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50화 (50/530)

050화. 대제자 모용진

휘릭.

운현은 목검을 거두었다.

그래 봤자 칼집이 없으니 손을 바꿔 쥔 것뿐이지만, 그건 이제 비무가 끝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해진 대로 따르는 것은 아이들도 할 줄 아네.”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나 검식의 뜻을 이해하고 그 흐름을 알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검의 종에 불과할 뿐, 결코 검을 다스리는 자가 될 수는 없네.”

모용진은 아무런 대꾸도,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선 채 자신의 부서진 목검을 바라보고 있을 뿐.

“다행히 자네의 자질은 나쁘지 않으니 열심히 수련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걸세. 그러니…….”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더 이상의 분노는 없었다. 모용진을 혼내려던 생각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운현은 장래가 기대되는 모용진의, 그리고 그의 검에 대해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마지막 일검을 모용세가의 검으로 선택한 이유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우선 술을 멀리하고 마음부터 다스리게. 종이 되지 않으려면 주인이 되는 수밖엔 없으니까.”

여전히 모용진의 대답은 없었다.

물끄러미 모용진을 바라보던 운현은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몇 걸음 걷던 운현이 힐끗 돌아보았지만 모용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운현은 입맛이 썼다.

‘쯧, 엄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셈이 됐군.’

나중에는 그의 검에 더 관심이 가긴 했으나 결국 그를 상대로 화풀이한 것에 다름 아니다.

애초에 자신이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졌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술 취한 그가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흥분하여 이렇게 한밤에 난리를 피웠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잘한 일은 못 된다.

‘나도 못 하는 주제에 남에게 마음을 다스리라 했으니…….’

운현은 가슴께에 손을 얹어 반지를 어루만졌다.

자신의 목검 앞에 모용진의 목검이 부서져 나갈 때는 운현도 놀랐다. 그동안 목검으로 무언가를 베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목검에 서린 그 기운이 일충현 형님이 전수한 내공 덕분임을 운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나야겠군.’

어차피 떠나려 했던 참이다.

게다가 이런 사고까지 쳤으니 모용세가를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술 취한 제자와 드잡이 질을 했다고 내쫓기기 전에 먼저 나가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이다.

“후우.”

짧은 한숨을 쉬며 운현은 세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멀어져 갔지만 뒤에 남은 모용진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방금 전에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졌던 광경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서 산산조각이 난 목검이 진실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후후.”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자신의 ‘일검관천’은 성공했다. 그것도 그 어느 때보다 더 완벽하게.

지난 비무에 이렇게 성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일검관천은 마지막 순간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대체……, 그게 뭐였지?”

마지막 순간 모용진이 본 것은 자신의 목검이 산산조각 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보다 더욱 모용진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바로 운현의 목검이 보인 검로였다.

처음에는 모용세가의 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한 모용세가의 검에 그러한 검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용세가의 검이었다.

모용세가의 검이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그만의 검.

자신만의 검이란 어떤 것인지 그가 직접 보여 준 것이다.

다름 아닌 모용가 최고의 검식, 일검관천을 상대로.

“자신만의 검, 자신만의 흐름, 자신만의……, 그 무엇.”

모용진은 아까 운현이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이곳 모용세가에 입양되고 나서 모용진에게 자신만의 것이란 없었다.

가주에게서 받은 이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따라왔다.

시킨 것은 무엇이든 훌륭하게 해내려 했고, 누구보다도 가문의 검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래서 대제자라는 지위까지 얻어 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발밑이 허전함을 느꼈다.

비무에서 패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가주처럼 도피의 길을 택한 것도, 그럴 만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세가가 다시 일어나는 곳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자신은 모용세가의 재기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그의 방황은 조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습관화된 자괴감이었다.

“후후후.”

어쩌면 오늘 같은 날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에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날이 오리란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을 테니까.

스륵.

모용진은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엔 별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기루에서도, 어느 기녀의 눈동자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종이 되지 않으려거든 주인이 되라고?”

모용진은 중얼거렸다.

“후후.”

허탈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모용진의 표정은 여전히 참담했지만, 그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은 방을 나섰다.

새벽 수련을 마치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방식이자, 수십 년간 이어 온 습관이기 때문이었다.

저벅, 저벅.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맡으며 모용단천은 자신의 연무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신의 처소에서 연무장으로 가려면 세가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

그것은 세가를 돌아보며 하루를 시작하라는 선조들의 배려이기도 했다.

저벅, 저벅.

작은 건물 사이를 빠져나갈 즈음, 모용단천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응?’

소리가 들려온 쪽은 일반 제자들의 연무장이었다.

간혹 의욕이 왕성한 제자들 중에는 이른 새벽부터나 밤늦게까지 수련에 매진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활기 넘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주로서는 기쁜 일이기에, 모용단천은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하앗!”

연무장이 가까워지자 제법 단단한 기합 소리가 들렸다.

모용단천은 수련을 방해하지 않도록 건물들 사이로 연무장을 쳐다보았다.

“하앗!”

휘리릭.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미 수련에 임한지 한참 되었는지, 청년의 몸에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희미한 어둠 속에 푸른 검광이 번뜩이고 격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근육에선 김이 피어오른다.

‘아니?’

모용단천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웃통을 벗어젖힌 채 검술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 청년은 바로 대제자 모용진이었다.

‘진이가?’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기루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그런데 이 새벽부터 검술 수련이라니?

“하아!”

기합 소리가 다시 연무장을 울리고 너무나 익숙한 검로가 모용진의 검에서 펼쳐졌다.

모용세가의 제자라면 누구나 처음 배우게 되는 검식이었다.

대제자 모용진이라면 이미 예전에 끝마친 검식이다.

그러나 모용진의 검에서 펼쳐지는 검로는 달랐다.

일견 어설퍼 보이기도 하고 가끔씩은 깜짝 놀랄 정도로 날카로움을 보이기도 하는, 마치 한창 용광로에서 다듬고 있는 검과 같은 느낌이었다.

철저하게 주어진 길만을 가던 예전의 모용진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검로였다.

‘호오.’

모용단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검 끝이 살아 있다.’

모용진의 검은 분명히 정해진 검로와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모용진의 검에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생생한 것은 바로 모용진의 눈빛이었다.

검 끝을 향하는 모용진의 눈동자는 마치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타하!”

모용진의 기합 소리에 가주 모용단천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대제자가 무엇을 하는지 깨달은 까닭이다.

사박.

모용단천은 조용히 그곳에서 물러났다.

제자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떠나는 모용단천의 가슴은 더할 수 없는 뿌듯함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됐어.’

늘 기대하고 있던 아이였다.

잠시간의 방황이 자신을 실망시키긴 했으나, 오늘 보니 그 시간마저 헛된 것이 아니었던 듯했다.

아니, 오히려 늘 아쉬워했던 부분을 저리도 훌륭하게 극복한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까지 하다.

“허허허.”

결국 너털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용단천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모용세가에 나 관일검 모용단천만이 있지 아니함을 세상이 알게 되겠군.”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앞날이 더욱 창창할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렇지 아니하랴?

관일검 모용단천은 그 어느 때보다 흐뭇한 마음으로 자신의 연무장을 향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술에 빠져 있던 손자 모용진이 무엇 때문에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잠시 궁금해지긴 했으나, 그것은 천천히 들어도 될 일이었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정리하던 운현은 문득 방 밖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응?’

분명 누군가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아무런 말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밖에 누가 있소?”

운현의 목소리에 답하듯 누군가의 공손한 대답이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운현은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세가의 사람인 듯한데 저런 정중한 태도는 또 무엇인가?

“일어나긴 했소만…….”

운현은 대답하며 방문을 열었다.

달칵.

“당신은…….”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방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어젯밤의 바로 그 술 취한 청년이었다.

청년 모용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운현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모용진의 태도는 어젯밤과 너무 딴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밤에 싸운 상대와 다시 만나는 것이 쑥스럽기만 한데, 저렇게 정중하게 나오니 오히려 당혹스럽다.

“아, 괘, 괜찮소. 그런데 무슨 일이시오?”

운현의 말에 모용진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엔 제가 무례했습니다.”

“아, 뭐 사과할 것까지는…….”

운현은 말을 더듬었다.

상대가 이렇둣 예의 바르게 나오니 오히려 자신이 부끄럽다.

“나도 간밤엔 미안했소. 술이야 좀 마실 수도 있는 것인데…….”

운현이 사과했지만 모용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대인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대인?’

대인이라는 호칭은 또 처음이다.

예의 바른 그의 사과에 오히려 운현이 난처해졌다.

“허어, 참…….”

그런 운현을 바라보며 모용진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묻는다.

“그런데 대인께서 세가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잠시 가주께 인사나 드릴까 해서 들렀소이다만, 바쁘신 것 같아 그냥 떠나려 하는 참이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모용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가주는 절대 객을 홀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혹시 가주님과 전부터 아시는 사이십니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단지 모용세가가 이름도 높고 평소에 소문도 많이 들은 터라…….”

운현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모용진은 충분히 사정을 알아차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