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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4화 (54/530)

054화. 조우, 우연한 만남

‘이거 난리로구나.’

도적들에게 둘러싸인 운현은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칼에 베이느니 차라리 몽둥이가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뻔히 보이는 공격에 몸이 알아서 피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지금은 목검도 없으니…….’

이럴 때 목검이라도 있었으면 어떻게 버텨 볼 만도 하건만 변변찮은 막대기조차 없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이 실책이로구나.’

운현은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히야압!”

고함 소리와 함께 커다란 칼이 운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운현은 급히 몸을 뒤로 빼며 첫 번째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칼이 날아든다.

부웅.

몸을 틀어 두 번째 공격도 피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칼과 몽둥이에는 초식도 검로도 없어서, 등 뒤에서 날아드는 두 개의 몽둥이만은 운현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쉬익.

뒤에서 느껴지는 기세에 운현은 즉시 몸을 틀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저었다.

만일 손에 목검이라도 들려 있었다면 당연히 상대의 몽둥이를 걷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운현의 손에는 검이 없었다.

퍼억.

“크윽!”

한 줄기 신음 소리가 운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몽둥이 하나는 피했으나 다른 하나는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운현은 휘청하며 뒤로 물러섰다.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운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짜아식, 그러니 좋게 말로 할 때 들었어야지.”

둘러싼 도적들의 입가에 다시 비릿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원래 서생 놈들이 남의 말을 죽어라고 안 들어요, 쥐뿔도 없는 주제에.”

“형님, 저놈 내가 오늘 아예 조져 버려야겠소. 말리지 마시오.”

승기를 잡은 듯하자 도적들이 다시 말이 많아졌다.

특히 세 번이나 운현을 놓치고 길바닥에 나뒹굴었던 도적은 이를 갈며 몽둥이를 틀어쥐었다.

“가만있어 봐라. 형님이 먼저 개시를 해야지.”

커다란 칼을 든 도적이 거만하게 말하더니 운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기껏해야 반죽음이 될 뿐이니 너무 걱정 말거라. 알것냐?”

그러나 운현은 ‘기껏해야’ 반죽음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운현은 가만히 호흡을 조절하며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조금만 더…….’

자세만이라면 백타(白打)도 나무랄 데 없이 배웠다.

문제는 실전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섣부르게 공격을 시도했다간 실패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이상 기회를 잡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운현은 상대가 자신의 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한 방만 성공한다면 그 다음은 상대의 칼을 빼앗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아!”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도적이 칼을 휘둘렀다.

부우웅.

눈앞으로 짓쳐 드는 칼날을 보며 운현이 막 백타를 펼치려던 그때였다.

‘웃!’

순간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에 운현은 즉시 몸을 낮췄다.

카앙.

“크악.”

비명 소리와 함께 도적이 손을 감싸 쥐었다.

운현을 향해 짓쳐들던 칼은 저 멀리 튕겨나가고, 감싸 쥔 도적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뭐, 뭐냐!”

도적들은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여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너 이놈! 대체 뭔 짓을…….”

그들이 운현에게 소리칠 때였다.

후우웅.

누군가 도적들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아차릴 틈도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무복을 입은 그자는 바람처럼 도적들을 스쳐 지나갔다.

휘리릭.

“으아악!”

피가 튀고 도적들의 손에 들려 있던 칼과 몽둥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손이며 팔에 검상을 입은 도적들은 순식간에 저항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하얀 옷의 인물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자의 검이 다시금 허공을 가르려는 순간, 운현이 다급히 소리쳤다.

“멈추시오!”

탁.

운현의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시퍼런 칼날이 한 도적의 목 앞에 멈춰있는 것을 보고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리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도적의 목은 이미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리라.

“도와주셔서 감사하오. 허나 생명까지 해하지는 말아 주시오.”

운현이 정중하게 말했지만 눈 아래까지 하얀 천으로 가린 그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운현을 노려보며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멈추세요.”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운현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목에 검이 닿아 있는 도적조차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따각.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마차가 관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운현은 물론 도적들도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는데, 하얀 옷의 인물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탓.

그는 단번에 몸을 날려 마차 옆에 내려섰다. 번뜩이던 칼날은 이미 칼집 안에 모습을 감춘 뒤였다.

“세, 세상에…….”

그 모습에 도적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엔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운현이야 이 정도 도약쯤은 금의위에서 보던 것이라 별 감흥이 없었지만 말이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는지요.”

문득 마차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괜찮소.”

운현이 얼른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운현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싸울 뜻을 잃었소. 그냥 보내 주시는 것이 어떻소?”

그 말은 확실히 의외였다.

도적들은 눈을 껌뻑이며 운현을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마차 안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세요.”

조금 전과 달리 그 목소리는 차갑고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다음에는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그 서늘한 한기에 도적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빨리들 가시오. 어서!”

운현이 재촉하자 그제야 도적들은 정신을 차린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가 흐르는 손과 팔을 움켜쥔 채 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어느 정도 멀어지자 운현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정중하게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는 운현을 하얀 무복의 사내가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도적들이 자리를 뜰 때도 그의 시선은 운현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얼굴을 가린 사람이 의외라는 듯 마차를 바라보는데, 하얀 작은 신발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사박, 사박.

마치 눈을 밟는 듯 작은 소리와 함께 가녀린 여인이 마차에서 내려섰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하얀 눈꽃 같은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운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그만 시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외모가 뛰어난 궁녀는 자금성에도 많았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그 누구와도 다르고 또한 특별했다.

어쩌면 하얀 옷 탓일까?

마차에서 내려선 그녀의 모습은 마치 눈 속에 피어난 한 송이 눈꽃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앗.’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이 넋을 잃은 운현을 일깨웠다.

“아, 아니오. 아니, 그게…….”

운현은 더듬거렸다. 방금 전에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황하는 운현의 모습에 여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보아하니 선비이신 듯한데, 이런 외진 곳엔 어쩐 일이신지요?”

“하, 항주를 찾아가는 길이었소만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서…….”

대답하던 운현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녀의 발음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특별히 귀에 거슬리는 것은 아닌데 조금 어조가 달랐다.

“항주라, 공교롭군요.”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돈다. 그것은 하얀 옷을 입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저희도 항주로 가는 길이랍니다. 헌데…….”

그녀의 얼굴에 살짝 미소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길을 잘못 드셨다고 하셨던가요?”

운현이 길을 잘못 들었다면 그들 역시 길을 잘못 든 것이 된다.

여인이 다시 묻는 것도 당연했지만 운현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실 운현은 자신이 왜 고개를 끄덕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따가닥, 따가닥.

달리는 마차 안에서 운현이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거친 관도를 빠르게 질주하고 있음에도 마차는 별로 흔들림이 없었다.

마부의 실력이 대단한 것도 있겠지만 마차 자체가 대단히 잘 만들어진 것 같았다.

게다가 마차 안은 상당히 커서, 운현 말고도 세 사람이나 더 앉아 있어도 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희도 어차피 길을 잃은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얀 옷을 입은 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먼저 이름을 밝힌 운현이 머쓱해졌지만,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까운 마을까지 마차를 함께 태워 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또로륵.

하얀 옷의 미녀 옆에 있던 아가씨가 작은 잔에 차를 따랐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차를 보기는 또 처음이라, 운현은 흥미로운 눈으로 아가씨의 손길을 지켜보았다.

“이곳은 물이 조금 거칠더군요.”

하얀 옷의 미녀는 작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그 말에 운현은 이들이 이곳 사람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먼 데서 오신 듯한데 혹시 어디서 오셨는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순간 흰 무복을 입은 무사의 날카로운 시선이 운현에게 날아왔다.

그러나 하얀 옷의 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희는 북해에서 왔답니다.”

“북해요?”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반응이 사뭇 의외라는 듯 백의 미녀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북해빙궁이지요.”

“아!”

그제야 운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북해빙궁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다.

“그곳은 대단히 춥다고 들었습니다만…….”

운현의 말에 백의 미녀가 살짝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의례적인 것이었다.

“춥다고 하지만 초목이 자라지 못할 정도는 아니랍니다. 물론 이곳보다야 못하겠지만 여름엔 꽤 따뜻하기도 하죠.”

“아, 그렇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달칵.

무언가 운현이 더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하얀 옷의 미녀는 찻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더 이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 분명한지라 운현은 말을 삼켰다.

‘후우…….’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엄청난 미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 탓이 아니었다.

‘북해빙궁’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엄청난 궁금증이 솟아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칫 추근거리는 것으로 보일까 싶어 운현은 목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참아야 했다.

따각, 따각.

운현은 흘깃 하얀 무복을 입은 무사를 쳐다보았다.

사실 지금 운현의 관심은 미녀보다 이 흰 무복의 무사에게 쏠려 있었다.

아까는 다급해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의 검술은 사뭇 특이했다.

그 독특한 검로가 운현의 관심을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게다가 북해빙궁이라니, 운현의 궁금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따각, 따각.

‘으음.’

한참을 갈등하던 운현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덜컹.

운현이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마차가 제법 크게 흔들렸다.

아마 관도에 깊이 파인 곳이라도 있었던 듯한데, 그 바람에 운현의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런.’

운현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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