아름다운 소궁주와 시녀 빙설, 그리고 굳은 표정의 빙혼이 타고 있었다.

    끼익, 끼이익.

    뱃사공의 노젓는 소리가 조용한 호수 위에 울려 퍼졌다.

    뱃전에 앉아 밤하늘과 서호에 뜬 두 개의 달을 음미하던 소궁주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빙혼.”

    “네.”

    소궁주는 여전히 서호를 바라본 채 말했다.

    “매화검 영호준은 어떻던가요?”

    “쉽지 않은 자입니다.”

    빙혼은 나지막이 답했다.

    “그가 상대라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매화검 영호준이 빙혼과 같은 수준이거나, 혹은 그보다 고수라는 의미다.

    “그렇군요.”

    소궁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검 영호준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소궁주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그의 심계겠지요.”

    끼익, 끼익.

    뱃사공의 노 젓는 소리를 들으며 소궁주는 고개를 돌렸다.

    불을 밝힌 무림맹의 모습이 서호 저편으로 보란 듯 빛나고 있었다.

    ‘무림맹…….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소궁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남의 땅에서 열리는 남의 잔치에, 그것도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찾아오면서 각오가 없을 리 없다.

    만일 오늘 보았던 용봉지회 일행의 모습이 무림맹의 전부였다면 아마도 그녀는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니 매화검 영호준의 등장은 소궁주에겐 그녀의 각오에 걸맞은, 오히려 반가운 상대라 아니할 수 없었다.

    ‘후후.’

    서호의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소궁주는 문득 빙혼의 얼굴이 아직 굳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궁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검을 빼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있나요?”

    빙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궁주는 말을 이었다.

    “그곳의 일은 그 정도로 충분했어요. 상대를 베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에 소궁주는 고개를 돌려 빙혼을 쳐다보았다.

    빙혼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여전히 그가 신경 쓰입니다.”

    소궁주는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빙혼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느낌이 좋지 않다’며 빙혼이 항상 신경을 쓰는 인물.

    소궁주는 미소를 감추며 빙혼에게 대답했다.

    “그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 해도.”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빙혼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소궁주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빙혼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까 나는…….’

    자신은 검을 빼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빼지 못한 것일까?

    스스로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떠올리며 빙혼의 얼굴은 여전히 풀릴 줄 몰랐다.

    끼익, 끼익.

    배는 천천히 서호를 가로질렀다.

    빙혼의 굳은 얼굴과 빙설의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소궁주의 가느다란 미소를 어둠 속에 감춘 채.

    그들이 일으키는 잔잔한 물결이 서호에 떠오른 달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

    그 시간, 서호를 가로지르는 배에 몸을 실은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바로 청년 문사 운현이었다.

    “후우.”

    밤하늘과 서호에 비치는 두 개의 커다란 달을 바라보며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처럼 수양이 깊지 못하니……. 아직 멀었구나.”

    조금 전 전각에서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며 운현은 혀를 찼다.

    다행히 매화검 영호준이 들어와 상황이 수습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난감하다.

    검을 든 두 무인의 대결 한가운데 끼어든 셈이니, 빙혼이 전각을 나가면서 자신을 쏘아본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너무 성급했어.”

    나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빙혼의 눈빛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외치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 빙혼이 무언가 일을 저지를 것처럼 보였는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너무 지나쳤던 듯하다.

    “빙혼이 그 청년을 죽이려 했을 리도 없고…….”

    북해 사람들은 상대를 베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빙혼이 검을 뽑는 것은 생사를 결할 때뿐이라고 소궁주가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북해빙궁의 일행이 운현을 만나기 전 일이다.

    이제는 그들도 이곳의 풍습을 알았을테니, 그 정도의 일로 진짜 칼부림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참…….”

    자신에게로 쏟아졌던 그 수많은 시선들을 생각하며 운현은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 기억을 떨치려는 듯, 운현은 연신 한숨을 내쉬며 서호의 수면에 비치는 달을 바라보았다.

    끼익, 끼익.

    물살에 천천히 부서지는 서호의 달을 바라보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미녀의 호수라…….”

    별빛이 부서지는 하늘 아래 마치 그림 같은 호수의 밤 풍경을 바라보며 운현은 탄식처럼 내뱉었다.

    “미녀에게는 사람이 끊이지 않으니, 그래서 이곳엔 시끄러운 일이 가득한 모양이군.”

    그리고 시끄러운 일은 항상 후회도 많이 남기기 마련이다.

    또 한 번의 작은 탄식과 함께 그렇게 운현은 미녀의 호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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