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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2화 (52/530)

052화. 원래 고수는…

“허어.”

모용진은 한숨을 쉬었다.

운현이 탄 마차의 뒷모습도 사라지고, 모용진은 발길을 돌려 세가로 들어섰다.

저벅, 저벅.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운현은 가주 모용단천 이래 처음으로 모용진에게 충격을 준 사람이었다.

만일 자신이 모용세가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스승으로 모시고 싶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떠나보내니 못내 아쉽기만 하다.

“후우우.”

그때였다.

낭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모용진의 귓가에 울렸다.

“오빠!”

모용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곧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상아야.”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동생 모용상아였다.

오랜만에 보는 상아의 밝은 모습에 모용진은 답답한 기분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있었구나, 오빠.”

모용상아는 상기된 얼굴로 모용진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모용진을 찾아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오빠가 세가에 있을 거라고 하셨어. 그래서 막 찾아다녔지.”

“할아버지께서?”

“응.”

모용상아는 두 눈을 빛내며 모용진을 쳐다보았다.

“오빠는 이제 괜찮아진 거야?”

“그래, 이젠 괜찮아.”

“와, 다행이다!”

환한 모용상아의 모습에 모용진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가족들에게 염려를 끼쳤는지 새삼 실감했다.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다시금 가슴을 후벼 판다.

“미아는?”

“언니는 용봉지회에 갔어. 떠난 지 한참 됐는걸.”

“용봉지회에?”

모용진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기루에 파묻혀 사는 동안 세가에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생긴 듯했다.

“그런데, 오빠. 왜 한숨을 그렇게 쉬고 그랬어? 무슨 걱정이 있어?”

모용상아의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사뭇 귀여워서 모용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그런 건 아냐. 단지…….”

대강 말을 얼버무리려다 모용진은 상아를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동자로 모용진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귀를 기울이는 그 모습에 모용진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 마음에 모용진은 진지하게 응해 주고 싶었다.

“사실은 어젯밤에 말이지…….”

모용상아에게 지난밤의 일을 모두 말해 준 모용진이 말을 맺었다.

“그래서 지금 막 운 대인님을 배웅하고 오던 길이었어. 할아버지라면 그분과 좋은 벗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던 것 같구나.”

모용진의 한숨 섞인 말을 듣고 있던 상아가 눈을 빛냈다.

“운 대인? 혹시 그 사람 이름이 운현이야?”

상아의 말에 놀란 것은 모용진이었다.

그는 상아를 돌아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운 대인님을 알고 있니?”

“응.”

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 오빠라면 매일 연무장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 수련하는 걸 쳐다보곤 했어.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데 신기하게 검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나한테 보여 준다고 하기도 했는데 어제…….”

상아는 모용진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무언가 속닥거렸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용진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혹시나 하고 오늘 연무장에 가 봤는데 없지 뭐야. 내가 너무 세게 얘기했나 봐. 아이, 참.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아쉬워하는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용진은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정말 운 오빠가 그렇게 대단해?”

상아의 질문에 모용진이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었던 거야?”

모용상아는 모용진의 말이 아직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용진은 상아의 말에 미소로 답했다.

“원래 고수는 함부로 검을 뽑지 않는 법이란다. 검을 든 자의 마음가짐이란 건, 이 세상 전부만큼이나 무거운 것이거든.”

“그래?”

상아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모용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상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버릇없는 햇병아리들이 누구라고?”

모용진의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

운현이 떠난 며칠 후.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단천은 늘 그렇듯 이른 새벽에 자신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타하!”

오늘도 들려오는 대제자 모용진의 기합 소리에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모용단천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모용진이 수련 중인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아!”

웃옷을 벗고 한창 수련중인 모용진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 끝의 움직임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었다.

저런 경지라면 이제 자신이 가르칠 것도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긴, 자신의 검로를 찾는 데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랴.’

자신의 길은 자신만이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서는 평생 지금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대제자이자 손자인 모용진을 믿고 지켜봐 주는 것뿐이다.

그사이, 모용진은 수련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한차례 검식이 끝난 모양인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꽤 진지하다.

그 모습이 또한 흐뭇해서 모용단천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더 이상 손자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으려 발길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이잉.

기합 소리는 없었다. 힘찬 도약 같은 것도 없었다.

모용진은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천천히 부드러운 검로 하나를 그려 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모용단천은 마치 무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타악.

망설임도 없었다.

모용단천은 단숨에 몸을 날려 모용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진아!”

“할아버지!”

놀란 것은 모용진이다.

막 검식을 끝낸 모용진은 갑자기 나타난 모용단천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가주 모용단천의 표정이었다.

마치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을 본 듯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모용진은 급히 검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모용단천은 지금 예를 차릴 때가 아니었다.

“그 검로를 어디서, 아니 어떤 분께 배웠더냐?”

모용단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손자가 보여 준 검로는 이 세상에 오직 세 사람, 창룡검주와 자신 그리고 모용미밖에 모르는 검로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그 검로에 모용단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모용진은 그 떨림을 분노로 해석했다.

‘하필…….’

모용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운현이 마지막으로 보여 주었던 그 검로였다.

모용가의 검인 듯하면서도 모용가의 검이 아니었던 바로 그 검로.

아직 완벽히 펼쳐 낼 수준은 되지 못했지만 동경하는 마음으로 한번 따라 해 본 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모용진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털썩.

“제자, 대죄(大罪)를 저질렀습니다.”

문외의 인물에게 검을 배운다는 것은 사문을 거역한 대죄에 속한다.

모용진은 처연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방금 자신이 펼친 검식을 모용단천이 보았으니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모용세가의 검에는 그런 검식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분께 배웠냐고 묻지 않느냐!”

자신의 물음과는 전혀 무관한 딴소리에 모용단천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과격한 반응에 모용진이 흠칫했다.

모용단천이 존칭을 쓰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모용진은 처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운 것이 아니오라, 세가에 머물렀던 운 대인께서 보여 주었습니다.”

“운 대인?”

모용단천의 머릿속으로 운씨 성을 가진 수많은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모용진이 또 다른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가에 머물렀다고? 이곳에 말이냐?”

“네. 운 대인은 자신이 학사였다 하지만 제자가 보기에는…….”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전 만났던 문사가 분명 전직 학사였다.

그리고 그는 다름 아닌 모용진이 천거했던 사람이다.

‘운현!’

방금 전까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그의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다.

모용단천은 모용진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며칠 전에 떠났습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제자가 마차를 내어 개봉 시내까지는 배웅했사오나, 그 이후는 알지 못합니다.”

“허어.”

모용단천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개봉 시내로 나갔다면 그 이후의 행적을 추적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자신의 기억에도 벌써 며칠이나 지난 일이다.

“총관을 불러라! 아니, 내가 직접 가 보겠다.”

모용단천은 급히 몸을 돌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겨우 며칠이니 행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행동이 모용진에게는 또 다르게 비춰졌다.

“할아버지!”

모용진의 처연한 음성에 모용단천이 고개를 돌린다.

“모든 죄는 제게 물어 주십시오. 그는 그저 제게 그 검로를 보여 준 것뿐입니다.”

모용진은 입술까지 깨물며 스스로 죄를 청하고 있었다.

모용단천은 그제야 자신의 손자가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발길이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개봉을 뒤진다 해도 그의 이후 행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개봉이 어디 작은 시골 마을도 아닌 다음에야.

“허어.”

또 한 번의 긴 탄식 후에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손자에게 말했다.

“진아, 일어나거라.”

갑작스러운 부드러운 말에 당황스러운 것은 모용진이다.

최악의 결과까지 각오하고 있었는데 모용단천의 반응은 전혀 의외다.

모용단천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내가 그를 찾는 것은 추궁하고자 함이 아니다.”

“네?”

모용단천은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진은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음을 직감했다.

“할아버지, 그가……, 누구입니까?”

모용진의 물음에 모용단천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만큼 그의 안타까움은 깊었다.

“그는 아마도…….”

처음엔 직감적으로 그가 창룡검주가 아닌가 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그의 과거와 나이가 마음에 걸린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자신의 추측이 아마도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찾는 분의 제자이거나, 혹은 지인(知人)인 듯싶구나.”

모용진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이토록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찾으시는…….”

“그래. 그런데 그런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몰랐으니…….”

놓쳤다는 아쉬움보다 더한 것은 그에게 홀대를 했다는 사실이다.

모용세가가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모용단천은 모용진을 돌아보았다. 그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일어나라, 진아. 자리를 옮겨야겠다. 너도 꼭 알아야 할 이야기이니…….”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 대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도 궁금하던 참이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모용단천의 아쉬움 가득한 탄식은 그 후로도 쉽게 멈추질 않았다.

그날 가주 모용단천은 마부에게 운현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마부는 개봉 시내에서 그를 내려주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자들과 함께 직접 개봉 시내를 돌아보기까지 했지만, 모용단천과 모용진은 운현의 행적을 알아낼 수 없었다.

알아낸 사실은 그가 개봉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자신과 약속을 했으니 반드시 다시 올 것이라는 모용진의 말에 한 가닥 위로를 얻으며, 모용단천은 그렇게 ‘창룡검주의 제자, 혹은 지인’을 찾는 것을 단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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