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미녀의 호수(2)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갑자기 깨진 흥취가 사뭇 아쉬운지라,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남궁 공자께서도 정말 대단하시오. 그런 녀석을 쉽게 보내 주시다니.”
“내 어찌 그런 잡배에게 함부로 손을 쓰겠소? 그게 대인과 소인의 차이 아니겠소이까? 하하하.”
“어머, 그렇게 되는 거였나요? 호호호.”
운현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떠들고 있었다.
‘누구지?’
마침 점원이 음식과 술을 들고 왔다.
점원은 운현의 불쾌한 표정을 알아차리곤 웃는 낯으로 슬그머니 말했다.
“저분들은 이번 용봉지회에 참석하는 각파의 후기지수 분들이십니다.”
“아, 그렇소?”
운현은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후기지수라?’
과연 모여 앉은 청년들이나 아가씨들이 모두 기세가 남다르긴 했다.
‘음,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들의 화려한 옷만이 밝은 불빛 아래 빛날 뿐.
운현의 반짝이던 눈빛은 실망감과 함께 사라졌다.
“밤이 되면 이곳에서 서호의 풍류를 만끽하곤 하신답니다. 덕분에 저분들을 보려는 다른 손님들께서도 많이 오시죠.”
그러고 보니 유독 저들 부근에 손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 탓에 창가 자리가 많이 비어버렸으니, 운현이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저들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점원이 물러가고 운현은 작은 술잔에 향기로운 술을 채웠다.
‘하긴, 명문세가에서 엄격한 수업을 받다 보면 이런 곳에선 조금 풀어지고 싶기도 하겠지.’
운현은 나름대로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바에 못 미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명문세가의 후기지수인데, 설마 저 모습이 진면목은 아니겠지? 모용세가의 모용진도 그랬고…….’
나중에는 예의 바르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모용진조차 첫 인상은 술에 취한 삼류 날건달 비슷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용봉지회의 일행들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쏴아아.
시선만 조금 돌리면 서호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태여 시끄러운 곳에 신경을 쓸 필요가 무어랴?
운현은 다시 서호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주위가 시끄럽다고 미녀의 아름다움이 바래는 것은 아니니까.
***
“하하하. 그래도 제갈 공자는 역시 대인이시오, 대인.”
“무슨 말씀을. 남궁 공자께서도 일전에 황산삼흉을 크게 벌주셨다지요?”
“허어. 그 일이 제갈 공자의 귀에까지 가 닿았단 말입니까? 이거 참, 허허허.”
“어머, 남궁 공자님의 협객행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옆에 앉은 아가씨가 추켜세우자 남궁 공자, 남궁상혁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그렇습니까? 이거, 참 그런 별것도 아닌 일을……. 하하하.”
난처한 듯 말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용봉지회 일행의 화제는 유쾌하고 시종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 앉아 있는 모용미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들이라니…….’
황산삼흉이라니 듣지도 못한 이름이다.
대륙 천지에 누런 산이 한둘이며 그곳에 있는 불한당이 하나둘이랴?
그런 일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것 하며, 거기에 요란스레 맞장구를 치는 행동들이 모용미에겐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이들에게선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평소에 명문 무가에서 엄격한 생활을 해 왔을 그들이다.
이런 곳에서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하지만 사람은 오히려 이럴 때에 진면목을 드러내는 법이다.
며칠 동안 이들의 모습을 보아 온 모용미로서는 실망이 작지 않았다.
겸손 같은 미덕은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무(武)의 길을 걷는 무인이라면 저절로 배어 나오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숨기려 해도 결코 감출 수 없는 그런 무인의 기개나 자긍심이, 적어도 이들에게선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모용미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당 당주로서 용봉지회에 참석한 모용미는 명문세가의 후기지수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서로의 뜻을 함께하기 이전에, 벌써 이들은 같이 자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다.
어찌 이들과 가문의 중대사를 걸고 운명을 함께할 수 있을까?
“호호호, 제갈 공자님은 정말 겸손하네요. 그렇죠, 언니?”
옆에 앉은 아가씨가 모용미에게 말을 건넸다.
모용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응, 그러네.”
“아이, 언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그렇게 가만히만 있지 말고요, 호호호.”
맞은편에 앉은 아가씨도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모용미는 말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아가씨들도 참…….’
모용미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언니라며 친근하게 불러주지만 사실은 일종의 견제다.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은연중에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준수한 청년들이 모용미의 성숙한 매력에 빠져들 것을 염려하기라도 하듯, 그녀들의 예의 바른 말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
지금도 은연중에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후우우.’
마음 같아선 벌써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로서 쉽게 떠날 수는 없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어 쉰 모용미는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눈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응?’
모용미의 시선에 한 문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기라도 하듯 유유자적하게 서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는 문사.
모용미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지금 이곳에 있는 다른 손님들의 관심은 모두 용봉지회의 일행에 쏠려 있었다.
아닌 듯 숨기고는 있어도 용봉지회의 일행들 주위에 몰려 있는 것을 보면 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 문사는 아예 관심을 끊은 듯 홀로 서호의 풍경에 취해 있었다.
그 유유자적한 모습이 오히려 모용미의 시선을 끈 것이다.
그리고 모용미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디서 만났었나?’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분명 모르는 사람이다.
만난 적이 있다면 총명한 모용미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거기다 저런 분위기라면 쉽게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모용미는 문득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응?’
주변이 조용하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방금까지 떠들고 있던 일행들마저 아무런 소리가 없다.
모용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단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와아.”
누군가의 탄식이 나지막이 새어 나왔다.
사박.
그 탄식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막 전각으로 들어서고 있는 여인의 자태는 아름다웠다.
마치 눈 속에 피어난 눈꽃처럼 시선을 사로잡는, 날카로우면서도 화려한 미모를 빛내는 한 여인이 전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옷은 물론이고, 오색의 등불들마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아름다움을 가진 미녀였다.
웅성거리던 전각이 단번에 침묵에 빠져든 것은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그 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전각은 조용했다.
운현 역시 그 미녀를 보았다.
놀라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만 다른 점은 그 미녀가 바로 운현이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
‘어……. 소궁주?’
방금 전각으로 들어선 것은 다름 아닌 북해빙궁의 소궁주 일행이었다.
뒤에 조용히 따르고 있는 빙설과 냉막한 표정의 빙혼도 보인다.
‘어쩐 일이지?’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쉴 것 같더니, 서호의 불빛에 끌려 나온 건가?’
어쨌든 아는 사람이라고 이곳에서 만나니 조금 반갑다.
운현은 마주치면 눈인사라도 할까 해서 북해빙궁의 일행을 주시했다.
“이곳이 어떠신지요?”
북해빙궁의 일행을 안내해 온 점원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안내한 자리는 서호의 풍광이 아름답게 보이는, 운현과 용봉지회 일행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자리가 마음에 드는지 소궁주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빙설은 소궁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빙혼은 그 냉막한 표정 그대로 소궁주의 뒤편에 자리를 잡고 우뚝 섰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물러나려는 점원에게 빙혼이 나지막이 무언가 주문을 했다.
“알겠습니다.”
점원이 떠나고 빙혼은 다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섰다.
그때까지 소궁주는 서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봉지회 일행은 물론이고 운현과 눈이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뭐랄까, 저 사람들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군.’
시선 한번 마주치지 못한 운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것인지 북해빙궁 일행은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간단한 눈인사라도 하긴 틀린 듯하고, 자신도 지금의 흥취를 깨어 가면서까지 인사를 할 생각은 없다.
‘서호가 미녀의 호수라더니…….’
운현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용봉지회의 일행들과 앉아 있는 한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조금 성숙해 보이는 그녀는 어디선가 본 듯도 하고, 누군가와 닮은 듯도 한 아가씨였다.
지금은 다른 일행들처럼 소궁주를 쳐다보고 있지만,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운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같이 앉아 있는 다른 후기지수들과는 다른, 단정하면서도 심지가 곧아 보이는 그녀의 시선은 운현의 신경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그녀 역시, 운현이 보기에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니까.
‘세상엔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아.’
사락.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중에 내 여자는 없지만.’
그중에는 물론이고 그 외에도 없다.
운현은 작은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향기가 코끝을 스치며 운현의 입술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북해빙궁 일행이 자리를 잡자 낮은 웅성거림이 다시금 전각을 채웠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미녀의 등장은 그것만으로도 이곳의 분위기를 바꿔버릴 힘이 있었으니까.
“어떻소? 저 정도면 까다로우신 제갈 공자의 취향에도 맞을 듯하오만?”
“허허, 왜 내게 그러시오? 오히려 남궁 공자께서 생각이 있으신 것 아니오?”
화제가 바뀐 것은 용봉지회의 일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 그들은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 속삭이듯 말을 주고받았다.
“참내, 남자들이란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 모용미에게 말했다.
“좀 예쁘다 싶으면 금방 저렇게 관심을 보이니……, 정말 유치하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로 매력적인 여인인걸?’
그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차갑고 도도하면서도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참으로 특별한 매력을 그 미녀는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모용미의 대답은 그저 속에서만 머물렀다.
그 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이 조금 한심해 보이는 건, 그녀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문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향기로운 술 한 잔을 들고 서호의 풍취를 즐기는 느긋한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후후.’
모용미의 입술에 미소가 걸리고, 그녀도 가만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호박색으로 빛나는 향기로운 미주가 그녀의 술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오오.”
갑자기 들린 웅성거리는 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