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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1화 (51/530)
  • 051화. 정말 괜찮은 청년인데

    아마도 모용진 자신이 운현을 보고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세가에서도 운현을 대했으리라.

    무언가 얻어먹을 것이 없나 기웃거리는 그저 그런 식객으로 말이다.

    모용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떠나시는 것을 잠시만 늦춰 주시지 않겠습니까?”

    운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어진 모용진의 말은 운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력하나마 제가 한번 말을 넣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운현의 대답은 모용진의 기대와 달랐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운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본디 무슨 특별한 용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대인을 대하는 세가의 대접이 이래서야 어찌 낯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모용진은 가볍게 예를 표한 후 몸을 돌렸다.

    거침없는 걸음으로 금방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씁쓸한 미소를 띠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든 세가의 제자라는 건가……. 이래서 사람들이 연줄을 그리도 찾나 보군.”

    보름이 지나도록 되지 않던 일이 제자 한 명의 말로 이루어질 듯하니 운현으로서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다.

    하나 이제 와서 모용진이 도와준다 한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짧고 부질없었는지를 깨달은 다음이다.

    가주를 만나서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나저나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정말 괜찮은 청년이군.”

    단정한 차림에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모용진을 떠올리며 운현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날 낮, 운현은 가주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허, 거참.’

    부총관이 와서 가주를 만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운현은 모용진이 힘써 준 덕분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입맛은 썼다.

    “가주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총관이 나직이 말하자 방 안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안으로 모시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총관은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드십시오.”

    사락.

    조용히 문이 열리고 운현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로 문이 닫혔다.

    탁.

    운현이 방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총관은 방문 앞에서 물러났다.

    손님과 가주의 대화이니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다.

    그러나 총관은 운현이 들어간 방문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제자께 무슨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저 손님이 가주를 만나는 것은 대제자의 요청이었다.

    총관은 이 요청을 가주가 내칠 것이라 생각했다.

    오랫동안 검을 놓고 기루에만 처박혀 있던 모용진이 감히 누구를 추천한단 말인가?

    그러나 의외로 가주는 선뜻 손님을 만날 것을 결정했다.

    그 모습은 예전 모용진이 가주의 신임을 받고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총관은 가주와 대제자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슨 변화가 있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전직 학사라…….’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손님의 신분이다.

    세가에 문사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왜 전직 학사를 추천하는지 총관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찾아 주셔서 감사하오. 가주 모용단천이라 하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운현이라 합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간 후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끊겼다.

    운현으로서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고 모용단천으로서도 의도를 알 수 없는 대면이었다.

    그러나 새벽에 다시 보게 된 대제자의 기억도 있었기에 모용단천은 무언가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 보려고 했다.

    “학사를 지내셨다 하셨소?”

    “네, 그렇습니다.”

    운현의 대답은 짧고 간단했다.

    “과거 준비가 쉽지 않으셨겠구려.”

    “모든 서생이 다 겪는 일인데 무슨 특별한 것이 있겠습니까?”

    “허허, 그렇소?”

    모용단천의 어색한 웃음으로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대체 진이는 이 사람을 왜 추천한 것일까?’

    용건이라면 찾아온 손님이 먼저 꺼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손님은 도무지 대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보통 인사를 드리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은 너무 시끄러워서 문제였는데, 이 손님은 오히려 과묵해서 탈이다.

    모용단천은 점차 이 시간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운현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참…….’

    눈앞의 모용단천은 자신이 상상하던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당당한 체구에 긴 수염, 선이 굵은 얼굴에 눈빛이 살아 있는 눈동자는 전형적인 무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벌써 체격에서부터 운현과는 차이가 심하다.

    게다가 상대는 위세를 떨치는 세가의 가주요, 자신은 무엇 하나 내어 밀 것 없는 서생에 불과하다.

    비록 자신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해도 남들의 눈이 어떤지는 요 며칠간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찾아오신 용건이 무엇이오?”

    결국 모용단천이 본론을 꺼냈다.

    “모용세가의 이름이 하도 유명하여 안부 인사라도 올릴까 해서 들렀습니다.”

    운현의 대답은 의례적이었다.

    사실 용건이랄 것이 딱히 없기도 했지만 운현은 일부러 말을 아꼈다.

    자신이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그 의도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자리나 하나 만들어 달라는 말로 들리겠지.’

    사실 그것도 목적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일이다.

    운현은 세가에서 일을 하려는 마음을 이미 접었다. 그러니 모용세가의 가주에게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 이상 자존심을 상하고 싶지 않았던 운현에겐 이대로 입을 다무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

    “허허, 그렇소? 쓸데없는 허명은 아니었는지 걱정되는구려.”

    “그렇지 않습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가주께서 모용세가의 검을 크게 깨우치셨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 검로의 뜻을 더욱 깊이 탐구하시는 것뿐 아니겠습니까?”

    ‘응?’

    그건 사뭇 이상한 말이었다.

    가주더러 세가의 검을 크게 깨우쳤다는 건 듣기에 따라선 오히려 모욕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모용단천으로선 운현의 말이 남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모용단천은 새삼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앞의 청년은 누가 봐도 단정한 문사의 모습 그대로다.

    ‘……문사들 특유의 어법인가?’

    아마도 무가에 익숙하지 않은 문사들 나름의 찬사이리라고 모용단천은 생각했다.

    하지만 은근히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이후 다른 일이 정해진 것이 있으시오?”

    운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지금 가주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눈빛은 금방 사라졌다.

    “잠시 세상을 돌아보며 안목을 넓히려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도 있고요.”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걸린 반지의 감촉을 더듬었다.

    “그렇소?”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청년이긴 하지만…….’

    살짝 아쉽기는 했으나 마음에 담아 둘 정도는 아니었다. 운현 정도의 문사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기회가 되면 다시 모용세가를 찾아 주시오. 언제든지 환영하겠소.”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감사합니다.”

    운현 역시 진심으로 답했다.

    웃는 얼굴로 운현에게 인사를 한 모용단천이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총관.”

    나지막한 모용단천의 목소리로 운현과 가주의 대면은 그렇게 끝이 났다.

    ***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

    모용세가의 정문에 운현이 서 있었다.

    무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대제자 모용진도 운현 앞에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운 대인.”

    모용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운현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덕분에 가주님을 만나 뵙지 않았소? 어차피 떠날 길이었으니 마음 쓰지 마시오.”

    그러나 모용진의 안색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가주가 운현과의 만남을 마음에 들어 했다면 이렇게 그냥 놓아 보낼 리가 없다.

    운현이 예정대로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된 모양이니…….”

    “괜찮소.”

    모용진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인사나 전할까 해서 온 길이오. 게다가 가주께서도 충분히 성의를 가지고 대해 주셨으니 걱정 마시오.”

    가주와의 대면을 마치고 나오면서 운현은 총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받았다.

    그것은 전표가 들어 있는 봉투였다. ‘약소하나마 찾아 주신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운현은 그 봉투를 웃으며 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말을 꺼내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고 재삼 확신했다.

    어차피 세상이 이런 것이다. 자금성이 그러한데 모용세가라고 다르랴?

    “꼭 다시 들러 주십시오.”

    모용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닿으면 언제고 다시 들리리다.”

    “아닙니다. 기회가 닿으면이 아니라 꼭 찾아 주셔야 합니다.”

    “허허.”

    운현은 웃음을 흘렸다.

    기회가 닿는 대로 언제고 들른다는 말은 오지 않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모용진도 그것을 알고 운현에게 이렇게 신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고맙소.”

    운현은 모용진을 보며 말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꼭 한번 들르겠소.”

    운현의 대답에 그제야 모용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옆에 서 있는 마부에게 손짓을 했다.

    마부는 모용진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마차 옆에 가서 문을 열었다.

    모용진은 운현에게 말했다.

    “개봉 시내까지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다시 뵐 날까지 부디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 마차도 사양하려 했지만, 상대의 성의가 진심인 데다 개봉까지는 제법 걸리는 길이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달칵.

    운현은 모용진과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고삐를 쥐자 마차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가닥

    “후우.”

    마차 안에서 운현은 등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세가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무턱대고 찾아오다니,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일이었지.’

    자신이 자금성에서 얼마나 세상을 모르고 살았는지 똑똑히 깨우쳐 준 시간들이었다.

    운현은 창밖으로 모용세가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서 있는 모용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말 괜찮은 청년이야. 물론 한때의 실수야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

    잠깐 얘기를 나눠 본 바, 모용진은 꽤나 운현의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모용세가에서 거의 유일하게 운현을 정식 손님으로 대해 준 사람이었다.

    첫 만남은 조금 나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젠 어디로 간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운현은 중얼거렸다.

    따각, 따각.

    큰 기대에 부풀어 찾아왔던 모용세가가 조금씩 저편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운현이 탄 마차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모용진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가주라면 분명히 운현을 알아보고 잡아 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냥 떠나보내게 되니 미안한 마음에 앞서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제대로만 했었다면…….’

    자신이 나서서 할아버지께 설명을 드렸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나설 면목이 없다 여겨 부총관에게 일단 말을 넣은 것인데, 결과가 이리되고 말았다.

    ‘하긴 대인께서 워낙 자신을 숨기시니…….’

    자신만 해도 처음 운현을 보고는 하릴없는 서생 나부랭이쯤으로 알았으니 남을 탓할 일이 못 된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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