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9화 (49/530)
  • 049화. 모용세가의 검

    따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모용진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모용진은 그대로 운현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엔 그것만이 아니었다.

    퍽.

    운현의 목검은 어느새 되돌아와 모용진의 등을 가볍게 쳤다.

    비록 아무 힘은 없었지만 그 느낌만은 모용진의 등에 분명히 전달되었다.

    탁, 탁.

    몇 걸음 내딛던 모용진이 다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와 비슷한 거리를 두고 운현이 서 있었다.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무런 미동도 않은 채.

    ‘이, 이게…….’

    술이 확 깼다.

    어차피 만취하도록 마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차가운 밤공기에 이미 술기운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제야 술이 깨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용진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자 운현이 한마디를 던졌다.

    “벌써 포기한 건가?”

    으득.

    모용진이 이를 악물었다.

    ‘좋아, 숨겨 둔 한 수는 있었다 이거지.’

    생각해 보니 글만 읽던 서생이 이렇게 가벼이 목검 비무에 응할 리가 없다.

    어느 정도의 실력은 있다고 보아야 하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서생의 기준에 의한 실력이다. 본격적으로 검을 익힌 자신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모용진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자신이 각오를 다진 이상 방금 전과 같은 꼴은 당하지 않으리라고, 모용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아!”

    탓.

    모용진이 운현을 향해 도약했다.

    그의 목검은 운현의 팔이 아니라 미간을 똑바로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현의 검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모용진은 분명히 확인했다.

    ‘느리다.’

    느렸다. 운현의 목검은 마치 검무라도 추는 듯 느긋하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용진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일격이 운현에게 제대로 들어가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모용진이 운현의 미간에서 어깨로 목표를 바꾸려는 순간이었다.

    따악.

    느릿느릿 움직이던 운현의 목검이 어느새 모용진의 목검을 쳐 내고 있었다.

    방향을 잃은 모용진의 목검이 크게 옆으로 비껴 나고, 뒤이어 운현의 목검이 모용진의 어깨를 쳤다.

    퍼억.

    “크윽.”

    모용진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번의 일격은 아까와 달리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도 제대로 할 생각이 없나?”

    운현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모용진은 대답 대신 이를 악물었다.

    으득.

    가벼운 생각은 날아간 지 오래다. 모용진은 이미 진지할 대로 진지해져 있었다.

    스륵.

    신중히 자세를 잡으며 모용진은 운현의 허점을 노렸다.

    그러나 허점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봐도 그냥 서생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데…….’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맞을 것 같은 운현이었다.

    대응도 느릿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목검을 쳐 낸단 말인가?

    그것도 그리 간단하게.

    ‘이번엔…….’

    지금까지 자신의 공격은 너무 단순했다.

    상대방을 너무 가볍게 여긴 탓이리라.

    모용진은 생각을 바꿨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있는 그의 머릿속으로 몇 개의 검식이 스쳐 지나갔다.

    눈 감고도 펼쳐 낼 수 있는, 마치 자신의 몸과도 같은 검식들.

    “타아앗!”

    내력이 담긴 그의 보법이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르기로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모용진의 목검이 운현의 허리를 노리고 짓쳐 들었다.

    후웅.

    이번에는 분명히 보았다.

    둔탁한 운현의 목검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자신의 검을 막아 가고 있었다.

    느릿느릿한데도 자신보다 먼저 닿고 있는 그의 목검.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고도 이해 못 할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용진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휘릭.

    모용진의 검이 방향을 틀었다.

    어느새 그의 검은 아래로 내려앉아 운현의 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뼈까지 부러뜨릴 듯한 기세로 모용진의 목검은 날카롭게 운현의 정강이를 향해 짓쳐들었다.

    ‘됐다.’

    이번엔 막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착각인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따아악.

    귀를 찢을 듯한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크윽.”

    참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턱.

    뒤로 물러난 모용진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손아귀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목검을 놓치는 꼴불견은 면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그의 손은 피를 내비치고 있었다.

    조금 찢어진 정도에 불과했지만 모용진이 받은 충격은 컸다.

    “당신은……, 누구요?”

    모용진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운현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에게 검을 가르치고 있는 학사일세.”

    운현의 대답에 모용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대가 아직도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라 여긴 탓이다.

    “나를 모욕하겠다는 거요?”

    “자네가 검을 든 모든 무인을 모욕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크윽.”

    모용진이 신음을 흘린다.

    “이제부턴 손에 사정을 두지 않겠소. 내 원망은 마시오.”

    운현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이제까지는 사정을 두어서 그런 꼴이었나? 내 비록 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자네 같은 삼류 날건달을 가르칠 만한 실력은 되니 걱정 말고 해 보게.”

    운현은 자신의 실력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안목만은 남보다 못하지 않다고 자부해 왔다.

    그런 운현의 눈에 보이는 청년의 움직임은 잘 봐 줘야 훈련을 마칠 때쯤의 금의위들과 비슷했다.

    하물며 지금처럼 취한 상태라면 전혀 두려운 상대가 아니다.

    으득.

    모용진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의 모욕에 답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하아!”

    기합 소리가 모용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갈고닦은 모용세가의 검이 대제자 모용진의 검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타앙.

    내력이 실린 목검의 격돌과 함께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번엔 한 번의 격돌로 끝나지 않았다.

    휘리릭. 탕, 타앙.

    모용진의 목검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그의 목검은 운현을 향해 현란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 하나하나가 날카롭기 그지없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운현의 목검은 그 수많은 공격을 너무나 간단히 걷어 내고 있었다.

    다음 수가 뻔히 읽히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휘릭, 타악.

    모용진의 공격을 걷어 내며 운현은 상대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확실히 삼류 날건달 수준은 아니다.

    검의 움직임을 보건대 상대는 진지하게 검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황궁의 일반 금의위 수준이랄까.

    그러나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안타깝군.’

    모용진의 검에는 흐름이 없었다.

    쏟아지는 공격들은 그저 몸에 익힌 동작들의 기계적인 반복에 불과했고 운현이 예측한 전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검로 전체를 관통하는 모용세가의 도도한 흐름이, 청년의 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쯧.”

    운현은 내심 아쉬웠다.

    어느새 그의 관심은 무례한 청년에 대한 훈계보다는 청년의 검법으로 옮겨 가 있었다.

    터엉.

    모용진의 검이 크게 튕겨 나갔다.

    “크윽.”

    손아귀에 통증을 느끼며 모용진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운현은 별반 움직이지도 않은 채 서 있을 뿐이다.

    모용진은 신음을 삼켰다.

    ‘움직일 필요조차 없었다는 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운현은 제대로 된 보법 같은 것을 배운 적이 없다.

    백호수련검에 있는 보법이라야 정확한 자세를 위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도 운현은 그런 자연스러운 몇 걸음의 움직임 외에는 크게 이동한 것이 없었다.

    “동작은 나쁘지 않으나.”

    운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검로에 흐름이 전혀 없군. 자질은 좀 있는 것 같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는 정식 제자가 된다 해도 두각을 나타내긴 힘들겠어.”

    그건 운현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모용진의 얼굴은 오히려 일그러지고 있었다.

    “크으윽.”

    그것은 굴욕이자 모욕이었다.

    정식제자가 되어도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겠다니?

    대제자인 자신에게 그 말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뭔가 자네만이 가지고 있는 것, 혹은 자네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나?”

    운현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 말은 모용진에게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라고 묻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내 실력이 당신에게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겠소.”

    모용진은 검을 앞에 세우고 이를 악물었다.

    “허나 더 이상의 모욕은 받지 않겠소.”

    “허.”

    운현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도 모욕을 받기 싫은 사람이 술에 빠져 살면서 함부로 남이나 업신여겼단 말인가? 자네 참 웃긴 사람이군.”

    모용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의 말이 백번 옳았다.

    술에 빠져 스스로를 자책하고 도피하며 살았던 시간들이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어쩌랴?

    오늘의 이 치욕스러운 상황은, 이 비참한 모습은 바로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니 말이다.

    스윽.

    아무 말도 없이 모용진은 자세를 잡았다.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검식,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건 마지막 검식이었다.

    그의 양할아버지이자 가주인 모용단천조차 칭찬했던 검식을 지금 모용진은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될까?’

    예전에도 쉽지 않았던 검식이다. 과연 지금 이 상황에서 성공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제 모용진 자신에게 남은 것은 이것뿐이니까.

    ‘후우.’

    모용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했다.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는 전율과 함께 전신의 신경이 팽팽히 곤두섰다.

    눈앞에 있는 단 한 사람, 그리고 단 한 순간을 위해서.

    그리고 운현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응?’

    눈앞에 선 청년의 기세는 사뭇 심상치 않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져 오는 기세를 느끼며 운현도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의 검을 세웠다.

    우웅.

    운현의 검이 마음속에 떠오른 바로 다음 순간.

    “타하!”

    짧은 기합과 함께 모용진은 운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이 한 수에 모든 것이 결정 날 테니까.

    파아앗.

    내력을 실은 모용진의 검이 섬전처럼 운현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휘황한 달빛 아래 펼쳐진 그것은 바로 모용세가 최고의 검식, 일검관천(一劍貫天)이었다.

    “하아아아!”

    모용진은 이미 자신의 목검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늘을 꿰뚫는 그의 검이 운현을 향해 쇄도할 때, 드디어 운현의 목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아아.

    둔탁한 그 검로는 너무나 낯설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익숙했다.

    ‘아!’

    그 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용진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모용세가의 검이었다.

    이제껏 평생을 보아 온, 그러나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모용세가의 검.

    그 아름다운 검로가 달빛 아래 도도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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