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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5화 (55/530)

055화. 동행

“무슨 일이신지요?”

말이 끊겨 난처해하는 운현을 보았는지 하얀 옷의 미녀가 물었다.

운현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이분께서 절 도와주셨는데 제가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기에…….”

조금 궁색했지만 일단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다짜고짜 검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었으니까.

하얀 옷의 미녀는 무사에게 말했다.

“빙혼. 이분께서 인사를 하기 원하신다는군요.”

빙혼이라 불린 무사는 운현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인사는 필요 없소.”

그의 싸늘한 거절에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낙망하는 운현의 모습에 하얀 옷의 미녀가 오히려 관심을 가졌다.

“빙혼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운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운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은 제가 학사로 지내는 동안 잠시 무공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얀 옷의 미녀가 눈동자를 빛냈다.

운현은 얼른 말을 이었다.

“헌데 이분의 검로가 매우 독특해 보이더군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잠시라도 검식을 견식 할 수 있을지…….”

삭.

운현의 목소리가 끊겼다.

하얀 옷의 미녀가 손을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빙혼이 검을 빼는 것은 상대와 승부를 결할 때뿐입니다.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그녀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일말의 여지조차 없이 단호했다.

운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강호 무림에서 다른 이의 무공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매우 무례하거나 혹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무사, 빙혼의 눈치를 살폈다.

‘윽.’

아니나 다를까?

빙혼의 시선은 아까보다 더 따가웠다.

‘이럴 것 같더라니…….’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헌데, 학사셨다고요?”

문득 하얀 옷의 미녀가 물었다.

“네.”

운현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덕분에 그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지나간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

어색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고맙게도 하얀 옷의 미녀가 먼저 운현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주로 이곳의 문화나 풍습에 관한 질문이었는데, 운현도 가만히 있기가 어색했던 터라 아는 한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덕분에 운현은 그녀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상당히 통찰력있고 똑똑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작 중요한 빙혼과는 여전히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일행이 탄 마차는 제법 큰 마을에 다다르고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운현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무사 빙혼과 시중드는 아가씨, 그리고 하얀 옷의 미녀가 마차에서 내렸다.

“조용한 마을이군요.”

그래도 시골 마을치고는 꽤 규모가 있는 편이었다.

큰 도성으로 가는 마차 정도는 있을 법해 보여서,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하얀 옷의 미녀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곤경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정말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만에요. 오히려 학사님의 말씀이 저희에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말에 운현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해 준 말이래야 별것 없었다.

그저 이곳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을 뿐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그녀의 이름은 들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빙혼도 진짜 이름은 아닐 테지.’

운현은 북해빙궁 사람들의 관점이 조금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이름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는 데다가, 서슴없이 도적들의 목을 치려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사뭇 위태로워 보였다.

이러다가 조만간 큰 말썽에 휘말릴 것 같다는 확신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간섭할 명분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숙여 다시 예를 표했다.

저벅.

빙혼의 검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운현은 발길을 돌렸다.

일단 쉴 만한 객잔부터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학사님.”

운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화사한 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운현은 불현듯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뭔가 단단히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얽혀들 수밖에 없는 그런 예감 말이다.

하지만 대답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백의 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저희들은 무림맹의 초청을 받아 용봉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항주로 가는 길입니다.”

‘무림맹!’

무림맹이라는 단어는 단번에 운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강호 무림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단어가 바로 무림맹 아니던가?

“허나 아무래도 낯선 땅인지라 여러모로 서툴고 어렵군요. 괜찮으시다면 학사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데 어떠신가요?”

그건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명분이었다.

낯선 땅, 처음 가는 길이 어려워 선비에게 도움을 청한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게다가 목적지까지 같은 다음에야.

‘으음.’

하지만 운현의 마음속에선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목적지도 같은 데다가 눈이 황송할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의 요청이다.

게다가 북해의 검술을 견식 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예감이 운현을 머뭇거리게 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뻔히 보이는 수렁에 발을 담그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결코 서운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여행 중이오나 은자는 충분하오니…….”

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머뭇거리는 것을 금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모욕이나 마찬가지다.

운현의 안색이 변하자 하얀 옷의 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제가 실수를 했나요? 북해에서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은 큰 모욕이 되기에 드린 말씀입니다만…….”

그녀의 설명에 운현의 굳었던 안색이 풀렸다.

이렇게 서로의 관습이 다르니 그들의 여정이 험하고 어려울 수밖에.

“그러셨군요. 허나 이곳에서는 대가를 먼저 말하는 것이 오히려 모욕이 됩니다.”

“아, 그랬군요.”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충고까지 해 놓고 안 한다고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운현이 항주로 가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는 데다, 따로 할 일도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먼 데서 오신 분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날 테니, 미력하나마 성심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하얀 옷의 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보는 순간 운현이 아찔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학사님께서 허락해 주시니 정말 기쁘군요.”

‘어휴. 아서라, 아서.’

한순간 그녀의 미소에 빠져들려 하는 자신을 일깨우며 운현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미녀의 미소라면 자금성 창음각에서 질리도록 봤다. 그리고 그녀들이 운현의 정체를 알고 어떻게 태도가 돌변하는지도 말이다.

그래도 눈앞의 미소가 보기 좋은 것만은 어쩔 수 없는지라 운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린다.

“크흠.”

빙혼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 운현은 괜한 헛기침을 했다.

하얀 옷의 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금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다시 인사드리지요. 저는 빙궁의 소궁주이며, 이쪽은 저를 호위하고 있는 빙혼, 그리고 저를 돕는 빙설입니다.”

시녀로 보이는 빙설이라는 아가씨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리고 빙혼 역시, 인사 대신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을 뿐이다.

하지만 운현은 미처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소, 소궁주시라고요?”

운현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체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소궁주일 줄은 몰랐다.

어찌 보면 자금성의 황태자 전하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소궁주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운현에게 대답했다.

“북해빙궁에는 많은 소궁주가 있어요. 저도 그중 한 명에 불과하니 예의는 거두셔도 됩니다. 게다가 학사님은 북해의 사람도 아니시니까요.”

“그, 그렇습니까?”

“그럼 학사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소궁주는 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소궁주님.”

운현은 얼른 소궁주에게 답례했다.

그리고 그제야 무사 빙혼의 과도한 경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궁주라……. 그래서 그랬었구나.’

자신에게야 소궁주가 별 의미가 없지만 빙혼에게는 하늘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방인이자 낯선 사람인 운현을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 마차에 오르시지요.”

소궁주의 말에 운현은 기꺼이 다시 마차에 올랐다.

탁.

문이 닫히고 마차는 곧 마을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가닥.

그렇게 운현은 북해빙궁 일행과 함께 항주로 향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직행 마차를 탄 셈이지만 운현은 마냥 안도할 수 없었다.

이 위태로운 북해빙궁 일행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과연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빙혼의 검술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

캉, 카앙.

날카로운 소리와 소란스러운 외침이 사방에 가득했다.

“막아! 막으라고 시벌!”

“이, 이놈이!”

험상궂은 사내들은 커다란 칼을 들고 위협적으로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는 한 사람, 빙혼을 막지는 못했다.

“크헉!”

“으아아악.”

연이어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운현은 혀를 찼다.

“쯧쯧, 그래도 죽지는 않을 테니 이게 다 내 덕인 줄 알게나.”

마부석에 올라앉아 빙혼을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던 운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운현은 ‘목숨까지 빼앗는 것은 지나친 것이며 자비를 베풀어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며 소궁주를 설득했다.

덕분에 빙혼은 함부로 목숨을 빼앗을 수 없게 되었다.

만일 운현이 아니었으면 벌써 여럿의 목이 달아났으리라.

‘북해에서는 일단 검을 뽑으면 무조건 생사를 거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강호 무림이 무자비한 곳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과도한 대응은 오히려 잔혹하다고 손가락질 받기 마련이다.

설령 상대가 마차를 노리고 덤벼드는 도적 떼라도 말이다.

“쯧쯧, 얼른 도망가는 게 나을 텐데…….”

아직도 물러나지 않는 도적들을 보며 운현은 혀를 찼다.

아마도 수적 우세를 믿는 것 같은데, 운현이 보기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들과 빙혼의 실력은 아예 경지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나저나 저 실력으로 어떻게 도적질을 하는지 모르겠군. 너무 못 하는데?”

운현이 보기에 도적들의 실력은 한심하기만 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운현 자신도 그런 도적들에게 당할 뻔한 과거가 있지 않은가?

“저런, 빨리 도망가라니까 결국…….”

사내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것을 보며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승패가 완전히 기울자 사내들이 주춤주춤 도망갈 기색을 보였다.

운현은 지체 없이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쳤다.

“빙혼! 이제 됐소!”

운현의 목소리에 빙혼이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 틈에 남은 사내들은 일시에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주 적절한 때에 운현의 외침이 터져 나와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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