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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7화 (57/530)

057화. 미녀의 호수(1)

운현은 북해빙궁 일행의 객잔 가까운 곳에 짐을 풀었다.

“후우.”

한숨이 새어 나온 것은 드디어 항주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북해빙궁 일행과 함께 지내는 것이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자신을 늘 주시하고 있던 빙혼의 눈빛도 그랬지만, 소궁주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예의 바르고 깍듯하긴 하지만…….”

소궁주가 운현을 대함에 소홀함은 없었다.

그러나 은연중에 풍겨오는 그 도도한 분위기는 여전히 거북하기만 했다.

오죽하면 시녀로 보이는 빙설이라는 여인의 눈빛조차 예사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을까?

“자, 그럼 나도 한번 나가 봐야지.”

운현은 방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힘들게 찾아온 항주인데 날이 조금 어두워졌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운현은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저벅, 저벅.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접어들자 갖가지 음식 냄새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확 밀려들었다.

운현이 묵고 있는 객잔 역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부분 용봉지회를 보러 온 사람들인 듯, 말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무인들도 많이 보였다.

운현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식당의 분위기를 살폈다.

지난 십여 년간 자금성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보낸 운현에게 이런 자유분방한 모습은 사뭇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 이보게.”

마침 앞을 지나는 점원을 운현이 불렀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혹 이 부근에 조용한 곳이 없겠나?”

“조용히 풍류를 즐기신다면 당연히 서호로 가셔야죠. 하지만 요즘은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점원의 대답에 운현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굳이 밖으로 나서려는 것은 항주의 밤거리를 구경하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사실 어디 조용한 공터라도 하나 찾아서 수련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자금성을 떠나 지금까지 제대로 된 수련이라고는 한 번도 못했다.

‘모용세가에선 그래도 목검 비무라도 해 봤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운현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 십여 년간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던 수련이 아니었던가?

“서호 주변에 야트막한 산이 많으니 한적한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초행이시라면 아무래도 삼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운현의 아쉬워하는 표정에 점원이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런가? 고맙네.”

점원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바쁘게 지나갔다.

‘산 쪽이라…….’

항주까지 오면서 운현은 멀쩡한 관도에서도 도적들과 마주쳤다.

그런데 산이라니, 운현으로선 아무래도 꺼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서 목검이라도 하나 구해서 가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던 운현은 일단 서호 쪽으로 나가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서호의 야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발걸음 한 보람은 생길 것이다.

촤락.

객잔의 주렴을 헤치고 대로로 나서자 또 다른 소음이 들려왔다.

지나는 마차와 사람들의 목소리, 바로 거리의 소음이었다.

“하하하.”

“어서오십시오!”

거리엔 등불을 밝힌 상점들로 가득하고, 진열된 물건들은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운현은 시끌벅적하면서도 유쾌한 항주 거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흐음.”

기분이 좋아진 운현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자신이 항주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수련을 못 했던 초조함도 어느새 사라지고 활기찬 거리의 향취가 가슴 깊이 밀려 들어왔다.

그 느긋한 유쾌함을 즐기며 운현은 천천히 서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객잔에서 서호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다채로운 거리의 모습 때문에 짧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느덧 운현은 서호에 다다라 있었다.

“오.”

탁 트인 호수가 운현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의 등불들이 물결 사이로 부서지는 모습을 보며 운현은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서호로군.”

이미 해가 저물었지만 그래도 서호는 아름다웠다.

마치 은은히 불을 밝히고 정인을 기다리는 미녀의 모습처럼, 서호는 어둠 속에서도 보는 이를 취하게 하는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역시 오길 잘했어.’

운현은 천천히 서호 주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자신 말고도 야경을 즐기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불을 밝힌 전각들은 서호의 밤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서호 가운데 있는 작은 섬들에서도 환한 불빛들이 휘황하다.

그렇게 서호의 풍광을 감상하며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오.’

운현은 길을 조금 벗어난 곳에서 적당한 공터 하나를 발견했다.

숲 쪽으로 조금 들어가야 하긴 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엔 더 좋았다.

게다가 서호의 불빛도 가까이 보이는 터라 조금만 나오면 금방 큰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라면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충분히 수련을 할 수 있었다.

“후우우.”

공터 가운데쯤에 자리를 잡고 운현은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마음이 가라앉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번잡하던 마음도, 초조하던 느낌도 잦아들고,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쏴아아.

부드러운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들의 움직임과 코끝을 스치고 지나는 작은 공기의 숨결을 느끼며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우웅.

마음속에 목검 한 자루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곳에 있지 않으나 그곳에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고 또렷한 검.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운현 자신만의 검.

운현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 검을 쥐었다.

사락.

항주도 사라졌다. 서호도 보이지 않았다.

북해빙궁의 아름다운 소궁주도, 강렬한 인상의 빙혼도, 그리고 신경 쓰이던 시녀 빙설도 더 이상 없었다.

자금성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전직 학사도, 모용세가에서 천대받던 문사 식객도, 앞날이 불안한 청년도 지금은 간 곳이 없었다.

하늘 아래 있는 것은 오로지 운현 자신과 그리고 마음에 또렷한 검 한 자루 뿐.

사락.

조용히 운현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끊일 듯 끊어지지 아니하고, 부드러우나 그 무엇도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따라 운현의 검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수도자의 구도(求道)인 양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무검(無劍)의 검무(劍舞).

바로 백호수련검 제일식의 조용한 시작이었다.

***

운현이 수련을 마친 것은 꽤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거참. 잠시만 하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었나?”

밤하늘을 살피며 운현은 낭패를 숨기지 않았다.

조금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하는 수련은 시간 가는 것을 잊게 했다.

아니,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잊을 정도였다.

그나마 수련 중에 잠시 숨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밤이 깊은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군. 서호는 아직 불이 밝으니…….’

서호의 불빛은 오히려 초저녁보다 더 환해 보였다.

수련을 한 덕에 몸과 마음도 상쾌해진 터라 운현은 편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모용세가의 그 청년이, 모용진이라 했었지?’

걸음을 옮기던 운현은 문득 모용세가에서 있었던 비무를 떠올렸다.

충동적이긴 했어도 운현으로서는 의미 있는 첫 비무였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첫 승리이기도 했다.

‘역시 나도 아주 엉터리는 아니었군.’

자신의 실력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운현의 수련은 어디까지나 탐구의 영역이었지,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겼다는 건,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이런 걸로 기뻐해선 안 되지.”

운현은 짐짓 혼잣말을 하며 스스로의 교만을 경계했다.

“형님께서도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되고 검을 다스리는 자가 되라 하셨으니, 우선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것이 옳다.”

자신을 타이르듯 말한 운현은 문득 긴 한숨을 흘렸다.

“기껏 도적들의 칼과 몽둥이 몇 자루에 그렇게 당황했던 내 꼴이라니…….”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바로 관도에서 홀로 도적들을 만났던 때다.

‘거기서 그런 공격이 들어오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인데…….’

상대가 네 명이라 해도 두렵지는 않았다.

그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었다지만 움직임이 뻔히 보이는데 피하지 못할 리가 없다.

문제는 운현에겐 매우 생소한 경험이었다는 것과, 그들의 공격이 아무 규칙도 없는 막무가내였다는 데 있었다.

손에 목검이라도 있었다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상대의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은 운현에겐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때껏 십수 년간 운현이 보고 들은 비무에선, 고수들의 이야기이건 금의위들 간의 비무이건 간에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런 움직임까지 염두에 두자면 너무 복잡해지는데…….’

생각하던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고수들보다 초보의 움직임이 더 분석하기 어렵군.”

자신도 엉뚱한 질문으로 일충현 교두를 괴롭혔던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검의 길이란 건 정말 끝이 없구나.”

운현이 그렇게 중얼거릴 무렵 갑자기 눈앞이 확 트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운현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오오.”

서호의 야경이 운현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화려한 불빛이 물결 따라 부서지고, 호반에 자리한 전각들은 오색 등불이 영롱하다.

많은 사람들이 술과 서호의 야경에 취해 밤을 잊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곳은 다름 아닌 서호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들이었다.

“호수 안의 섬, 그리고 그 섬 안에 호수라더니…… 저곳이 삼담인월인가?”

서호에는 몇 개의 작은 섬이 있다.

그중에서도 삼담인월은 그 안에 작은 호수를 품고 있는, 마치 고리 모양으로 생긴 섬이었다.

섬 안의 탑에 등을 밝히면 세 개의 달이 뜬다 하여 ‘삼담인월’이라 불리는 이 작은 섬은 서호 안에서도 가장 많은 풍류객을 불러 모으는 장소였다.

‘어디 보자. 저곳으로 가려면…….’

운현은 주변을 바라보며 선착장을 찾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란 건 잊었다. 어차피 서호엔 밤이 없는 듯하니 시간을 신경 쓸 것이 무엇이랴.

운현은 삼담인월로 갈 작정을 했다.

***

“어서 오십시오. 한 분이십니까?”

운현이 전각으로 들어서자 점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운현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점원은 웃는 낯으로 안내를 했다.

“마침 좋은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운현이 들어선 곳은 가격이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이는 화려한 곳이었다.

하긴 삼담인월에 전각을 세울 정도인데 싸구려 주점을 만들어 놓지는 않으리라.

자신의 은자가 넉넉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운현은 점원의 안내에 따라 발길을 옮겼다.

“자리는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드는군. 고맙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는 아주 좋았다.

서호에 접한 곳이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데다, 하늘과 호수에 두 개의 달이 떠올라 그냥 보고만 있어도 취해 버릴 것 같은 곳이다.

“가벼운 음식과 술을 가져다주게.”

주문을 마치자 점원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운현은 서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락.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운현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하늘에 떠 있는 달도 고요한 수면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마치 도도한 미녀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그 단아한 자세를 잃지 않는 것같이, 서호는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녀의 호수라…….’

서호는 옛 미녀 서시와 비견하여 서자호(西子湖)라고 불리기도 한다.

절로 흥취가 일 듯한 서호의 풍광에 운현은 오랜만에 묵객(墨客)의 풍류를 만끽했다.

‘오랜만에 시라도 한 수 읊어볼까?’

그러나 운현의 풍류는 길게 가지 못했다.

“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는 거요? 하하하하.”

“호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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