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북해빙궁의 소궁주
스릉.
빙혼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검을 거두었다.
운현이 그런 빙혼에게 재촉하듯 말했다.
“자, 도적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어서 떠납시다.”
“나는 두렵지 않소.”
“물론 알고 있소. 하지만 이러다 길이 지체되면 곤란하지 않소?”
어느새 운현은 빙혼을 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빙혼은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곧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는 그대로 출발했다.
따가닥, 따가닥.
마부 옆에 앉은 운현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버려진 도적들이 신음하는 모습 너머로, 숨어 있는 도적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친 이들은 저들이 알아서 하리라.
‘자, 저쪽은 이제 됐고.’
운현은 방금 전 빙혼이 보여 준 움직임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하나 건졌군.’
빙혼의 검술이나 움직임은 확실히 독특했다.
덕분에 운현의 서책에는 나날이 새로운 기록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어쩐지 도적 떼를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긴 한데…….’
이상하게도 일행은 도적들을 자주 만났다.
물론 그것에는 운현의 책임도 얼마간은 있었다.
길 안내는 실질적으로 운현이 맡았는데, 운현도 초행이라 이리저리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길을 돌아가니 도적들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게다가 누구라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하고 커다란 마차임에야, 지나치려던 도적들까지 꼬여들 수 밖에 없다.
‘뭐, 그건 어쩔 수 없고.’
운현은 불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했다.
도적 떼와 부딪힐 때마다 빙혼의 검술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귓가를 지나가는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운현은 가슴이 뿌듯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아주 보람찬 나날의 연속이었다.
“소궁주님.”
빙혼의 낮은 목소리에 소궁주는 고개를 들었다.
“뭐죠, 빙혼?”
“저자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빙혼이 누구를 말하는지 소궁주는 알 수 있었다.
“말해 보세요.”
빙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소궁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때 빙혼의 출수를 저지한 것 때문인가요?”
“네.”
빙혼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제가 살수를 펼치려는 순간을 정확히 알아차렸습니다.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처음 운현과 만났을 때, 운현은 빙혼이 살수를 펼치려는 순간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제지했다.
뒤이은 그의 말, 생명까지 해하진 말라던 외침을 생각하면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빙혼 자신이 그의 말에 따라 검을 멈췄다는 사실이다.
빙혼은 그 일을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 또한 꾸민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조금 색다르긴 하지만 그는 학사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느낌이 좋지 않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후 빙혼은 한순간도 운현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만일 이상한 기색이 있었다면, 예컨대 운현이 실력을 감추고 접근한 자였다면 빙혼은 즉시 그를 처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운현은 아무런 수상한 행동도, 이상한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절대 평범한 학사는 아니라는 확신과 의심할 것이 전혀 없는 현실.
그래서 빙혼은 더더욱 운현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교묘한 위장이라면, 운현은 그야말로 엄청난 심계를 가진 자일 테니까.
“괜찮아요.”
마차 안에 소궁주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차피 우리는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무력보다 문(文)과 예(藝), 그리고 명분과 도덕을 더 중요시 여기는 곳.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그를 용봉지회에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려고 고용한 것 아닌가요?”
빙혼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난 며칠간을 생각하면 운현은 확실히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이 마차는 벌써 무림에 악명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명문가 자제들이 모여드는 용봉지회에서, 운현의 학문과 예법은 자신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난 것은 잘된 일입니다. 더구나 학사였다 하니 더욱 좋은 일이지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궁주가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띠며 그녀는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물론 길을 찾는 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지만…….”
순간 빙혼은 고개를 들고 소궁주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혼잣말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밝은 미소를 짓는 것도.
“어쨌든 그에 대해선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빙혼은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설영대의 상황은 어떻죠?”
“거리를 두고 이동 중입니다. 명하신 대로 각별히 조심하여 충돌을 피하도록 했습니다.”
소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 학사가 말하는 것을 설영대 전원에게도 숙지시키세요. 이곳이 남의 땅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빙혼은 깊이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소궁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빙혼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따각, 따각.
크고 화려한 북해의 마차는 쉬지않고 관도를 질주했다.
무림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자 용봉지회가 열리는 유서 깊은 대도시, 항주를 향하여.
***
항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다.
빼어난 풍경과 풍부한 자원, 그리고 대운하로 연결되는 교통을 갖춘 항주는 가히 강남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꼽힌다.
항주는 또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옛 미녀 서시의 아름다움에 비견되는 서호의 풍경은 시인과 묵객의 발길을 붙잡았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으려는 사람들 또한 항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 항주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항주에 우뚝 서 있는 무림맹에서 흘러나오는 권력과 부의 향기에 취한 사람들이었다.
따각, 따각.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 커다란 마차 한 대가 항주를 가로지르는 대로로 접어들었다.
크고 화려한 마차였지만 지나는 이들은 그저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번 쳐다볼 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번화한 항주에서 이런 마차는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항주로군요.”
소궁주의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운현 역시 감회가 남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여기가 그 항주로군요.”
항주로 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길을 헤메고, 도적 떼들을 뚫고, 드넓은 장강까지 건넌 끝에 드디어 이곳 항주에 도착한 것이다.
“대단히 화려하군요. 이곳은 늘 이런가요?”
오색 등불이 가득한 번화가를 바라보며 소궁주가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도 알 정도로 항주는 들떠 있었다.
거리마다 오색 등이 걸려 있었고 상점마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러나 운현이라고 항주의 사정을 알 리가 없다.
이 화려함이 본래 그러한지, 아니면 용봉지회 때문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운현이었다.
“설마 늘 이러지야……. 아니, 어쩌면 언제나 이럴지도…….”
운현의 자신 없는 대답에 소궁주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북해라면 경멸의 대상이 될 법한 태도였지만 어쩐지 소궁주는 그 모습이 그리 싫지 않았다.
“일단 거처를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빙혼이 나지막이 말했다.
용봉지회에 초청된 이들에게는 당연히 무림맹에서 숙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미 해가 저물 무렵이 되었고, 바로 무림맹으로 가는 것보다는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나으리라.
“혹시 학사님께서 아시는 곳이 있으신지요?”
소궁주가 운현에게 물었다.
창밖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운현은 예전 서생 시절을 더듬으며 소궁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곳은 저도 처음입니다만, 대강 서너 군데의 객잔을 찾아보면 괜찮은 곳이 나올 것입니다. 반드시 방을 직접 확인해 둬야 나중에 낭패를 당하지 않지요.”
빙혼의 눈매가 살짝 변했다.
운현은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게 있나 싶어 소궁주의 안색을 살폈다.
소궁주는 여전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저는 이곳이 처음이니 전망이 좋은 곳이 끌리네요.”
소궁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우선 이곳에서 제일 높은 객잔으로 가 보도록 하죠.”
‘아!’
그제야 운현은 자신이 무얼 착각했는지 알아차렸다.
노중에서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어찌 빙궁의 소궁주가 싸구려 객잔을 전전하랴?
“크흠. 그, 그러시지요.”
운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고, 마차는 항주에서 가장 큰 객잔으로 방향을 틀었다.
***
“그야 물론 용봉지회 때문이지요.”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중년인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일행의 의문에 답했다.
“평소에도 붐비는 곳이지만 올해는 용봉지회가 열리지 않습니까?”
그는 이 커다란 객잔의 부지배인이었다.
최고급 특실을 선택한 귀빈들을 위해 그가 직접 최상층으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좋은 때에 잘 오신 겁니다. 용봉지회 마지막 날에는 공개 비무도 있으니, 아름다운 항주에 마음껏 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지배인은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내려갔다.
운현도 소궁주를 향해 예를 표했다.
“무사히 항주에 도착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떠날까 합니다.”
운현의 말에 소궁주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답례를 했다.
“학사님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소궁주의 깍듯한 인사에 운현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솔직히 이곳까지 오는 동안 운현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길도 무수히 헤맨 데다가 대부분의 일은 빙혼이 해결했으니까.
소궁주는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함께 용봉지회를 보시는 건 어떨까요?”
운현은 머뭇거렸다. 그녀의 제의가 상당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용봉지회라…….’
주저하는 운현을 보며 소궁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운현이 무공에 관심이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용봉지회라면 촉망받는 후기지수들의 모임이니 운현이 관심을 갖지 않을 리가 없다.
“저희와 함께라면 용봉지회의 비무를 가까이에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허나 그러면 제가 너무 폐를…….”
운현의 말은 이미 승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요. 저희도 명가의 후기지수분들을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대하려면 학사님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아, 그러셨군요.”
운현은 그녀의 말에 납득했다.
명가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라면 무공뿐만 아니라 예의범절에도 엄격할 것이다.
그러니 북해 일행에게 이곳의 예법이나 관습을 알려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명분과 실리가 맞았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시면 이곳에서 저희와 함께…….”
“아, 아닙니다.”
소궁주의 말에 운현이 손을 저었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치면 제가 오히려 불편합니다. 저는 다른 곳에 숙소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외로 강경한 운현의 반응에 소궁주는 더 권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좋으신 대로 하시지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운현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사실 이런 화려한 객잔은 운현에게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러나 숙소까지 신세를 진다는 것은 예의 이전에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더구나 자신에게 은자가 없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운현은 화려한 객잔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천천히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현이 떠나자 빙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거처를 확인할까요?”
“아니요. 그에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소궁주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빙혼은 이곳 주변의 상황을 파악해 주세요.”
빙혼이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달칵.
빙설이 방문을 열고 소궁주가 들어가는 사이, 빙혼은 소리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먼저 방을 확인한 빙설은 문을 닫았다.
탁.
특실답게 방은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웠다.
그러나 소궁주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커다란 창밖에 가득 펼쳐진 항주의 야경이었다.
수많은 오색 등불은 항주 전체가 커다란 보석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소궁주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곳이 바로 무림맹이로군요.”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 그곳에 무림맹이 빛을 환하게 밝힌 채 서 있었다.
강호 무림 유일의 문파 협의체이자 사실상 최고의 권력 기관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이.
“기대가 되는군요.”
낭랑한 목소리로 사뭇 즐거운 듯 소궁주는 말했다.
“암천무제, 어두운 하늘 아래 선 그가 저 무림맹을 과연 얼마나 뒤흔들 수 있을지 말예요.”
소궁주는 눈을 빛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 얼음처럼 싸늘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