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풍류공자
용봉지회 일행 중 한 청년이 과감하게 북해빙궁 일행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쯧쯧,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운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전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청년의 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해 하는 것이겠지만, 운현에게는 그 대답이 뻔히 보였다.
“크흠.”
북해빙궁 일행의 자리에 다가선 청년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백의 미녀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에게 반응한 사람은 빙혼이었다.
“무슨 일이오?”
빙혼이 냉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청년은 무시당했다 생각했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러나 곧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말을 꺼냈다.
“실례하오. 나는 화산파의 사마건이라 하고, 함께 있는 일행은 이번 용봉지회에 온 후기지수들이라오.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함께함이 어떠시오?”
청년, 사마건의 얼굴에 자신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후기지수들이라면 지금 항주에선 최고의 손님이다.
모두가 자신들과 함께하길 바라며 감히 누구도 홀대하지 못한다.
사마건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계속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일행으로 말하자면…….”
“빙혼.”
낭랑한 소궁주의 목소리에 사마건의 말이 끊겼다.
사마건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소궁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주위가 시끄럽군요.”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와하하하.”
“보기 좋게 퇴짜 맞았군그래.”
사람들의 반응은 필요 이상으로 요란했다.
어쩌면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에 대한 은근한 시기심 탓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것은 그저 잠깐의 유흥거리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화산파 사마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화산파의 제자로서 이런 노골적인 모욕을, 그리고 주변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언제 겪어 보았으랴?
으득.
화산파의 후기지수, 사마건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표정은 이미 분노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쯧쯧.’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북해빙궁 사람들은 절대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일에 관여하는 것도 싫어한다.
오죽하면 운현조차, ‘그때 저들이 날 도와준 건 마차가 지나갈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일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일까?
‘그냥 조용히 술이나 마시게 놔두는 편이 나을 텐데.’
화산파의 사마건을 보며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마건은 그럴 맘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용봉지회 기간 동안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다.
사마건은 목소리를 높이며 강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이오! 감히…….”
턱.
그러나 사마건은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 빙혼의 칼집이 가 닿았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사마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마건의 가슴에 얹힌 빙혼의 칼집은 분명한 경고였다.
빙혼은 사마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물러가라.”
웅성거리던 전각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화산파의 사마건 역시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은 당황했던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쳐다보는 빙혼의 눈초리가 마치 맹수의 시선처럼 오싹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거 참 대단하신 분들이시군.”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용봉지회 일행 중 한명인 제갈세가의 청년, 제갈룡이었다.
“이거야 어디 무서워서 술을 마실 수가 있나?”
그 말에 화산파의 사마건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곧 자신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했다.
“감히…….”
자신이 노골적인 위협을 당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일까?
사마건의 눈동자에는 서슬퍼런 분노가 일어나고 있었다.
“네가 감히 화산파의 제자를 핍박하겠다는 거냐?”
사마건의 손은 이미 자신의 검 손잡이에 놓여 있었다.
사문의 이름을 밝힌 것은 화산파의 이름을 걸겠다는 뜻이다.
정체를 모르는 상대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경솔한 행동이었지만 사마건은 젊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그리고 강호의 경험이 없었다.
강호 무림에서 화산파라는 이름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이가 없음을 사마건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훗.”
그러나 빙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특유의 냉막한 목소리로 빙혼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다면?”
으득.
사마건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문인 화산파마저 무시했다.
사마건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네까짓 놈이 감히 어디서 함부로!”
모욕을 참지 못한 사마건은 손에 힘을 주었다.
스르릉.
그의 검이 막 검 집을 빠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빙혼의 눈이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번쩍 빛나는 것을 운현은 똑똑히 보았다.
덜컹.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번뜩인 빙혼의 눈빛.
그것은 산적들의 목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몰아가던 바로 그때의 눈빛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지체할 틈도 없었다. 운현은 큰 소리로 외쳤다.
“빙혼!”
운현의 커다란 외침이 전각을 가로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번에 상황을 바꿔 놓았다.
홱.
놀랍게도 빙혼이 즉시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전각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 역시 운현을 향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운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외침에 빙혼은 물론 사람들까지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리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현보다 더 낭패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바로 화산파의 사마건이었다.
‘이, 이런.’
사마건은 얼굴을 구겼다.
빙혼이 검을 빼 들지 않고 시선을 돌리니 자신만 혼자 검을 뽑아 든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그러나 빙혼은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다른 사람들은 물론 같은 일행조차 사마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자신 혼자만 외면을 당해 버린 셈이니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으득.
이를 가는 사마건의 귓가에 문사 청년, 운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녕하시오. 빙혼.”
운현은 어색하게 빙혼에게 인사를 건넸다.
큰일이 날 것 같은 다급한 마음에 우선 끼어들긴 했지만 어떻게 뒷수습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아주 당연하게도, 빙혼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운현을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야? 저 사람…….”
조금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저 무사를 부른 것 같은데, 아는 사이인가?”
“언제 온 거지? 저들과 같이 들어왔었나?”
사람들은 어색하게 일어서 있는 운현을 힐끔거리며 저마다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도 없던 문사 차림의 사내가 갑자기 주목의 대상이 되니 한마디씩 안 할 수가 없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가려는 그때였다.
누군가 전각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아이, 또 술이세요?”
“하하하, 너와 같은 미녀와 함께라면 밤새도록 마신들 어찌 취하겠느냐? 네 비단 속곳이 풀리는 소리를 듣기 전까진 절대 안 취할 테니 걱정 마라.”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껴안다시피 하고 있는 한 쌍의 남녀였다.
남자는 날아갈 듯 화려하게 수를 놓은 비단 옷을 입고 있었고, 여자는 은근히 몸매가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복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약간 취기가 도는 것이 벌써 술을 한잔한 후인 듯했다.
“아이 참, 공자님도……. 진짜로 짓궂으셔.”
그들은 항주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각 안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왜냐하면 그 공자는 이곳 항주에서 꽤나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조용한 자리가……. 응?”
전각 안을 둘러보던 귀공자는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귀공자는 조금도 주저없이 사마건에게 물었다.
“사제, 무슨 일인가?”
덜컹.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려 나간 의자들이 소리를 내는 것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막 들어선 귀공자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매화검 대협!”
귀공자는 바로 매화검 영호준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저어 답례 아닌 답례를 했다.
“됐네. 이런 데서 무슨 예를 차리고 그래?”
그러곤 다시 사마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사제는 왜 이런 곳에서……. 응?”
그제야 소궁주를 발견한 매화검 영호준의 눈동자가 빛났다.
“호오.”
매화검 영호준은 자연스럽게 여자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어머나.”
그의 품에 안겨 있듯 하던 여인이 살짝 눈을 흘겼다.
“벌써 제가 싫어지신 건가요?”
변해 버린 남자의 마음이 원망스러운 듯 눈을 흘겼지만, 그녀의 목소리와 태도에선 오히려 애교가 넘치고 있었다.
매화검 영호준은 넉살 좋은 말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어차피 인연이란 바람 따라 흐르는 꽃잎 같은 것 아니겠느냐? 지나던 바람이 잠시 너의 향기에 취했던 것뿐이니, 야속하다 하지 마라.”
“후후, 정말 말씀도 잘하셔.”
그녀는 입을 가리며 살짝 웃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떠나간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사락.
여인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전각 밖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엉거주춤 서 있는 한 명의 문사를 발견했다.
“어머나, 공자께서는 어찌 이런 곳에서 혼자 풍류를 즐기시나요?”
그녀는 눈치 못 채도록 재빠르게 상대를 살폈다.
어수룩한 문사처럼 보였지만 이런 전각에 있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수준은 된다는 뜻이리라.
“소녀라도 괜찮으시다면 잠시 술벗을 해 드릴 수 있는데, 어떠신지요?”
“아, 나, 나는 괜찮습니다.”
운현은 당황했다.
방금 들어온 매화검 영호준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이다.
“저런, 아쉽군요. 혹시 취선루에 들르시게 된다면 저를 찾아주세요.”
그녀는 당황해 하는 운현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각을 나갔다.
운현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후우, 젊은 아가씨가 갑자기…….’
여자와 말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운현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운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매화검을 바라보았다.
‘사제라면, 같은 화산파인가?’
운현은 앉을 생각도 못 하고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매화검 영호준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그것은 매화검 영호준이 준수한 용모나 특이한 언행이 아니라, 바로 그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저 정도면 오히려 빙혼보다도…….’
매화검 영호준의 모습은 언뜻 실없는 풍류 귀공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깊은 눈빛과 지금도 완연히 느껴지는 은은한 기세는 운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거둬라.”
매화검 영호준은 사제 사마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검이 아니라 술과 미녀가 어울리는 곳이다.”
“하, 하지만 대사형. 이자가…….”
사마건은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매화검 영호준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화산파의 제자가 먼저 검을 뽑아 들었단 말이냐? 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